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과 생년월일 같은 꽃미남 원조 노주현
빌 클린턴과 생년월일 같은 꽃미남 원조 노주현
  • 김두호
  • 승인 201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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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이 내 연기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연기인 가운데 준수하게 잘 생긴 남자를 꼽게 될 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연기인 노주현의 이름을 빼놓지 않는다. 연기 이력 40년을 넘어선 초로의 신사 노주현은 TBC TV(현재의 KBS 2TV) 공채 탤런트가 되어 1970년 드라마 <아내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주역 연기자로 얼굴을 드러냈던 꽃미남의 원조 연기인이다.


노주현은 그로부터 TV드라마와 영화에서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남자 주인공의 표본적인 인물로 사랑을 받고 인기를 누려왔다. 언제부터인가 ‘꽃 중년’이란 말이 그의 이름 앞에 등장하기도 했다. 외모도 출중하지만 세련된 화법과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연기파 탤런트로 캐릭터가 선명해 주로 삼각관계를 다룬 러브스토리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멜로드라마의 주역이 많았다.


정석 TV드라마나 영화 작품의 연기를 '마이웨이'로 고집해오며 좀처럼 변하지 않았던 그 남자, 노주현은 SBS TV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2002)의 출연을 분기점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받아들였다. 최근 ‘무릎팍도사’ 강호동 앞에까지 나타나 신상고백을 하는 등 예능프로로 일컫는 TV오락 프로그램에도 빈번하게 출연해 ‘노주현’답지 않은 일탈의 끼를 보여주고 있다.


삶의 후반에 이르러 다양한 장르의 연예프로그램에 대한 묘미를 느끼고 즐기며 살고 있는 그는 한동안 백제예술대 교수로 재직했다가 금년부터 수도권에 있는 한세대로 옮겨 연기실기를 강의하면서 한편은 평생 연기를 할 수 있는 자신의 무대를 생각하고 경기도 안성에 소극장까지 마련했다.

“장가 세 번 간다”는 작명가의 말에 본명 노운영을 예명 노주현으로 바꾼 덕분인지 스캔들 없이 단란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오며 TV드라마와 영화 100여 편에 출연하는 동안 연기 인생 반세기 장정(長程)을 공백 없이 보낸 그의 삶을 진솔한 고백으로 정리했다.



경기도 안성에 살면서 자택과 인접한 곳에 마련한 소극장을 TV 예능프로에서 공개한 적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공연장인가?

평생 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며 마련했다. 언젠가 나의 모노드라마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아직 공연 첫 작품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우선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윤당아트홀과 협력관계를 맺고 작품이 정해지면 먼저 서울에서 공연, 관객 반응을 보고 안성으로 옮겨 가는 방법을 추진 중이다.


삶의 연고지로 안성을 선택한 특별한 동기가 있는가? 왜 하필 안성인가?

서울을 벗어나 살고 싶은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다. 농촌이 좋아서 원래 대학 진학 때 첫 지망학과가 농대였다. 과거 몇 가지 내가 한 사업 중에는 제주도 열대작물농장 경영도 있다. 서울과 가까운 지역 중에 안성은 내가 좋아하는 농촌 환경과 자연 경관을 두루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또 안성은 아주 어린 시절 피난을 갔던 곳으로 고향 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연극 등 공연문화도 미래가 있는 곳이다. 수원도심과 동탄 지역, 용인, 평택에서 천안시까지 30여분 거리로 가깝다. 문화 수요층이 주변에 수백만 명에 이른다.


연극영화과(한양대)를 다녔는데 본래는 농대 지망생이었다니 엉뚱하다.

1차 응시 대학의 지망학과는 농대 축산학과였다. 요즘 구제역으로 동물들이 엄청나게 희생되는 걸 보고 잠시 내가 축산과를 다녔다면 그 고통을 지켜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동물을 좋아해 오래전부터 집에서도 여러 마리 셰퍼드와 살고 있다.


그럼 연극영화과 지망은 우연의 선택이었나?

우리 세대가 대학갈 때는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이 몇 개 되지도 않았고 그 학과를 선택하는 학생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은 기대밖에 있었다. 원서를 써주시던 담임선생께서 “너 이제 막가는구나”하고 실망하던 시대였다. 인기학과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 이후지 우리 땐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고루했다. 그럼에도 지망을 한 것은 서울대미대에 다니던 누님(동양화가 노숙자)의 친구들이 “넌 영화배우가 되는 게 좋다”고 바람을 넣어 그게 용기가 되고 구실이 됐다. 우리 형님(전 엘지전자 부회장 노용악)도 내가 그 학과를 선택했을 때 졸업하고 대학에 남아 학자가 되는 것을 바라셨다.



