[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시간과 변화의 기회를 박탈당한 삶...연극 '죽음의 집'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시간과 변화의 기회를 박탈당한 삶...연극 '죽음의 집'
  • 주하영
  • 승인 2022.04.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윤영선·윤성호 극작, 윤성호 연출, 제 41회 서울연극제 연출상·희곡상 수상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사진=극단 아어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 죽은 자들이 떠난 집에는 홀로 남겨진 산 자 '동욱(박용우)'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일 뿐 죽음은 '멈춤'을 의미한다./사진=극단 아어(ⓒ이강물)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뇌출혈로 인해 좌측 반구의 뇌 기능이 정지하는 것을 경험한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8년에 걸쳐 좌뇌의 기능을 회복한 뒤 2008년 테드 강연에서 오히려 뇌졸중을 겪은 후 우뇌의 활성화로 인해 훨씬 더 평화롭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뇌 기능이 무너지는 과정을 최초로 관찰한 뇌과학자”로서 전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된 테일러는 ‘나를 알고 싶을 때 뇌과학을 공부합니다’에서 좌뇌의 손상으로 언어의 개별성을 잃어버린 대신 자유로워진 우뇌로 인해 자신의 본질을 “우주만큼 거대한 에너지 공”으로 경험하게 되었고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영혼을 만나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또한, 이는 50년간 좌반구가 합리적인 뇌, 우반구가 감정적인 뇌라고 여겨온 신경해부학적 관점에 다른 시선을 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만약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라 불리는 ‘죽음’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생긴다면 어떨까? 죽음에 대해 평생 연구를 해 온 철학자가 실제 ‘죽음’을 겪고 삶으로 되돌아온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데,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대화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 여전히 보인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시간은 ‘삶’일까, ‘죽음’일까? 만약 죽음이 끝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게 된다면, 현재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까, 아니면 그대로일까?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사진=극단 아어
연극 '죽음의 집' 포스터 컷. /사진=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 캡처.

최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유쾌하고 진지하며 흥미롭게 던진 연극 ‘죽음의 집’ 공연의 막이 내렸다.

연극 ‘죽음의 집’은 2017년 고(故) 윤영선 작가(1954-2007)의 10주기 추모 페스티벌에서 첫 선을 보인 작품이다. 아들인 윤성호 연출 및 작가는 아버지 윤영선 작가의 유품에서 발견된 미완성 원고 ‘죽음의 집’을 재창작하고 연출해 2020년 제 41회 서울연극제에 참가했고, 희곡상과 연출상을 수상했다.

2022년에 출간된 희곡 ‘죽음의 집’의 작품 노트에 따르면, 1994년에 집필되기 시작한 윤영선 작가의 ‘죽음의 집’은 중간에 끝나버린 미완으로 남겨졌지만 2014년 이후 “고인의 컴퓨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초고로 보이는 짧은 완결본”이 발견되었다. 이에 윤성호 연출 및 작가는 윤영선 작가의 미완 대본 뒤에 붙어 있던 ‘작가의 노트’를 단서삼아 새로운 창작을 덧붙여 연극 ‘죽음의 집’을 완성했다.

출간된 희곡집에는 윤영선 작가의 초고와 윤성호 연출 및 작가가 완성한 대본이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윤영선 작가의 초고 끝부분에는 ‘죽음의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내용이 대사로 언급된다.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남자 황상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여기는 죽음의 집입니다. 우리 모두는 ...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여기 모여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군요. 그래요. 우린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난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뭔가 달라지겠죠. 아직은 모르겠지만, 뭔가….”

마치 초대된 관객들을 향해 남아 있는 삶을 위한 건배라도 하듯 황상호는 덧붙인다.

“죽음도 삶도 아닌 하지만 살아야 할 무언가를 위해.”

연극 ‘죽음의 집’은 교통사고로 인해 자신이 죽음에 이르렀음을 확신했으나 눈을 떠보니 거실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한 황상호가 혼란스러움 속에서 논의를 하고자 대학동창 이동욱과 고등학교 동창 박영권을 불렀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사진=극단 아어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 시계 초침 소리와 섞인 여러 삶의 소리들이 크게 확장되면서 증폭되는 가운데 공포를 느낀 '상호(이강욱)'는 시계 건전지를 빼고, 전원 코드를 뽑고, 전등까지 꺼버린 채 암흑 속에 머문다./사진=극단 아어(ⓒ이강물)

윤성호 연출 및 작가는 고인의 원작의 핵심이 되는 부분들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시대에 맞게 인물들의 설정을 변경하고 질문과 사유를 더할 수 있는 상황들을 추가함으로써 나름의 메시지와 결론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또, 연출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는 ‘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이라는 이중 프레임을 강조한다. 무대 위 아파트 거실 공간에는 외부로 향한 베란다 유리창이 무대 뒤쪽으로 위치해 관객들을 마주하는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바깥의 소리와 불빛이 창으로 스며들지만 선명한 외부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마치 어둠 속에 떠 있는 미지의 공간처럼 ‘아파트의 거실’은 어딘지 모를 폐쇄성을 가진 신비스러운 곳으로 연출된다.

