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7전8기 오뚜기 정신’ 야채도매상에서 장관상 수상까지...구대회 ‘블루텍’ 대표
[인터뷰] ‘7전8기 오뚜기 정신’ 야채도매상에서 장관상 수상까지...구대회 ‘블루텍’ 대표
  • 이승환 인터뷰어
  • 승인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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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로 첫 직장 문닫은 후 야채도매상, 인테리어 사업가, 잡지사 지점장 등 다양한 직업 거쳐
-숱한 실패와 좌절의 연속...다시 일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온 치열한 청춘시절
-10여년간 운수업에 종사해오며 국토교통부 장관 표창 수상까지 "긍정적인 마인드가 내겐 힘"
2018년 국토교통부 장관 표창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구대회 ‘블루텍’ 대표. 구 대표의 20대 시절은 숱한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언제나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인터뷰365 이승환 인터뷰어] 제대 후 전자제품을 설치하는 엔지니어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IMF가 왔다. 1년 간 월급을 안받으며 회사 살리기에 적극 나섰지만, 첫 직장은 문을 닫았다. 이후 야채 도매상을 시작으로 해수욕장 방갈로 운영, 인테리어 사업가로 좌절을 맛보기도 했고, 매체 광고 영업사원 거쳐 잡지사 지점장 자리까지 올랐지만 지점이 폐쇄되는 아픔도 겪었다. 사업가로 안착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구대회 ‘블루텍’ 대표(44)의 20대 시절은 숱한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로 남았지만, 가슴아팠던 순간들도 여러번이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방갈로 운영에 나섰을 때엔 그해 제일 강력한 태풍으로 '쫄딱' 망했고, 욕실 타일 공사 때는 한 평짜리 화장실에서 19시간을 보내며 쩔쩔맸다. "오죽하면 고객이 안쓰러웠는지 밥도 사줬다"고 껄껄 웃는다.

굴곡진 청춘의 시기는 그에게 큰 경험을 안겨줬고, 사람이란 귀중한 자산이 생겼다. 착실함과 성실함을 눈여겨 본 사람들은 그가 힘들 때마다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인복이 많다'고 말하지만, 현재 그가 운영 하는 사업체에 유난히 장기 근속자가 많은 이유도 '늘 처음처럼, 늘 함께, 늘 한결같이'란 사훈처럼 늘 초심을 잃지 않는 한결같은 겸손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 대표는 자동차 부품 판매 업체이자, 차로이탈경고장치로 화물조합 시범운영 장착 업체인 ‘블루텍’을 13년간 이끌고 있다. 구 대표는 10여년간 화물차 운전자들의 안전 운전과 교통사고 예방활동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제18회 화물자동차 운전자의 날'에서 2018년 국토교통부 장관 표창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화물차 운전자들의 환경 개선과 안전 운전을 위해 노력해온 그 간의 결실이다.

힘겨웠던 순간에도 긍정에너지로 자신의 사업을 일군 ‘긍정 CEO’ 구대회 대표를 만났다.

-국토교통부 장관상을 수상한 소감은.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큰 상을 받게 되어 얼떨떨 할 따름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다.

-운수업계에 뛰어는 배경은.

 2005년 미세먼지 및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정부가 시작한 화물차나 버스에 매연저감장치를 부착하고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해왔다. 대기오염 수치를 낮춘다는 것에 보람도 느꼈고, 자부심도 생기더라.

화물자동차 운전자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열악한 업무 환경을 보고 행복 지수를 높이고 실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운전자와 운수회사의 애로사항은 무엇이고, 정부의 방향성과 정책을 파악해 교두보 역할을 하자는 생각에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안전반사띠 보급이나 DTG무상점검, 차로이탈경고장치 시범운영이나 보급 활동 등 안전캠페인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상도 받게 된 것 같다.

2018년 국토교통부 장관 표창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구대회 ‘블루텍’ 대표.(맨 오른쪽에서 세 번째)/사진=구대회 제공

-일을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점은.