초중고교 때는 모범생이었나?

초등학교는 지금 을지로 명동입구에 있던 청계 초등학교를 다녔다. 배재중 졸업 때는 연합고사 성적이 좋아 더 명문고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학교의 권유로 한 재단의 배재고에 진학했다. 배재는 미션스쿨이어서 입시 중심의 교육보다 인성교육을 중요시 했다. 고교시절 공부가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데 공부에 대한 집념이 다소 부족했던 것 같아 간혹 후회도 한다. 그러나 배재고 시절 훌륭한 선배들과 선생님들을 통해 인격 형성에 영향을 받은 점이 많다. 비굴하게 살지 않고 반듯한 인생관을 갖도록 정신적 소양을 키워준 곳이 배재였다.


대학시절을 돌이켜보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1학년 시절은 별 생각 없이 보냈으나 2학년부터는 학교생활에 불만이 쌓였다. 돌파구를 찾다가 1968년 TBC 탤런트 공채에 응시해 5기생으로 뽑혔다. 지금 남은 동기생은 김창숙 씨 한 명뿐이다. 그때 21명이 선발되었고 방송사에서 다시 전속으로 우대를 한다며 필기시험을 치게 했다. 내가 만점에 가까운 수석 점수를 받아 시험 감독을 한 프로듀서가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노운영(노주현의 본명) 밖에 없다”는 말을 했는데 덕분에 조금씩 드라마에 내 역할이 주어졌다.


그때 출제한 시험 내용을 기억하는가?

‘한국 TV 장르에 대해 논하라’라는 것이 논문 출제 제목이었고 다른 한 과목은 방송활동과 관련된 지식과 다방면에 걸친 일반 상식문제였다.


그럼 1970년에 출연한 드라마 <아내의 모습>은 공채 합격 뒤 2년만의 작품인가?

주연 연기자로 시작한 첫 작품이므로 그런 셈이다. 드라마가 산뜻하게 전개되는 격조 있는 드라마였다. 작고하신 이낙훈 선배가 유학생 딸을 둔 홀아비 역, 내가 홀아비 댁의 하숙생으로 등장해 귀국한 주인집 딸과 나를 좋아하는 다른 여성(윤여정)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다른 여성을 택하지만 그래도 홀아비 어른을 아버지처럼 받드는 내용의 순정 멜로물이었다. 사미자 씨도 이웃집 과부로 출연했다.


안성에 피난 갔다던 어린 시절은 몇 살 때 얘기인가?

아마도 1.4 후퇴로 혼란스러울 때 가족과 서울에서 걸어서 안성으로 내려갔던 것 같다. 5살 무렵인데 머물던 마을에 키다리 미루나무가 있었고 동네사람들이 그 나무 주변에 모여 음식을 함께 먹거나 잔치도 벌였던 생각이 난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마을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일이 있다. 무대에 오르자 너무 떨려서 눈앞이 캄캄해 지고 노랫말이 자꾸 끊어져 도중에 내려왔는데 그 당황했던 순간의 느낌이 아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엄마 나 못 하겠어”하고 창백한 얼굴로 울상이 되어 무대를 내려왔다고 간혹 놀려주기도 하셨지만 끝까지 당당하게 노래를 못 부른 것은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있어서 수치심처럼 느껴졌었다. 하하하.


서울에서 피난 갔다면 출생지와 고향이 서울인가?

아버지는 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분이다. 3남매의 막내인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첫머리에 ‘나는 1946년 8월 19일생이다’고 밝혔는데 내 생년월일과 똑같다.


누님인 노숙자 화백은 한국화단의 중진이고 형님 노용악 전 엘지전자 부회장은 기업인으로 성공하셨는데 성장기의 가정환경이 좋았던 것 같다.

아버님은 별세하셨지만 혼란기에 정치도 하시고 사업도 하셨다. 올해 96세로 교회 권사이신 어머니는 내가 자랄 때 종로에서 보석점을 하셔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어머님이 교회 권사시면 가족이 크리스천인가?

외가 쪽이 크리스천이고 친가는 유교 집안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교회 갈 때가 있지만 나이롱신자인데 앞으로 교회를 열심히 다니려고 한다.




1971년 대표적인 히트 TV드라마가 <아씨>였다. 여자 주연 김희준을 슈퍼스타로 떠올린 화제작인데 그 작품에 출연하면서 당시 드라마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겠다.

의붓 아버지를 섬기는 효자 아들로 공연했다. 덕분에 아주 좋은 이미지의 인물로 여성팬들이 많이 생겼다. 그후 <마부>에서 농아 장애인 딸을 사랑하는 총각, <청춘극장>에서 백영민 역으로 활동하는 등 새 드라마가 준비될 때마다 내가 들어갈 자리가 만들어 졌다.