시계 초침 소리와 섞인 여러 삶의 소리들, 냉장고 소리, 형광등 소리, 차 소리와 같은 소리가 크게 확장되면서 증폭되는 가운데 매우 초조해 보이는 한 남자가 창문을 닫는다. 남자는 여전히 크게 들리는 소리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시계 건전지를 빼고, 전원 코드를 뽑고, 전등까지 꺼버린다.

완벽한 고요 속에서 안도하는 듯한 남자는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또 다시 긴장한 채 머뭇거리면서 묻는다.

“누구세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친구를 향해 동욱은 얼굴이 수척하다면서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상호는 그리스로 출장 갔다 오면서 선물로 사온 위스키를 꺼내 보이며 동욱에게 함께 마시자고 청한다.

늦은 시간에 와달라고 해서 미안하다는 상호에게 동욱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함과 “별 것 없는 삶”에 대해 말한다. 잠시 어색한 침묵 속에 있던 상호가 되묻는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동욱이 대답한다.

“글쎄, 근데 날 밝으면 또 잊고 사는 거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보이고 할 말이 있다면서 물어도 답하지 않는 상호를 보면서 동욱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친구인 영권이 왜 이렇게 늦는지 모르겠다면서 짜증을 내는 상호에게 동욱은 그냥 가겠다고 말한다. 황급하게 동욱을 만류하는 상호는 두려움 때문이라면서 살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사진=극단 아어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 며칠 밤을 지새운 초췌한 모습의 '상호(이강욱)'는 늦은 밤 자신의 집에 와 준 대학 동창 '동욱(박용우)'에게 고마워하지만 무슨 일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이상한 태도를 보인다./사진=극단 아어(ⓒ이강물)

“자존심이 상한다고 강아지가 음독자살을 했다면 믿을 수 있겠냐”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진 상호는 정면에서 달려오는 트럭을 피하려다 갓길 밖으로 떨어져 불타버린 차량에 운전자가 사라졌다는 신문 기사를 보여준다.

상호는 그 차량의 운전자가 자신이며 분명히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지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 와 있고, 양주병까지 옆에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상호는 죽은 사람이 술도 마시고, 산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말도 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걸 어떻게 납득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당혹스러워한다.

동욱은 상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지만 잠시 후 영권과 그의 아내 문실이 집을 방문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욱에게 영권과 문실은 사실은 자신들도 조금 전에 죽었는데 너무 멀쩡해서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영권은 상호의 전화를 받고 나오던 길에 아내와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고 지나친 감정충돌로 인해 결국 동반자살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자신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동욱은 집을 나서려고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그를 막아선다.

세 사람은 동욱 혼자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죽었다는 말을 하면 술을 마시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양주잔을 채우면서 소란스러운 게임을 이어나가던 영권은 이제 살면서 자신을 가로막았던 것들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솔직하고 재미있게 사는 삶에만 집중하겠다고 선포한다.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사진=극단 아어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 자신이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르렀지만 깨어보니 거실에 멀쩡한 채로 기내에서 산 양주병과 함께 누워있었다는 '상호(이강욱)'의 말을 '동욱(박용우)'은 믿지 않는다./사진=극단 아어(ⓒ이강물)

약사인 아내와 자신의 결혼은 “일종의 물물교환”이었을 뿐 불행을 숨긴 채 가식적으로 살아온 ‘죽음’과 다름없는 삶이었다는 영권을 향해 문실은 불쾌함을 드러낸다. 문실은 사회적으로 성공의 길이라고 여겨지는 삶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남편의 불륜과 자신의 외도로 이어졌을 뿐 사실은 매일 죽어가는 악몽과도 같은 “끔찍한 삶”이었음을 토로한다.

문실은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인 동욱에게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묻는다. “그냥 살아있으니까 사는 것”이라는 동욱의 대답에 문실이 되묻는다.

“아무것도 바뀔 게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데 산다는 게 무슨 의미죠?”

