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전설의 여배우, 고 최은희 여사를 떠올리며 (상)
한국영화사 전설의 여배우, 고 최은희 여사를 떠올리며 (상)
  • 김두호
  • 승인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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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김두호 기자]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전설의 여배우 최은희 여사가 투병생활 끝에 향년 92세로 타계했다. 

1926년생인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 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상록수'(1961년), '한국의 비극'(1961), '대심청전'(1962), '빨간 마후라'(1964) 등의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현대 한국영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거목의 여배우였다.

기자는 1985년 북한 탈출 후 미국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저널리스트의 단체인 관훈클럽 토론회의 패널리스트로 참가해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북한 체류기를 처음 공개적으로 고백 받는 등 영화기자로 활동하면서 깊은 인연이 있기에 고인의 별세 소식은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정정했던 고 최은희 여사를 기억하며 2007년 그와 나눴던 인터뷰를 소개한다.

고전적인 미색의 대표적인 여배우 최은희.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신이 내린 80여년 삶의 여정은 행복과 슬픔, 행운과 비운의 양극이 반복과 반전을 거듭한 대하장강(大河長江)의 드라마였다. 남과 북으로 갈라 선 현대 민족사의 기구한 비극까지 몸 안에 녹물처럼 녹아 있는 풍운의 여배우 최은희. 그럼에도 화장을 하고 다소곳이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난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디에도 그 무겁고 거대한 생애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수줍음이 있고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따뜻하고 지고지순한 아내이며 어머니의 모습이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라는 운명 속에서 영화와 삶을 함께 나누었던 남자, 납북과 탈출로 함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숙명적인 동반자 신상옥 감독도 이제 그녀의 곁에 없다. 그녀는 황혼 속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또 누굴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신감독이 별세한지 1년 반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최여사가 외로움과 허전함을 어떻게 달래고 사는지 궁금해 한다.

아직도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금방 현관문을 들어서며 “최여사”하고 부를 것같다. 어디론가 떠난다 해도 잊을만하면 내 옆으로 돌아왔던 사람이라 빈자리가 잠시라는 생각이 든다. 또 주위 사람들이 나를 외롭게 버려두지를 않았다. 슬퍼할 새도 없이 지내고 있다. 감독님 (최여사는 부군을 감독님으로 부르며 살았고 신감독도 생전에 부인을 최여사로 불렀다)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그 일에도 내가 할 몫이 많고 영화관련 행사나 각종 초청 모임에 나가는 일로도 분주하다. 한동안은 감독님과 나의 자서전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또 지난 10월말에는 과거 정을 나눈 사람들이 독촉을 해서 미국을 다녀왔다.

-기념사업은 기념관을 세우는 일이 먼저인데 어디에 마련되는가? 신감독 타계 후 사단법인체로 추진해온 ‘신상옥감독 기념사업회(회장 강신성일)’ 명칭은 최여사의 이름을 포함시켜 ‘신상옥 최은희 기념사업회’로 바꾸는 것이 뜻이 있다고 본다. 부부로서보다 영화인으로서의 활동과 업적에서도 두 사람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데 자기 이름의 기념사업을 한다는 게 괜찮은지 모르겠다. (외국은 사례가 많고 국내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생존 인물이 미리 자신의 기념도서관을 만들어 두고 있다는 설명에 그녀는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직 기념관을 세울 땅을 구하지 못했다. 감독님은 평생 영화를 만들면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영화만 알았지 돈을 모르고 산 사람이라 남긴 것이 없다. 많은 후배 영화인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언젠가 꿈을 이룰 것으로 본다. (신상옥감독 기념사업회는 최여사와 인터뷰 때 나온 인터뷰365의 제안을 받아들여 명칭을 그후 ‘신상옥 최은희 기념사업회’로 개칭했다)

-자서전은 언제부터 어떻게 준비한 것인가?

감독님이 살았을 때 써 둔 유고를 정리해 <나는 영화였다>는 제목의 신감독 자서전, 그리고 별도로 <최은희의 고백>이라는 나의 책을 따로 만들어 11월 27일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돈을 벌면 기념사업회를 돕겠다.

-최여사의 생애를 표현할 때 흔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라는 말을 한다. 자신은 스스로의 생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파란만장하다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지만 굳이 물어오니 그게 나의 인생이었다는 대답이 나온다. 감독님과 나의 인연도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일,,,그것도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길이 숙명이라면 그렇게 꼼짝 못하고 겪어야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 이야기 중에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는 헛소문도 있다.

-사실 최여사가 겪은 사건 중에 사람들이 서로 아는 척하며 화제로 삼는 것들이 많다. 6.25 때 고생한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다. 국군 위문 길에 인민군에게 붙잡혀 평양부근까지 끌려 다니다가 국군의 도움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인민군들에게 여자로서 치명적인 고통을 당했다는 대목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인민군은 사상이 다르고 적대행위를 하면 무차별 살상했지만 사사로운 욕심에서 부녀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내 이종사촌 동생도 경찰가족인데 살고 있는 마을 뒷동산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했다. 그 무렵 내가 여자로서 당한 피해와 가해자는 오히려 우리 쪽에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물이다. 인민군들이 집단으로 내 몸에 수모를 가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1943년 극단 아랑을 통해 연기를 시작한 뒤 50년대부터 영화배우로 영화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북한에 가서도 연기활동을 계속해 신감독과 함께 대표적인 영화인으로 업적을 세웠다. 연기자로서의 생애에 스스로는 어느 정도 만족하는가?

남과 북에서 연기활동을 한 배우라는 생각에 이르면 나 자신도 묘한 기분을 느낀다. 어느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는 데 자부심을 갖는다. 이쪽에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열녀문> <동심초> <빨간마후라> <벙어리 삼룡이> 등 주로 신필름 작품에 출연해 편수가 130여 편으로 많지 않다. 그러나 젊고 인기가 많을 때도 겹치기 출연을 않고 이미지에 맞는 역을 선택했다. 후시녹음시대에도 내 목소리를 직접 살려 다작이 어려웠다. 아직도 하고 싶은 역이 있다. <보은의 구름다리>를 통해 비구니 역은 해봤는데 수녀 역을 못해봤다.

▶이어서 한국영화사의 '거목', 고 최은희 여사를 떠올리며 (하)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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