1972년에 출연한 <형제> 드라마도 화제를 많이 남긴 작품이었다.

타계하신 이낙훈 선배와 그 작품에 출연한 것을 끝으로 그해 영장을 받고 여름의 끝자락에 군에 입대했다. 그로인해 2부 드라마부터 내가 빠졌다. 제대 후가 내 연기인생의 2막으로 볼 수 있다. 청년기는 군대생활을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과정을 거쳐 연기자로 복귀한 것이다.


어디서 근무하며 어떤 일을 겪었는가?

육군 5군단사령부 정훈참모부 소속으로 보안사에 파견근무도 하고 국방부 본부중대로 소속을 옮기기도 했다. 사병은 이동이 안 되지만 연기자 출신이라 특혜가 주어져 국군홍보 영화에 출연도 했다. 교육용 영화 3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지금까지 출연한 TV드라마와 영화가 몇 편쯤 되는가?

대충 드라마만 80여 편, 영화가 20여 편쯤 될 것 같다. 다작은 안하고 1년에 한두 편씩 꾸준히 활동하는 길을 택해 시간에 좇기거나 연기생활에 무리를 느낀 적이 없다. 찾는 사람이 많다고 일에 휘둘려 사는 것은 내 정서가 아니다. 영화도 1970년 <아무도 모르게>를 비롯해 <욕망> <내 마음의 풍차> <들개> <열일곱 살의 쿠데타> <미워도 다시 한 번 완결편> <김 관장 대 김 관장> 등 쉬지 않고 활동해왔다.


출연 작품 중에서 애정이 남아 있는 작품은?

역시 꿈이 많았던 시절인 데뷔 초기 작품들이 좋았다. 제대 후 <미망인>에서 미망인을 사랑하는 노총각 역도 내 캐릭터에 맞는 역할이었다. 또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에서 올바른 길을 가는 남자역도 내게 인기를 많이 얹어준 드라마였고, 홍승연 작가의 <사랑의 굴레>도 매력 있는 남자의 얼굴로 나를 부각시켜 준 작품들이다.


TV드라마사의 화제작 가운데 앞머리에 오르는 나연숙 작가의 <야 곰례야>에서도 활약이 컸지 않았는가?

강부자 선배가 어머니였고 정윤희 씨가 아내였다. 장애인 아내가 가출해 새 아내로 맞이해 커플이 됐다.


연예인 중 소문난 미녀였던 정윤희 씨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달라.

정말 예쁜 여자였다. 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연기자로만 느끼려고 노력했다. 하하하. 나는 예쁜 사람에게 간지럽게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성격이라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공연했다.


<제3공화국>에서는 장도영 장군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자주 화제가 됐다.

아주 리얼하게 재현했다고 해서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과 대립해 체포되는 과정을 보여 줄 때는 실제 인물의 입장을 생각해 묘한 감정에 사로 잡혔다.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는 목소리에서 몸짓이나 버릇, 성격이나 감정표현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아주 섬세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상적인 연기자가 되어 별 탈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것은 행운이다.

5공 초기 방송사가 통폐합 되어 TBC가 사라지면서 전속활동이 무너졌을 때 생활에 불안감을 느껴 사업을 생각했다. 이것저것 꾸준히 했다. 그게 나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언젠가 피자점포를 차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프랜차이즈 사업도 했고 옥외광고대행회사도 운영했다. 광고회사는 엄청난 로비와 비즈니스가 필요해 술자리와 골프장을 열심히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내가 농대 지망생이었지만 농작물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해 제주도에 열대작물농장을 운영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앞으로 내가 할 사업은 내 본업인 연기를 평생하는 무대를 운영하는 것인데 그래서 요즘 머릿속에는 안성에 있는 공연장 프로그램 생각뿐이다.


지금 백제예술대 교수로도 강의를 하고 있지 않는가?

5년 동안 다녔다. 얼마 전에 사표를 내고 한세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로 옮겨 새해부터 실기(연기)를 가르친다. 내가 강의를 하게 될 학과에 다른 해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지원해 흐뭇했다.


이제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통해 주로 점잖았던 기존의 배역 이미지와 상반된 개그풍의 소방관 배역을 기꺼이 보여준 이야기를 시작하자. 자신의 연기노선을 한참 벗어난 일종의 반란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 드라마를 준비하던 연출자도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출연 제의를 했다는데...

