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늘의 상황에 되비춘 정재호 연출의 카프카 '변신'
[리뷰] 오늘의 상황에 되비춘 정재호 연출의 카프카 '변신'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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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이해하기 쉬운 작품 해석·깊이 있는 연출력·배우들의 살아있는 연기가 어우러진 웰메이드 연극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극단 이구아구가 공연 중인 '변신'(7월 28일까지 후암스테이지 1관)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연극화한 많은 공연 중에서도 극성이 뛰어났고 내용의 공감대가 넓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기까지 망설임의 시간은 길었다. 그동안 국내서 공연한 여러 극단의 '변신'과 지난해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성'을 보았지만 내용이 난해한데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변신'의 경우, 벌레 의상과 연기가 생경하고 어색했던 기억이 많아 이번 작품은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위의 볼만하다는 입소문에 티켓을 끊었다.

과연 정재호의 '변신'은 카프카 '변신'에 대한 이제까지의 선입견을 깔끔히 씻어 주었다. 우선 벌레로 변한 그레고오르를 변신시키지 않아 편했다. 맨발에 상의만 벗고 쉼 없이 꿈틀 연기를 하는데, 벌레 의상을 입힌 공연보다 맨 몸이 더 리얼하게 상상력을 자극했다.

연출은 소극장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철제 구조의 세트와 동그란 의자 세 개가 전부여서 바로 코앞에서 전개되는 모든 상황을 볼 수 있게 했다. 간혹 음향과 음악이 흐르고 암전이 있을 뿐 무대는 오로지 배우들의 공간이었다. 군더더기가 없는 진공 상태 같은 무대에서 관객들은 배우들의 눈빛, 동작과 목소리에 빨려들어 갈 수 밖에 없는, 연극적 아우라를 한껏 체험케 한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었다.

정재호의 연극 '변신' 출연 배우들/사진=극단 이구아구

체코 프라하의 카프카 박물관과 생가도 가보았지만 1916년에 발표된 '변신'은 기계 문명의 발달과 물질만능주의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암울한 서구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실존과 자아상실을 깊이 있게 천착했다.

20세기를 가장 순수하게 표현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이지만 벌써 1세기가 흘렀고 사회도 많이 변했다. 그런데 정재호 연출의 이 작품에서 그레고오르는 요즘의 20~30대 고민과 소외를 읽게 했다.

정규직 도전에 실패해 힘들게 알바를 하지만 해체되는 가족 속에서 희미해져가는 존재로 투영된 것이다. 정 연출은 “현대 문명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의성을 잃고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 모습을 형상화 하고 싶다”고 밝혔다.

각색(Steven Berkaff)과 번역(김철리)의 힘도 컸겠지만 배우들은 간결한 언어로 일상의 변화를 독백 형식으로, 마치 관객에게 보고하듯이 상황을 전개 시켜나갔다.

어느 날 악몽을 꾸고 난 그레고르오는 자신의 벌레가 된 것을 알고 놀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같이 세일즈를 하러 다녔고, 여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낼 꿈을 꿔왔는데 벌레가 되자 현실은 냉정했다. 지배인은 결근한 사원의 집에 찾아와 해고하겠다는 으름장을 놓다가 혼비백산 달아난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초반에는 먹을 것도 가져다 주고 걱정도 하지만 아버지가 은행경비 일자리를 얻고 방을 하나 비워 하숙인을 받으면서 그레고르오는 잊혀진 존재를 넘어 없어져야 할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버지가 벌레가 된 아들에게 사과를 던져 상처를 내는 장면, 가족들이 행복한 내일을 꿈꾸며 야유회를 가는데 홀로 방에서 죽음을 맞는 벌레를 보며 오늘의 현실을 느끼지 않은 관객은 없을 것 같았다. 뉴스에서는 인권을 보호한다면 갖가지 장치들을 쏟아내지만, 사회 한 편에선 소외되고 고독한 군상들이 넘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연출의 의도대로 카프카의 '변신'을 형상화한 배우들의 연기를 말해야 하는데 앙상블이 좋았고 개인 연기도 잘 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동안 무대에서 자주 보아왔던 배우들은 아닌데 5명의 배우 모두가 '변신'의 캐릭터에 맞았고, 무엇보다 연극성이 넘치는 화술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능력들이 뛰어났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리오 역을 맡은 이동건은 몸의 잔 근육의 움직임으로 벌레를 연상케 했고, 관객의 시선이 다른 배우들에게 멈췄을 때도 쉼 없이 구조물 사이를 기어 다니며 연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잠자 부인 역의 임은연은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의상으로 개성을 살리면서 굵직하고 애절한 화술로 어머니의 심경을 호소력 넘치게 연기했다. 아버지 역 손성호는 선 굵은 톤으로 에고에 권위적인 가부장 연기를 펼쳐냈다. 여동생 그레타 역 조지영도 애증의 연기를 펼쳐내 공연 내내 존재감이 돋보였다. 관록의 배우 이일섭은 지배인 역을 맡아 중후하면서도 냉정한 연기를 멋지게 해냈다.

정재호 연출의 '변신'을 보면서 연극다운 연극을 떠들썩한 대회나 축제가 아니라 소극장 한켠에서 발견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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