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접촉과 자유, 사랑을 향한 갈망...英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접촉과 자유, 사랑을 향한 갈망...英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 주하영
  • 승인 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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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국립극장(NT)의 팬데믹 스타일 TV영화...영국 스카이 아츠(Sky Arts)와 미국 PBS 송출
- 2021-2022 NTOK Live+(엔톡 라이브 플러스) 시리즈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사이먼 고드윈 연출은 응접실과 침실, 발코니와 같이 구체화된 세트가 부여된 장면과 소품이 어지럽게 배치된 리허설 룸의 장면을 교차적으로 편집한다. 영국 언론 '가디언'의 아리파 아크바는 '오래된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영상미'에 주목한다./Photo by Rob Youngson.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 경보 단계 중 최고 위험 단계인 ‘팬데믹’을 선언했다. 2019년 12월에 발생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 COVID-19는 전 지구촌에 ‘접촉’에 대한 공포를 불러왔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모두 위험지역으로 분류되었고, 홀로 격리되거나 서로 간에 거리를 두는 삶이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많은 관객들이 한 공간에서 무대와 함께 호흡하는 공연장은 가장 먼저 폐쇄조치가 내려졌다.

영국에서 첫 번째 봉쇄조치가 시행되었고, 잠시 완화되는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2021년 5월까지 거의 14개월 동안 공연장은 폐쇄 조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21년 5월 17일, 암흑과 같던 긴 시간을 뚫고 마침내 연극 ‘쥐덫’을 관람할 수 있게 된 평론가 도미니크 카벤디시는 자신의 벅찬 감정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2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땅바닥에 입을 맞춘 것처럼 공연을 재개한 극장 앞 도로에 키스를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피력했다.

2020년 12월, 영국 국립극장의 예술감독인 루퍼스 노리스는 오랜 기다림과 공포, 절망과 우울, 불투명한 미래와 불안 속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팬터마임 ‘딕 휘팅턴’을 올리비에 대극장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원래 2020년 여름 올리비에 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던 사이먼 고드윈 연출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화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방역 지침에 의해 외부 야외 촬영이 금지되고, 리틀턴 극장 건물 안의 공간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정된 상황은 오히려 "장애를 새로운 길을 위한 돌파구"로 활용하도록 만든다. 백스테이지의 방화벽과 철문은 그대로 노출되며 '극장'이라는 공간을 강조하는 '연극의 영상화'를 가능하게 한다./Photo by Rob Youngson.

노리스는 관객들과의 호흡이 반드시 필요한 팬터마임 공연은 1150석 규모를 500석 미만의 ‘거리두기 좌석’으로 변경한 올리비에 극장에서 NT Live로 송출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 다른 방식을 적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제작자인 데이비드 사벨과 노리스는 관객들이 없는 극장 안에서 배우들과 제작진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엄격한 통제와 제한을 유지하면서도 ‘극장’이라는 공간을 강조하는 ‘연극의 영상화’를 실현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방역 지침에 의해 외부 야외 촬영이 금지되고, 리틀턴 극장 건물 안의 공간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정된 상황은 오히려 “장애를 새로운 길을 위한 돌파구”로 활용하도록 만들었다.

4주간의 리허설 과정과 단 17일의 촬영 기간이 주어진 속에서 극장에 올 수 없는 관객들을 위해 TV영화로 계획된 프로젝트는 가장 이상적인 상영시간으로 ‘90분’이라는 제한이 설정되었다.

각색을 맡은 에밀리 번스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대사의 상당부분을 덜어내야 했고, 스크린의 특성상 내밀한 감정 표현으로 상황을 대체할 수 있는 부분들은 과감하게 삭제되었다.

대신 5일 만에 모든 일이 벌어지는 작품의 긴급함과 긴장감, 속도감을 강조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전달될 수 있도록 맥락에 초점이 맞춰졌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스크린으로 만나는 전 세계 최신 화제작 시리즈 국립극장 NTOK Live+(엔톡 라이브 플러스) 'NT 로미오와 줄리엣' 포스터 컷./사진=국립극장

고드윈은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전염병으로 인한 봉쇄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원작에서 로렌스 수사가 부탁한 줄리엣에 관한 메시지가 로미오에게 닿지 못하는 것은 소식을 전달하기로 한 존 수사가 전염병으로 인해 격리상태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고드윈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재생산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이 이루어져왔지만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로 전염병으로 인해 극장이 봉쇄된 적은 없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영화 속에 ‘전염병’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으면서도 봉쇄의 분위기를 이용하는 방향을 택했다.