하하하. 나는 나한테 이런 배역을 주다니 하고 반갑게 받아들였다. 연기자에게 고정 이미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점도 있고 손해 보는 일도 많다. 연기자는 배역을 두고 벽이 없어야한다. 웃길 수 있는 연기라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 작품으로 나의 변신이 시작됐다. 예능프로에서 넉살을 피우고 강호동 씨와 맞상대를 떠도 이젠 아주 편하고 배짱이 생겼다. 좀 푼수가 되거나 망가진 모습을 보여도 보는 사람이 웃기만 하면 나 자신도 즐겁다.


좋아하는 여성 팬들도 많았을 텐데 스캔들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소문을 감춘 덕분인가, 자기 관리가 철저한 덕분인가?

연기자는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쉽게 만나게 되는 직업인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호감을 느낀다는 사람에게 내가 정색을 하고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경직된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물러선다. 남자들도 그렇다. 내 얼굴의 표정에 여유가 없고 빈틈이 안 보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에 힘을 주고 살지 않지만 너무 무겁게 보이거나 좀 도도하게 보이는 것도 같다.



이따금 키우는 셰퍼드와 TV프로에 등장하는 걸 본다. 지금 집에서 키우는 개는 몇 마리인가?

10마리까지 키우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섯 마리만 키운다. 철이 들면서 애완견을 좋아해 곁에 두고 살았다. 셰퍼드는 프로들이 사육하는 개인데 짐승도 늙고 노쇠하면 사람처럼 귀도 눈도 멀어져 안타깝게 보인다. 죽으면 산에 묻어주지만 숨을 거둘 때는 그것들도 슬픔을 주고 떠난다.


개를 워낙 좋아한다고 소문난 탓인지 인터넷에 한 때 개와 관련된 괴소문이 나돌았다. 자녀들이 개로 인해 불행한 일을 당했다거나 아주 위험에 처해 있다는 따위의 소문이다.

누가 만들어 낸 헛소문이다. 우리 아들은 미국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곧 MBA 과정을 시작한다. 딸은 결혼해서 3살짜리 귀여운 아들을 두고 있다.


부인 얘기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분인가?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조용하게 가정생활을 하는 전업주부다. 나도 그렇지만 당사자도 노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동네사람이나 알고 있을 정도로 그동안 밖에는 결혼사진 밖에 내놓은 게 없다. 8살 연하, 이름은 최선경이다.


한국재활재단 등 불행한 사람을 위한 활동으로 틈틈이 화제에 오를 때가 있더라.

굳이 그런 것은 밝히고 싶지 않다. 자랑 중에 남을 위한다는 소리는 자기밖에 좋은 일을 안하는 양 남의 눈에 거슬린다.


몇 해 전에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출연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다.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오른 것이 뜻밖으로 보였다.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다. 매우 색다른 시도였고 경험이었다. 연습기간만 40일이었다. 러시아에서 추방당하는 선량한 유태인의 가족애를 다룬 얘기인데 우리의 정서와 비슷한 주인공 테비에가 마음에 들었다. 재공연 했으면 좋겠다. 대학에서 학생들과 무대에 올려 볼 계획도 하고 있다.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것은 모험이지만 아주 신선한 삶의 의미를 던져준다. 느직이 변화의 맛을 알게 된 것 같다.


수많은 출연 작품 중에서 사극드라마가 없었던 것 같다.

사극을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출연 기회가 없었던 것을 나 자신도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아직도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극다운 사극을 만나고 싶다.


자신과 호흡이 잘 맞는 연기자를 꼽는다면 선뜻 누구를 생각하는가?

여자는 윤여정 씨, 남자는 이순재 선배 같다. 연기하는데 참 편한 분들이다.


인생관을 알고 싶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않고 비굴하게 살지 말자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스스로 못 견딜 만큼 후유증이 따른다. 때로는 손도 비비면서 좀 더 겸손했으면 하는 때도 있었다. 젊을 때는 연출자나 작가들에게 고분고분하지 못해 눈 밖에 나기도 했다.


노운영이라는 본명도 괜찮은 느낌인데 왜 노주현으로 이름을 바꾼 건가?

신인 연기자 시절 영화에 출연하면서 제작영화사 사장이 탤런트로 알려진 이름을 버리고 영화배우로 참신한 새 예명을 갖도록 요청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에게 작명가의 판단으로 결정하자는 제안을 해와 소문난 김모 작명가에게 갔다. 그는 본명을 보고 장가 세 번 갈 이름이라며 새 이름 몇 개를 지어주어 그중에 택한 이름이 예명이 됐다.



요즘 자신이 어느 정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연기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나이가 들어 후배를 키우는 교육자로 직업을 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하며 산다. 나는 참으로 럭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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