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고아 불행 딛고 한국사회복지사협회장 된 조성철
전쟁고아 불행 딛고 한국사회복지사협회장 된 조성철
  • 김두호
  • 승인 2011.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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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회복지사가 행복한 사회 만든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행복한 사회복지사가 행복한 사회 만든다”

사회복지사가 선망의 전문직으로 주목 받고 있다. 선진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매우 소중한 역할을 하는 직업이다. 우리나라는 자격증을 가진 사회복지사가 47만 명, 그 중 청소년, 노인, 장애인, 여성 등을 위한 공공시설이나 사업체에서 활동하는 일선 사회복지사가 8만여 명에 이른다.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7%에 이르면 고령화 사회(Ageing Society)라 일컫는다. 우리는 이미 2000년에 고령층 인구가 11%를 넘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갈수록 사회복지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늘면서 사회복지사 직업에 대한 사회적 비중과 관심도 그만큼 높아졌다.

47만여 명의 회원을 둔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총수가 조성철 회장(59)이다. 지난 2008년 제17대 회장에 이어 올 3월 재선에 성공, 지난 2011년 3월 22일 백범기념관에서 제18대 회장 취임식을 가진 조 회장은 사회복지사로서 특별한 생애를 간직하고 있다. 전쟁피해자로서 갓 난 시절부터 사회복지시설에서 성장했으나 현재는 자신에게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한 사회복지사들의 수장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은, 마치 전쟁수혜국이었던 우리나라가 UN사무총장까지 배출하는 국제사회의 리더이자 원조국이 된 것과 코드가 닮아 있다. 그는 전후 격동의 한국사를 혈혈단신으로 관통해 온 산증인인 셈이다.

선언했듯, 조성철 회장의 인생은 전쟁의 상흔과 함께 시작된다. 부모를 잃은 절망과 사회적 시선에 대한 설움, 그것은 그의 어깨를 움츠리게도 했지만 매번 이를 악물게 하는 감성의 성장통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 회장과의 인터뷰는 참담한 6.25 한국전쟁 통에 태어난 전쟁피해자의 비극적인 성장사를 생생히 증언해준 시간이었다. 조 회장은 지난 일을 돌이켜 가다가 몇 차례 말문이 막혔다.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시선이 촉촉해지며 어느새 하늘을 향한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는 회원 수가 많은 대표적 사회단체로 꼽힌다. 사회복지사는 다른 직종과 달리 봉사의 연장선에서 일하는 직업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직업의 정체성이나 특성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자격증이 필요한 전문 직종이다. 일의 성격상 대다수 소외계층이나 빈곤층, 노약자 등 요보호 국민을 위한 시설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봉사정신이 필요하다거나, 또 그것 위주로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그 봉사정신이라는 것은, 의사, 변호사, 교사 등 모든 전문인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사회복지시설이나 법인은 병원이나 학교처럼 사회복지사가 근무하는 곳일 뿐이다. 누구나 복지 욕구가 있고, 누구나 사회복지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듯, 배움을 위해 학교에 가듯, 복지 욕구가 있는 사람이 사회복지시설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 배우고자 하는 사람, 복지 욕구가 있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체다. 특히 사회복지사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예방’에서 찾는다. 이처럼 사회복지사는 자신의 전문성을 발현하여 정당한 보수를 받고 일하는 전문직업인이다. 아무래도 사회복지사들이 과거에 먹고사는 문제를 중점으로 해결하다 보니 사회적 인식이 요보호자에 대한 복지접근으로 굳어진 탓이 큰 것 같은데, 시대에 따라 사회복지사의 인식과 역할도 변해서, 현재 국민 전체를 위한 심리·정서적 지원 역할이 커지고 있다.

최근 정부가 2014년까지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을 7천명 늘릴 계획을 발표했다. 사회복지사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은 2만3천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 중 사회복지직, 즉 전담공무원은 1만496명(2010년 12월 추산)으로, 7천명을 늘린다 해도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공직창구에서 비리사건이 수시로 발생하는 원인도 전문성과 책임감을 가진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의 시작은 사회복지 전문 인력부터 확보하는 데에 있다. 모 지역 동장에게선 이런 얘기도 들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나이 많은 동네불량배가 가냘픈 젊은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순한 양이 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그 여성이 바로 사회복지사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소통의 힘도 사회복지사들이 이루어 가고 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회원이 47만여 명이라는데 놀랐다. 실제 활동 회원은 얼마나 되는가?