원수 집안에 태어난 자식들 간의 안타까운 사랑은 ‘접촉’과 ‘분리’에 관해 팬데믹의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 공감을 낳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영상은 ‘접촉’을 갈망하는 두 연인의 마음 뿐 아니라 유래 없는 격리와 분리, 접촉에 대한 공포를 앓고 있는 전 세계인의 고립된 답답함과 암울함을 담는 것을 겨냥했다.

영화에 일반적이지 않은 과도한 클로즈업 숏들, 방화벽과 철문이 그대로 드러난 백스테이지를 활용한 설정들, 소품들이 너저분한 가운데 배우들이 떨어져 앉아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리허설은 현대적 모던함을 갖춘 캐퓰릿 가의 침실, 응접실, 무도회장의 모습과 교차하며 극장이라는 현실과 영화라는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원작에서 로렌스 수사가 부탁한 줄리엣에 관한 메시지가 로미오에게 닿지 못하는 것은 메신저가 전염병으로 인해 격리상태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사이먼 고드윈 연출은 '전염병'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면서도 봉쇄의 분위기를 영상에 담아내는 방식으로 암울함과 답답함을 드러낸다./Photo by Rob Youngson.

서로의 손을 잡고 싶은 욕망과 서로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갈증, 일상이 무너진 채 현실 속에 있는 것인지 환상 속에 있는 것인지 구별이 어려워진 혼란, 폐쇄 속에 갇혀 버린 질식과 억압의 감정들, 고드윈이 연출로 의도한 모든 것들은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안타까운 상황’을 가져왔다.

‘폴저 셰익스피어 라이브러리’와의 인터뷰에서 고드윈은 영화를 연출한 적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TV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 자신이 NT 촬영감독인 팀 시델과 긴밀한 협업을 하게 된 것은 훌륭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한다.

시델 촬영감독은 리허설 기간 내내 배우들과 함께 전 과정을 공유했고, 영화적 속성에서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객석이 비어 있는 극장”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연극’을 영상화하는 방식에 집중했다.

고드윈은 평상복 차림의 배우들이 셔터가 내려져 있는 리틀턴 극장의 문을 열고 들어와 리허설 룸에 모이는 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장면을 시작한다. 의상이 걸려있는 옷걸이와 테이블, 소품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가운데 가방을 둘러맨 배우들이 들어와 정리를 시작함과 동시에 카메라가 줌아웃으로 멀어지면서 검은 방화벽이 아래위로 굳게 닫힌다.

잠시 후 리허설 룸의 3면을 원으로 둘러앉은 배우들의 모습이 보인다. 프롤로그 부분의 코러스 대사는 로렌스 수사 역을 맡은 배우에 의해 엄숙하게 전달된다. 아름다운 베로나의 두 가문의 해묵은 원한이 싸움의 불꽃을 다시 일으키고, 원수 집안에 태어난 “운명이 엇갈린 연인”의 비극적 죽음이 결국 오랜 증오를 끝맺게 된다는 대사가 전달되는 동안 로미오와 줄리엣 역의 배우, 조시 오코너와 제시 버클리가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어 다시 접촉과 만남, 사랑을 이어가고픈 열망과 소망은 '로미오와 줄리엣' 속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예언적 암시들과 함께 팬데믹의 세상을 그대로 반영하게 된다./Photo by Rob Youngson.

대본 리딩 과정처럼 시작된 장면은 배우들이 각자 일어나 자신의 의자를 치우고 공간을 넓힘과 동시에 티볼트와 벤볼리오의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배우들은 여전히 평상복 차림이며, 줄리엣의 사촌인 티볼트의 손에 쥐어진 칼은 나무막대기이다. 리허설은 과격해지고 로미오의 사촌인 벤볼리오를 자극하는 티볼트의 시도는 결국 벤볼리오의 손바닥에 칼로 베인 상처를 남김과 동시에 주변 배우들의 만류로 끝이 나게 된다.

베로나의 영주가 캐퓰릿과 몬테규 가문의 싸움으로 인해 거리에 소란이 끊이지 않음을 비난하고, 또 다시 싸움이 발생할 경우 목숨을 거둘 것을 선포한다.