 최근 봉평터널 대형사고 처럼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사고 방지를 위해 정부가 시행한 ‘차로이탈경고장치’ 보급 시범사업에 회사가 참여해 장착, 사후관리를 담당했는데 차주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차로이탈경고장치는 운전자가 졸음운전으로 차로를 넘어가면 소리나 진동으로 졸음운전을 방지하는 장치인데, 실제 선진국이나 많은 나라에서도 많이 보급한다. 어느 기사분은 음료수를 가지고 회사에 직접 찾아와 감사하다고 한 일화도 있다. 차주분들의 안전운전에 기여를 했다는 생각을 하면 나 역시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기분이다.

또 정부 위임을 받아 디지털운행기록계 보급사업 뿐 아니라 고속도로에서 무상점검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디지털운행기록계는 속도, 공회전, 급출발, 급정지 등의 데이터를 기록하는 장치다. 우리 회사와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지난해 무상점검센터 시범 운영을 했고 만족도가 아주 좋았는데 너무 뿌듯했다. 좋은 반응으로 현재도 운영 중이다.

이런 활동들을 옆에서 지켜본 화물, 버스, 택시 운전사분들 뿐 아니라 운수업계 분들이 격려하고 응원해주신다. 이러한 사랑에 늘 보답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는가.

사실 2005년 블루텍이란 회사를 설립하기 전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21세에 해병대를 제대한 후 1996년 첫 직장은 전자제품을 취급하는 회사였다. 영업 사원 겸 설치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IMF타격으로 회사가 어려워졌다. 정이 많이 든 그 회사를 꼭 살리고 싶다는 심정에 자진해서 1년 간 월급도 안 받고 일했지만, 결국 문을 닫았다. 당시 함께 일했던 분들도 다들 뿔뿔히 흩어졌지만 지금도 연락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후 정화조 물탱크 청소도 해봤고, 아내와 함께 야채 도매 가게도 해봤다. 모험심이나 호기심도 많고, 학창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봐서 그런지 처음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편견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소위 '블루컬러' 직업으로 불리며 사회적 인식이 안 좋은게 현실인데.

그렇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되지 않나.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내 부모님이 될 수 있고 내 형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해져 내가 해야될 일일 수도 있고. 어떤 직업이던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받고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대우해주고 인정해주고 정부에서나 사회에서 보상도 해준다면, 점차 인식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야채 가게를 운영했던 시절은 어땠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다. 새벽시장을 달리면서 고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느끼는 그 감정은 아마도 모를꺼다. 그런 것에 행복지수가 올라가더라. 돈 보다, 무엇인가 준비하고 할 것이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상처도 많이 받았다. 대형마트에서 가격을 저렴하게 내놓으면 또 거기에 맞춰서 치열하게 경쟁해야하니까.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다양한 분야에 종사해왔는데. 거쳐간 직업들이 궁금하다.

야채가게가 힘들어졌을때 첫 회사에서 인연을 맺었던 지인의 제안으로 일산의 한 잡지사 광고 영업을 하게 됐다. 인쇄소가 있던 충무로에서 자고 영업도 하고 글도 쓰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광고 영업도 잘 되고 있던 찰나 MBC매거진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부천 MBC프로덕션에서 운영하는 라이프 매거진이라는 잡지사에서 지점장으로 오라는 제안이었다. 지점장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새로운 도전이라는 생각에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곧 지점이 문을 닫게 됐다. 생각해보면 내 의지로 회사를 그만 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잠시 쉬고 있을 때 여름 한철 장사로 해수욕장 방갈로 운영에 뛰어든 적이 있다. 없는 돈을 탈탈 털어서 해수욕장에 방갈로와 매점을 운영했는데, 서해 바다에 그해 가장 강력한 태풍이 온거다. 파라솔 뿐 아니라 웬만한건 다 날라가서 남아 있는 게 없었을 정도였다. 그해 유난히 비도 엄청 와서 결국엔 망했다.(웃음)

타일 리폼 업계도 뛰어들었는데, 화장실에서 타일공사를 하느라 나와 아내, 직원이 한평짜리 화장실에서 19시간까지 있었던 적도 있었다. 처음인데다 실력도 없었으니...화장실에서 죽다 살아났다. 오죽 했으면 고객이 안쓰러웠는지 밥도 사주시더라. 열의가 보였는지 그 때 그 분과도 친해져서 지금도 연락하고 있다.(웃음) 늘 내 곁에 함께 해준 아내에게도 고맙고, 내가 너무 고생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한다고 하니 난 행복한 남자구나 싶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치열한 청춘을 보낸 듯하다.