8만여 명이 넘는다. 자격증 소지자가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수한 인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점으로 대두하기도 한다. 현재 14개 법정 교과목의 이수를 통해 2급 사회복지사를 배출 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의 수가 1600여개에 달한다. 능력과 뜻을 가진 전문 인력의 배출을 위해서는 문제가 있다.

사회복지사가 가져야할 뜻이라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존중과 정의 실현, 도덕체계를 갖추고 그것을 실현하는 직업정신이다. 우리 협회 직원들이 월요일 아침마다 한데 모여 ‘사회복지사 선서’를 진행하며 한 주를 시작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사회복지사 선서’ 내용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존엄성과 사회정의의 신념을 바탕으로, 개인·가족·집단·조직·지역사회·전체사회와 함께 한다. 나는 언제나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저들의 인권과 권익을 지키며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거부하고 개인이익보다 공공이익을 앞세운다. 나는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을 준수함으로써 도덕성과 책임성을 갖춘 사회복지사로 헌신한다.’

최근 DMZ생태띠잇기조직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등 생태 및 동물복지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생태복지운동도 사회복지사의 영역인가?

녹색성장이나 생태복지 등은 모두 인간사회를 위한 복지운동이라 할 수 있다. 나무 한그루를 심고 가꾸는 일에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청정하게 관리하는 것까지가 모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삶의 질 향상의 일환이요, 인간복지인 셈이다. 이런 취지는 내가 17대 회장으로 재임할 때인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산림청 녹색사업단을 찾아가 우리 사회복지사가 함께 해야 할 녹색복지사업을 의논하고 또 녹색자금운용심의위원으로 참여해 녹색자금이 녹색복지 공간 조성 등 사회복지 연계 사업에 투입돼야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는 녹색사업단과의 MOU(양해각서)로 이어졌고, ‘녹색복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녹색복지’는 아직 국제사회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체계의 사업계획이다. 또한 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복지철학인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 구조와도 맞물린다. 산업성장에서 얻은 힘을 녹색성장, 즉 사회복지로 돌리는 시대인 만큼, 사회복지사들의 임무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녹색복지 사업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말하는가?

앞서 설명했듯, 사회복지사를 봉사자로 보는 사회적 시각이 있듯,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사회복지시설은 전 국민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이다. 국민 여러분의 발길을 사회복지시설로 돌리고 공유한다면 오해 섞인 시각들도 조금씩 씻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녹색복지 사업에서의 담장허물기와 공원화다. 꿈은 현실이 됐다. 담장을 허물고 나무와 꽃을 심자 지역 주민들의 발길이 증가했고,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인식도 휴식 공원으로 변화해 갔다. 서울을 포함해 전국 여러 지역에서 사업성공 사례가 속속 들려온다. 사회복지시설이 지역사회의 허브로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경남대와 대구대, 경상대 등에서 교육학,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거쳐 행정학으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전공학력이 다채롭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활동하게 된 남다른 동기가 있는가?

어린 시절, 전쟁피해자로서 마산에 있는 사회복지시설(인애원)에서 자랐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줄도 모른 채 전장에서 돌아가신 분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갓 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없는 비운의 여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현재까지 하고 있다. 내가 자란 곳에서 나를 양육하신 분은, 지금으로 따지면 사회복지사셨다. 나는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이르러 세무 관련 일을 찾았고, 그곳에서 행정을 배웠다. 개인 사업을 하며 남부럽지 않을 만큼 큰돈도 만져봤는데, 돈은 참 신기한 물건이더라.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나를 양육하신 어머님(고 조수옥)의 부름을 받았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나는 단숨에 이룩한 것들을 훌훌 털고 다시 인애원으로 돌아왔다. 말단 사회복지사부터 다시 시작했으니,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한 셈이다.

큰 단체를 이끌어 가는 분으로서 놀라운 고백이다.

아직도 모르는 분이 많다. 많은 분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현재의 나는 아내와 아들 둘에 입양한 딸 하나를 키우는 매우 다복한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그늘이 없는 내 모습에서 그런 과거가 있는 줄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모를 찾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을 것 같다.

일생의 꿈이다. 지금은 DNA조사로 가족 규명의 폭이 넓어져 한층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6.25 전상자 중에서 혈육이 있는지 국군 유해 발굴 소식이 있을 때마다 저절로 눈길이 간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 때는 방송국 연출팀이 나를 프로그램의 기획 모델로 삼았지만 가족을 찾는데 실패했다. 내 성(姓) 역시 부모에 대한 인적 자료가 전혀 없어서 원장 어머니(2002년에 타계한 인애원 창립자 조수옥 여사)의 성을 따른 것이다. 태어난 지 일주일 쯤 된 아기로 7명이 함께 위탁된 것이 내 기록의 전부다. 사실 인적사항이 남아있지 않으니, 아버지가 군인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시대적 사정상 그럴 확률이 가장 많지 않은가. 출생일도 1952년 1월1일로 대충 정해져서 내 생일을 두고 사람들은 꼭 얘깃거리를 만들었다. 그게 싫어서 새 호적을 만들 때 5월 20일로 바꾸었다. 그날이 내가 학교에서 상을 받은 날이다.

