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80년대 상처와 분노를 화해로 이끈 치유 연극 '흑백다방'
[리뷰] 80년대 상처와 분노를 화해로 이끈 치유 연극 '흑백다방'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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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윤상현 이기욱의 불꽃 튀는 연기에 카타르시스 만끽
차현석 연출의 '흑백다방' 포스터/사진=극단 후암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70분간의 팽팽한 긴장과 스릴, 그리고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의 카타르시스. 두 배우의 열연으로 무대를 꽉 채우는 2인극의 매력. 평판으로만 듣던 차현석 연출의 '흑백다방'을 5일 대학로 76스튜디오에서 관람했다.

이날 다방 주인은 윤상현, 손님은 이기욱. 두 배우를 만나고 불꽃 튀는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뿌듯한 연극이었다. 수십 년간 많은 연극을 보고 리뷰를 했지만 이 작품을 유독 특기하고 싶은 이유는 희곡, 연출, 연기 등 연극의 에센스를 콤팩트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왜 흑백다방인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흑백 논리를 작가 차현석은 명료하게 대비시켰다. 이 작품의 호스트와 게스트는 공권력이 남용되던 80년대의 가해자와 피해자이다. 당시 형사였던 이 다방 주인은 비인간적 고문을 가했고 그로 인해 청각을 잃은 대학생은 한 많은 손님으로 그를 찾아온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둘 사이엔 시대의 아픈 기억과 분노가 일렁인다. 불신의 벽은 높기만 하다.

얼핏 복수극 같지만 이 작품은 치유에 방점을 두고 있다. 상처를 처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작가는 다방을 설정했다. 다방은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대화하는 곳이다. 불신과 광기로 가득 찬 이들에게 작가는 살풀이(祭儀)를 제안한다. 켜켜이 쌓인 서로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향을 피운다. 다방의 실내장식은 80년대를 상징한다. 최성수, 롤링스톤즈 같은 당시 유행 가수들의 LP자켓과 턴테이블이 놓여있다.

이 연극의 특징은 암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방 주인(윤상현)은 관객이 입장하기 전부터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다. 커피, 이 연극에선 노고지리의 노래 가사처럼 '소리 없이 정이 흐르는' 매개체다.

사진=극단 후암 SNS
차현석 연출의 '흑백다방' 공연장면/사진=극단 후암 공식 페이스북

또 하나의 매개체가 80년대 가요와 팝송이다. 그런데 분명 판을 얹은 턴테이블은 돌아가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전화가 걸려오는데 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같은 설정을 한 사각의 링 위에서 2명의 배우는 침과 눈물이 범벅이 된 연기 대결을 벌인다. 손님(이기욱)은 과거를 떠올리며 분노와 광기로 몸부림친다. 격렬한 신경전 끝에 마침내 회칼이 등장하고 서로가 자신을 찌르라고 울부짖으면 장내는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관객들은 전율할 수밖에 없다.

클라이맥스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상대의 입술을 보고 말을 읽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노고지리의 '찻잔'을 불러달라고 해 괴성을 지르며 따라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오디오가 들리는 장면은 이 연극의 압권이다.

서로의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순간에 피해자가 가해자 얼굴에 커피를 내뿜고 다시 가해자가 피해자 면상에 커피를 끼얹는 대목에선 물로 씻어내는 정화의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진=극단 후암 SNS
차현석 연출의 '흑백다방' 공연장면/사진=극단 후암 공식 페이스북

우리 사회엔 풀어야할 멍에들이 산적해 있다. 그런데 흑백논리에 갇혀 불신의 벽만 높아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 차현석이 시대의 아픔과 분노를 화해로 이끈 치유연극이라는 점에서 문제 제기나 갈등에 초점을 맞춰 온 기존의 작품과 다르다.

20년만에 만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가슴 속의 응어리를 폭발시켜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씩 신뢰를 회복해가는 제의 형식의 연출도 색달랐다. 특히 서로의 옷과 신발을 바꿔 착용하는 의상 코스프레를 통해 타인의 입장에 서보게 하는 장면이 가슴에 와 닿았다.

2014년 2인극 페스티벌에 참가해 작품상 연기상 극본상을 휩쓴 후 지난 5년간 일본, 영국 등 국내외 공연을 통해 호평 받은 작품을 이제야 본 것이 아쉽지만 배우들의 짜릿한 연기와 진실게임 따라잡는 극적인 재미, 그리고 가슴 후련한 카타를시스를 오랜만에 체험한 기대 그 이상의 작품을 만나 행복했다.

이 작품에는 그동안 내로라 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해왔는데 이번에 콤비를 이룬 윤상현 이기욱 배우의 캐미도 쫀쫀했다.

윤상현 배우는 피해자 연기를 해오다가 이번엔 가해자 역할을 맡았는데 작품의 흐름이나 상황을 꿰고 있어 안정감 속에 폭발력 있는 연기를 펼쳤다. 가해자 역의 이기욱은 극단 보다는 개인으로 활동해온 중견 배우로 청각장애로 말을 더듬고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는 개성 있는 역할을 빛깔 나게 해냈다.

배우에게 포커스를 집중하는 2인극의 매력도 컸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사람'이 보였고 '배우'가 보여 좋았다. /6월16일까지 대학로 76스튜디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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