연극 ‘죽음의 집’의 질문은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과 섞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것이 괜찮은 일인지, 잠에서 깨어난 것과 죽음에서 깨어난 것 사이에 다른 점은 있는지, 죽고 싶어서 약을 먹었는데 계속 이어지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들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죽음에서 시작한 이야기들은 결국 ‘삶’을 향한 질문들로 이어진다. 그저 열심히 산다는 것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을 의미할까?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냥 산다는 것은 죽은 상태로 있으면서 살아있는 사람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닐까? 살아있음을 감각할 수 없다면, 죽어있다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몽테뉴는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처럼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라고 말했다. 절망도 죽음도 모두 반대의 속성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언제나 그 자체를 깊이 들여다보는 노력과 관조, 지혜를 통해 얻어진다.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못하면 잘 죽을 수도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삶을 잘 살 수도 없다고 여겼다. 그는 죽음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는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질문은 결국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에 대한 답을 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과 삶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결국 죽음이 정말로 나쁜 것인가에 대한 가치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육체 이상의 존재라고 여기는 우리는 죽음 뒤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죽음이 어떻게 ‘비존재’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케이건은 죽음이 나쁘다는 설명은 본질적으로 죽음이 고통스러운 경우나 도구적으로 죽음이 고통을 낳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음이 상대적으로 나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피력한다. 비존재, 즉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핍’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나쁜 것이 될 수 있고, 죽음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결핍하게 만든다는 데에서 ‘박탈’로 인한 슬픔, 아픔, 고통, 후회와 미련을 야기하게 된다.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사진=극단 아어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 '동욱(박용우, 왼쪽)'은 '상호(이강욱, 오른쪽)'의 집을 방문한 '영권(김훈만)'과 그의 아내 '문실(문현정)'에게 자동차 사고와 죽음에 대한 상호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하지만 영권과 그의 아내 문실 역시 죽은 존재들임을 알게 된다./사진=극단 아어(ⓒ이강물)

연극 ‘죽음의 집’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죽었는데 죽었다고 말할 수 없고, 살았는데 살아있는 게 아니며,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가 되었다는 인식에 다다른 상호는 신나는 댄스 음악을 틀고 모든 복잡함을 잊기 위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춤을 추던 네 사람 가운데 갑자기 문실이 자취를 감추고,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온 문실을 세 사람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 대한 인식, 망각이 주는 슬픔, 시간과 기회의 결핍,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단절로 인해 구분된다.

매일 새로운 삶이 펼쳐지길 바라며 반복되는 생활을 되풀이하는 존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변화’이다. 삶에서 변화는 시간이 주는 축복 속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남아있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언젠가 ‘변화’할 것을 다짐하며 현재를 산다.

오늘의 꿈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을 약속하는 우리는 반복되는 하루가 소중한 ‘기회’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먹고 사는 생존이 더 중요하고, 진정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는 일상이 너무 바쁘며, 삶이 주는 좋은 것들을 떠올리기에는 ‘삶’이라는 시간에 종속되어버린 탓에 습관처럼 마비된 상태에 놓여 있다.

익숙한 삶에 길들여진 인간은 삶이 유한한 것임을 인식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일에 점점 더 게을러진다. 인간이 죽음을 인식할 때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은 시간의 ‘박탈’이다. 남아있는 시간이 없다는 인식은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동시에 ‘변화’의 기회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든다. 죽음은 다름 아닌 ‘멈춤’이기 때문이다.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사진=극단 아어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장면.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구분에서 벗어나 모든 복잡한 것들을 잊고 '상호(이강욱)'는 댄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고, 동욱과 영권, 문실도 함께 한다./사진=극단 아어(ⓒ이강물)

동욱이 방문하기 전 상호가 멈춰버린 시계는 11시 52분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이 살아있는 상태에 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구분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상호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어있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있는가’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변화를 추구하며, 일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 죽음을 겪은 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절이 아닌 지속이고 박탈이 아닌 축복이다. 하지만 멈춤 속에 남겨지는 것은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지속할 수 없는 기억, 바로 ‘망각’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것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기에 깊은 사유가 필요한 철학자에게는 오히려 더 없이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몸이 감각을 통해 사유를 방해하는 ‘감옥’이라고 여겼던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영혼에게 몸의 간섭 없이 지혜를 마음껏 탐구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그리워하는 것들은 대부분 감각과 관련된 것들이다. 몸은 자연의 영역에 속해 있고, 감각과 연결된 행복과 기쁨, 아픔과 슬픔은 곧 삶의 기억이 된다.

멈춰진 시계는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삶은 다시 일상의 소리들로 채워지지만 시간은 더 이상 죽은 자의 것이 아니다. 또 다시 되풀이되는 하루를 마주한 관객들에게 남겨진 질문은 하나일 것이다.

‘당신은 현재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죽어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삶을, 혹은 죽음을 살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오늘에, 그리고 내일에, 유한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들에 놓여있을 것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주하영
주하영
jhy0219@hanmail.net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6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엔디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