인애원 시절에 겪은 일화를 들려줄 수 있는가?

마산 인구가 6만여 명일 때 시내에 고아원이 14개가 있었고 초등학교에만 한 학교에 40~50명의 고아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내가 인애원에 왔을 때는 이미 숨이 넘어간 줄 알고 버리려던 참에 숨소리를 느껴 키웠다고 한다. 많은 질병에 노출되었으나 마침 진전아줌마란 분이 나타나 자신의 젖으로 목숨을 살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인애원에는 그때 200여 명의 원생이 살았다. 9명씩 자는 방 하나에 맏형 격의 실장이 가장처럼 통솔했다. 규율이 엄해 집을 나가는 아이가 있으면 단체로 매를 맞고 벌을 받기도 했다. 대체로 제대로 먹지 못해서 집을 나갔다. 나도 어릴 때 쌀밥을 실컷 먹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동료 한명과 서울로 가기 위해 도망을 쳤다. 마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서울역인줄 알고 내린 곳이 대구역이었다. 보름동안 대구 역전을 떠돌다가 다시 서울행 기차로 알고 타고 내린 곳이 이번에는 거꾸로 탄 부산행이었고 부산역이었다. 그곳에서 3개월간 나쁜 짓을 하는 불량배를 따라다니며 허기를 채웠다. 그러다가…….

(조 회장은 여기에서 지난 일을 돌이키다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한참동안 울먹이며 말을 끊었다. 끝내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두 볼을 적셨다)

쌀밥 먹으려고 나쁜 형들을 따라다녔지만 우리를 키우셨던 어머니를 통해 배운 정신은 반듯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기독교 교리였다. 우연히 인애원에서 함께 살던 선배 형을 부산거리에서 만났다. 그 형이 “어머니가 너를 기다리며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빨리 인애원으로 돌아가라”고 전해주었다.

몇 살 때인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으니 열 살 때쯤이다. 마산으로 갔지만 낮에는 무서워 집밖에서 서성대다가 새벽 5시 예배시간에 들어갔다. 그때 원장 어머니의 설교 말씀이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른다.(조 회장은 다시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어떤 말씀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을 고아라고 조롱하고 비웃어도 성경은 너희를 고아라 하지 않는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은 모두를 똑같이 귀하게 대하고 사랑을 주신다, 너희는 주 안에서 왕자님이고 공주님이시다, 라는 말씀이셨다. 인생은 짧은 것이므로 다가올 영생의 미래를 생각하며 굳건하게 살아야한다는 그 말씀이 내겐 아직까지도 귓가에 생생하다.

원장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신앙심이 깊은 어른이었고 수많은 고아를 뒷바라지하시는 일로 자신은 가정을 갖지 않은 분이었다. 그 분 그늘에서 자란 인애원 출신 고아 가족이 2천명도 넘는다.

6.25전쟁과 함께 겪어야 했던 1950년대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기록을 고스란히 체험한 분이 조 회장으로 생각된다.

중학생 시절에도 인애원을 뛰쳐나왔던 적이 있다. 음식이라고는 강냉이 죽뿐이어서, 들판의 벼이삭에서 쌀 한 알씩을 까먹으며 허기를 채우던 때였다. 그렇게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면 책임자인 형들에게 호되게 혼날 각오를 해야 하는데 여기(머리뒷부분) 흉터들이 그때 생긴 것들이다. 벼이삭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쌀알을 까먹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나라를 좀먹는 놈’이라는 꾸중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내 마음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어두운 성장기였지만 간혹 꿈과 빛을 느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고맙게 생각되거나 좋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크리스마스 때는 언제나 행복했다. 어머니는 모두에게 하나씩 선물을 마련해주셨다. 고구마나 과자 봉지였지만 오로지 나를 위해 주신 선물을 받을 때의 기분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원생끼리 가족애를 나누도록 배려해 해마다 리어카에 보리쌀이며 반찬을 싣고 바닷가로 여름 캠프를 떠날 때가 즐거웠다. 수영을 하며 조개를 까먹고 불침번을 서며 수박밭 서리를 하던 추억도 있다. 피가 통하지 않지만 친형제보다 더 의지하며 살던 형들을 통해 생존하는 방법을 배우고 원장 어머니의 신앙정신을 통해 겸손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정신을 배웠으니 모두 좋은 기억들이다.

