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면서 단결했던 경평축구대회
싸우면서 단결했던 경평축구대회
  • 황두진
  • 승인 2008.03.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민족이 열광한 축구축제 / 황두진



[인터뷰365 황두진] 3월26일 저녁 8시, 중국 상하이 홍코우 스타디움에선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전으로 우리나라와 북한의 경기가 펼쳐지게 된다. 국기 게양과 응원문제 등으로 경기장소가 평양에서 상하이로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양 팀 모두 물러 설 수 없는 한판을 벌이게 되었다. 남북 축구는 경기 때마다 큰 관심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시작의 역사는 남북분단 보다도 먼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경평(京平)축구대회’이다.


경평(京平)축구대회는 1929년 10월 8일 당시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평양에 있던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서울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경기를 가진 데서 유래돼 매년 한번씩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친선경기를 치루기 시작했다. 첫 대회의 공식명칭은 ‘전 경성군 대 전 평양군 축구 대항전’.


이 대회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두 도시간 대항전이란 점에서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단합과 반일정신을 키우는 데에도 큰 기여를 이룬 민족 단결의 행사였다. 그리고 3경기를 치룬 이 원년도의 승자는 평양팀이었다. 이듬해인 1930년 경성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대회의 승자는 경성팀.



하지만 2차대회를 치른 뒤 대규모 군중집회를 금지시킨 일제의 압력에 의해 31년, 32년의 대회는 취소되었다가 1933년 4월 6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제3회 경평축구대회가 열렸다. 그 뒤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제4회, 배제운동장에서 제5회 경기가 열리고, 1935년 4월 서울 경성운동장에서 제6회 대회가 열렸으나 이 대회에서 심판 판정시비가 지역감정으로 비화, 양측 응원단간 충돌하면서 일제의 의해 경평축구대회는 무기한 중단을 맛본다.


1946년 오늘, 최후의 경평축구대회가 펼쳐졌다


하지만 8.15해방이후 1946년 오늘(3월 25일) ‘자유신문사’ 주최로 10여년 만에 동대문운동장에서 제7회 대회가 재개되었으나 이것이 경평축구대회의 마지막이었다. 이후 38선으로 남북통행이 제한됨으로써 제7회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중단된다. 이때까지 총 7회간 대회 동안 20차례의 경기를 가졌는데 경성축구단은 5승8무7패, 평양축구단은 7승8무5패로 종합전적은 평양팀이 우세였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중단되었던 경평축구대회는 지난 1990년과 2002년에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친선경기를 펼친바 있지만, 아직 경평축구대회는 완전한 부활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황두진
황두진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