나는 첫 직장이 문을 닫은 후 정화조 물탱크 청소도 해봤다. 그런데 즐거웠다. 일을 한다는 것과 남들이 쉽게 알지 못하는 것을 경험 한다는 것이 좋았다. 이런 일도 해보고 저런 일도 해보고 그런 것이 다 경험이 되더라. 상처도 받아보고 비바람도 맞고. 그럴수록 내공도 강해지는 것 같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처럼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인복이 많은 것 같다. 힘들 때에도 곁에서 함께하고 응원해주신다. 난 사실 실력있는 경영자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는 장기근속자가 많다. 사훈이 ‘늘 처음처럼, 늘 함께, 늘 한결같이’인데,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직원분들이 늘 함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해 주신다. 감사할 따름이다.

-힘든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매번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군대가기 전까지 사고도 많이 치고 놀기도 좋아했는데, 제대 후 정신이 번쩍 들더라.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올해 연세가 86세 이신데 나를 41세에 낳으셨다. 그 당시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나를 낳아야 할지 고민도 하셨다는데, 그래서인지 나를 언제나 극진히 보살피셨다. 어머니께서 항상 새벽기도를 가셨는데,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에 대한 간절함을 봤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직도 한글을 완벽히 모르신다. 어머니의 할아버지께서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여자는 공부를 배우면 안된다고 하셔서 글을 안가르치셨다고 한다. 한글은 모르시더라도 지혜로우신 분이다. 항상 무엇을 배우려고 하시고 지금도 공부를 하신다. 그리고 늘 긍정적이시다. 언제나 웃고 계신다. 늘 주변에 관심을 갖고 도와주려하신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도 늘 긍정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인 내 아들에게도 힘든일이 있더라도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말한다.

-봉사 활동도 한다고 들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보게됐는데, 왠지 모른 기분으로 그 차를 무작정 쫓아갔더니 부천 장애고아학교 ‘혜림원’이라더라. 장애를 가진 아이라서 부모가 버린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무작정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우리 회사 직원들과 1대 1 멘토를 신청했고,월 기부금 자동 납부도 같이 신청 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지 10년이 됐다. 회사가 힘들 때도 직원들이 협조를 해줘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처음엔 무작정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들로부터 위로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내가 그들에게 치유를 받고 있다는 기분이랄까.

주변분들도 많이 도움을 주신다. 사업를 통해 알게 된 분도 돕고 싶다며 거금을 전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고, 1000만원을 후원하신 분도 계신다. 의류를 보내주신 분도 있다. 아들 역시 1대1로 책을 읽어주는 멘토 역할을 해오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사춘기도 무난히 잘 넘겼던 것 같다.(웃음)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지금 당장 돈이 없더라도 행복한 마음을 가지는게 중요한 것 같다.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같이 걸어가다가 비오는 길거리에서 나물파시는 어르신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산적이 있다. 돈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수중에 5만원이 있었는데 탈탈 털어서 산거다. 누군가는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하겠지만, 난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내 그 모습을 보고 놀라했던 아들 역시 닮더라. 초등학교 때 아들이 우산을 매번 안가져오길래 알고봤더니 우산 없이 리어카를 끄는 어르신들에게 드리고 오는거였다. 그런데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 “좋은일 해야한다, 어려운 사람 도와줘야 한다, 착한일 해야한다”고 가르치지 않나. 뭐라 할 수가 없더라. 내심 아들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전 지금 행복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보다 오늘 하루하루 행복하고,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다. 난 눈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은 편이긴 하지만, 지금 행복하다는 것에 중점을 두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현재 추진 중인 일이 있다면

우연한 기회에 한중 문화 교류사업에도 몸담고 있다. ‘한중문화예술포럼’이란 단체인데,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30개국의 NGO교류를 한다. 한국과 중국이 문화 산업 비즈니스를 할 때 안전한 교두보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출범했는데, 문화 보급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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