흥미로운 점은 리허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긴장감 가득한 현악기 선율을 배경으로 짧고 빠르게 지나가는 ‘플래시 포워드’ 장면들이 삽입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요 장면들이 아주 빠르게 핏빛을 강조하며 삽입되는 방식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자주 등장하며 불길한 전조와 미래를 예측하는 역할을 한다.

머큐쇼가 맵 여왕이 지배하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나 줄리엣이 남편 로미오와의 첫날밤을 기대하며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 티볼트를 죽인 죄로 인해 베로나에서 추방된 로미오가 줄리엣과 이별을 하는 장면 등에서 두 연인의 ‘운명의 엇갈림’은 끊임없이 플래시 장면들로 삽입되며 불행한 미래를 예언한다.

관객들에게 ‘연극’임을 각인시키는 리허설 공간의 장면들은 캐퓰릿의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장’을 기점으로 영화가 제공하는 ‘환상’ 속 장면인 베로나로 들어가게 된다. 리틀턴 극장 무대의 경계를 가르는 방화벽의 좁은 틈으로 배우들이 미끄러져 들어감과 동시에 영상은 테크노 일렉트로닉 음악이 울려 퍼지는 클럽 공간을 펼쳐 보인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조쉬 오코너는 부드럽고 지적이며 멜랑꼴리함을 간직한 '로미오'를 완성한다. 사이먼 고드윈은 로미오의 우울이 주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암울함을 간직한 측면이 있으며, 자학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Photo by Rob Youngson.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15명의 배우로 축소하고, 사랑 장면과 싸움 장면을 제외하고는 배우들 간에 밀접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엄격하게 통제를 한 무도회 장면은 매우 환각적이고 광란적이다.

1980년대 말 영국을 휩쓸었던 레이브 문화(rave culture)를 떠올리도록 연출된 캐퓰릿 저택의 무도회는 십여 명의 무용수들을 별도로 배치해 촬영했지만 스크린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멀리 떨어진 상태로 촬영을 한 후 거리감을 조절했을 뿐이라고 한다.

고드윈은 로잘린과의 짝사랑에 빠져 한탄을 하던 로미오가 갑자기 줄리엣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의 맥락을 이해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하던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Siren)’과 같이 노래하는 줄리엣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오는 줄리엣의 기괴하고도 환상적인 목소리는 유혹이라기보다는 줄리엣의 내면에 갇혀 있던 억압과 갈등, 자유를 향한 갈망의 소리에 가깝다. 그녀의 목소리는 로미오의 시선을 사로잡고, 호기심에 이끌린 로미오는 줄리엣을 향해 다가간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손이 닿는 접촉과 키스는 앞으로 펼쳐지게 될 두 사람의 미래를 예고하는 빠른 플래시 장면들을 또 다시 불러온다.

고드윈이 사용하는 교차 편집과 몽타주 기법은 두 가지 목적을 겨냥하는데, 한 가지는 관객들이 없는 공간에 배우들이 상상력의 몰입을 통해 허구를 현실로 만들어가듯 관객들이 연극이라는 환상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속성 자체가 우리를 “두 개의 세상 속”에 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고드윈에 따르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마치 화려한 마스크를 쓰고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듯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경험이며 동시에 현실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국립극장 NTOK Live+2월 상영작 포스터 컷.  

고드윈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리허설 룸에서 두 배우가 보여주는 현실적인 시간과 이교도적이고 와일드한 꿈속의 파티와 같은 환상의 시간이 교차하는 것처럼 배치한다.

두 세계는 두 사람의 사랑이 티볼트의 도발과 머큐쇼의 죽음, 그로 인해 분노한 로미오의 티볼트 살해, 그리고 영원한 추방으로 이어지는 전개 속에 계속 교차되고 삽입되면서 혼란스러움의 경계를 더해간다. 패리스 백작과의 결혼이 예정된 줄리엣이 로렌스 수사에게서 받은 약을 마시는 침실 장면에 이르면, 영화 속 환상의 세계는 방화벽을 넘어 배우들이 둥글게 앉아 있는 현실의 세계로 이동한다.

48시간 동안 죽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약병을 손에 쥔 줄리엣은 자신에게 발생하게 될 일에 대한 혼란과 두려움으로 긴 독백을 이어나간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분주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침실로 돌아온 줄리엣은 잠시 유모를 불러 불안을 달랠 생각을 하지만 이내 혼자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는 점을 인지한다.