인애원을 떠난 것은 언제인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립을 위해 보육원을 나서게 됐다. 1970년부터 목장의 목부도 하고 가정교사도 하며 내가 갈 길을 찾아 나섰다. 안정이 된 것은 군대 복무 후 농약방 경리로 시작해 기관 세무경리 분야 업무를 볼 때부터다 그때부터 나는 제법 큰돈을 벌수 있었다. 어느 해 설날이 되어 당시는 고급 과일인 바나나를 사들고 보육원으로 어머니를 찾아갔더니 내가 번 돈으로 사온 바나나를 갔다버리라고 호통을 치셨다. 세무관계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성경에도 가장 경계해야할 직업이 세금 거두는 직업인데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못마땅해 하셨다.

그로부터 사회복지사의 직업을 택한 것인가?

내가 마음으로 의지할 분도, 나에게 명령을 내리실 분도 그 분 한 분 뿐이었다. 어느 날 그 어른이 나를 불러 명령하신 게 인애원에서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살림을 맡아 보던 총무를 미국 이민(당시 보육원에서 일한 총무 형님은 어느시기 되면 어머니께서 미국에 보내주셨다) 보내고 나를 부르셨다. 1981년부터 고향집 같은 인애원에 들어가면서 사회복지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애원에서 보육사를 시작으로 국장과 관장 등을 거쳐 대표이사까지 맡게 됐다. 이어서 경남사회복지사협회장으로도 활동하게 됐다.

인애원 출신이 2천여 명이 넘는다면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원장 어머니가 미국에 유학 보낸 인애원 자녀가 57명이나 된다. 밥은 굶어도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재주 있는 아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길을 마련해주셨다. 미국 필라델피아주 보건 관련 업무의 최고위직에 오른 이도 인애원 출신이다. 우리 인애원 형제들은 헤어진 뒤에도 인우회라는 모임을 통해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지낸다.

가족 얘기와 결혼 얘기를 듣고 싶다.

1982년 33살 때 결혼했다. 아내는 당시 업무관계로 알게 된 마산시청의 아동복지 담당 공무원이었다. 아들이 둘인데, 29살 큰 아이는 일본에서 사회사업학을 전공해 박사 과정 중에 있고, 26살 차남은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9년 전 입양한 12살짜리 딸은, 후원자로 돌보다가 3살 때 데려온 딸인데 나의 성장기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조 회장 자신의 드라마 같은 남다른 삶을 요약할 수 있는 한마디는 무엇인가. 미래에 대한 계획도 듣고 싶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참 좋은 말이다. 자신의 진로는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개척하고 일구어 나아가야 한다. 내가 누구에게 의지하고 살았다면 몸은 성장을 해도 자립의지와 마음은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불행이나 불운도 열심히 살면 극복이 된다.

사회복지는 미래지향적이고 예방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사업이다. 문제가 발생한 뒤에 내놓는 대책은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인 만큼, 점점 늘어나는 자살문제, 고령화문제 등도 예방적 복지에 주안점을 두고 범사회적으로 풀어 나아가야 한다.

현재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회복지전문가그룹인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으로서, 또한 올 3월30일 제정한 「사회복지사 등의 처우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사회복지사법’)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한국사회복지공제회 설립위원장으로서, 사회복지사를 위한 활동에 매진할 생각이다. 내 유년시절의 경험이 그랬듯, ‘행복한 사회복지사가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추진하고 있는 사회복지사의 처우와 지위 향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국민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사회복지사법은 지난 2008년 내가 제17대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으로 선출될 때 내걸었던 공약의 집약체다. 3년 간의 노력 끝에 법률을 제정했듯, 재선에 성공해 연임하고 있는 18대 회장 임기는 공제회 시드머니 마련과 ‘사회복지사법’ 안착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각계각층의 지지와 지원이 절실하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모일 때, 사회는 밝아지고 국민복지시대가 열릴 것이다.”

[인터뷰이 나우] 60년 전 전쟁 고아로 성장해 국가로부터 극빈층의 혜택을 받았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사업가로 살고 있는 조성철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이 <행복한 사회복지사가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라는 칼럼집을 펴냈다.


절반의 인생을 불행하게 살았지만 나머지 절반의 인생은 성공한 자신의 행복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조성철 회장의 인간냄새와 체험기록, 복지사가 전문직으로 감당해야할 사회적 책무, 그리고 필자의 인생 철학 이야기들이 꾸밈없고 차분한 필치로 이어지고 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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