로렌스 신부가 자신을 속여 다음날 아침 깨어나게 될 가능성, 정말로 죽음에 이르러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게 될 가능성, 지하 납골당에서 죽은 유령들 사이에 홀로 깨어 공포로 미쳐버릴 가능성 등 온갖 두려움에 휩싸여 갈등하는 줄리엣은 로미오를 떠올리며 마침내 약을 마시고 쓰러진다.

고드윈은 줄리엣이 던지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유령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고민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던지게 되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질문들이 팬데믹으로 인해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리허설 공간을 비추는 영상은 연극 속 배우가 자신만의 줄리엣을 써내려가고 있는 순간을 다른 배우들 앞에서, 그리고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 앞에서 드러내 보이도록 만든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사이먼 고드윈 연출은 로미오의 친구인 머큐쇼와 로미오의 사촌 벤볼리오를 '동성애' 관계로 설정한다. 각색을 맡은 에밀리 번스는 '사랑'에 관한 드라마를 겨냥한 작품에 여러 사랑의 형태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보다 많은 점들을 부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Photo by Rob Youngson.

고드윈은 관객들이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를 극장에서처럼 인식하기를 바란다. 사랑을 그리워하고, 접촉을 갈망하며, 다시 서로가 함께 웃고 울며, 암전 속에서 무대를 통해 환상으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사랑’의 마음과 연결된다.

폐쇄공포증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답답하고 어두운 공간들, 차갑고 두꺼운 벽들,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레이디 캐퓰릿의 얼음과 같은 냉담한 표정들, 거친 공격성과 날카로운 폭력성으로 가득한 티볼트와 머큐쇼의 갈등은 현재의 세상이 품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표출한다.

무엇보다 고드윈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루어낸 가장 큰 성과는 레이디 캐퓰릿과 줄리엣의 ‘인물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드윈은 패리스 백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억압의 주체를 줄리엣의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레이디 캐퓰릿’으로 변경한다. 사랑과 접촉, 포용을 거부하며 딸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하는 강압적이고 매몰찬 레이디 캐퓰릿은 결국 사랑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며,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강렬한 줄리엣을 탄생시킨다.

30대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20대 청춘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십대의 순진함이 아닌 자유를 향한 열렬한 갈망과 욕망을 표출하게 된다. 로미오 역을 맡은 오코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젊음’이 오히려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Photo by Rob Youngson.
영국 국립극장(NT)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 장면. 30대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20대 청춘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십대의 순진함이 아닌 '자유를 향한 열렬한 갈망과 욕망'을 표출하게 된다. 사이먼 고드윈 연출은 사랑의 속성은 나이와 상관없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도록 만들며, 이상화된 자신과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길을 찾아 헤매도록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Photo by Rob Youngson.

그는 어리고 미숙한 사랑이 죽음까지 불사하는 맹목적인 방향으로 흐른다는 해석보다는 억압과 폭력의 세상에서 ‘사랑’을 발견한 두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영원한 사랑’의 실현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품고 있는 사랑과 분리, 혐오와 갈등, 분노와 욕망의 주제는 두 가문 사이에 원한을 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오랜 갈등과 서로를 향한 비난, 증오의 눈초리 속에서 자유와 접촉, 사랑과 포용을 갈망한 젊은 세대의 ‘죽음’이라는 교훈을 통해 비로소 ‘화해’에 이른다.

바바라 보가예브는 팬데믹 가운데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각색과 재창작이 많이 이루어지는 현상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고드윈은 고통과 분리, 고립과 격리의 시기가 “강렬한 감정과 밀접한 접촉, 연결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긴급하게 찾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서로를 향해 손을 뻗어 다시 접촉과 만남, 사랑을 이어가고픈 열망과 소망은 ‘로미오와 줄리엣’ 속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예언적 암시들과 함께 팬데믹의 세상을 그대로 반영하게 된다.

두 연인의 죽음 앞에서 “잠시 분노를 드러내는 일을 그만두고 이 모든 불행을 견딜 것”을 요청하는 영주의 마지막 대사가 울림을 낳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증오를 꾸짖는 영주가 말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보다 더 슬픈 이야기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접촉과 자유를 향한 갈망, 우리는 모두 서로를 향해 다시 날개를 펼칠 그 날을 고대하며 인내의 숨결을 고르고 있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주하영
주하영
jhy0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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