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응원 신곡 부른 염수연
한국과 일본 응원 신곡 부른 염수연
  • 석광인
  • 승인 201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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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통합 노래한 ‘한마음 아리랑’ 직접 가사 쓰고 노래

【인터뷰365 석광인】트로트 가수 염수연(45)이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과 일본 양국 국민들을 응원하는 두 개의 신곡을 동시에 취입해 관심을 끌고 있다.
염수연이 두 곡 모두 직접 가사를 쓴 ‘한마음 아리랑’(김호남 작곡)과 ‘간바레’(조만호 작곡)가 바로 화제의 곡들. 염수연은 우리말과 일본어로 각각 노래한 이 두 곡의 취입을 이미 끝낸 후 발표할 날짜를 저울질하고 있다.
염수연이 꽹과리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했다는 ‘한마음 아리랑’은 신민요 스타일의 곡. 우리 국악기들을 많이 사용한 웅장한 사운드에 흥이 넘치는 곡으로 국민 대통합을 이루자는 내용을 담았다.

“에헤 잘살아보세/아리랑 쓰리랑 잘살아보세/우리는 한민족 코리아/아리쓰리 아라리요/한도 많던 아리랑고개/칠천만이 소원하는 아리랑 잔치/통일 노래 얼쑤/한류열풍 불어오네/아시아에 꽃이 핀다/손을 잡고 찾아가세/천하절경 금수강산/에헤 좋구나 좋아/아리랑 쓰리랑 잘살아보세/우리는 한민족 코리아/반가워라 반가워라/칠천만의 우리 동포/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한류열풍 불어오네/아시아의 꽃이로다/힘을 모아 잘살아보세/우리는 한민족 코리아….”

어깨가 절로 들썩여지는 흥겨운 리듬에 염수연의 구수하면서도 원숙한 창법이 매력적이다. 국민 대통합을 넘어 북녘의 동포들까지 아우르는 통 큰 가사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염수연은 지난 10여 년 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을 펼쳐 일본에서도 상당히 지명도가 높은 가수로 꼽힌다. 그녀는 지난 2011년 3월 일어난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 국민들의 사기가 많이 꺾인 상태라고 설명했다. 수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난데 이어 경제난까지 겹쳐 일본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대체로 가라앉아 있다는 것.
그는 이렇게 자신감을 잃은 일본 팬들을 노래로 응원해보자는 생각으로 ‘간바레’의 가사를 쓰게 되었다. ‘간바레’는 “힘내라!”라는 뜻의 일본어. 운동 경기에서 항상 응원구호로 쓰이는 말이다.

무기력증 빠진 일본 위해 가사도 쓴 응원가 ‘간바레’


그는 국내 발표곡 ‘시치미’(조만호 작사 작곡)가 일본 팬들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보이자 원 작곡가의 허락을 받아 이 멜로디에 일본어 가사를 붙이기에 이르렀다. 원래 자신의 생각을 일본 작사가에게 설명하며 가사를 써달라고 부탁했지만 몇 달이 가도 이 작사가로부터 소식이 없어 자신이 직접 가사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힘내자! 힘내라! 힘을 냅시다/힘들고 눈물 났던 모든 일들은 가슴에 넣고/마음과 힘을 모아/당신과 나는 친구지요/행복한 거리가 만들어지길 신께 빌어봅니다/행복의 이 빛이 모두에게 전해지길 빕니다/친구야 모두 모여라 이 거리로/다시 한 번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보자…”
염수연의 상큼한 창법이 돋보이는 경쾌한 리듬의 곡으로 경기장에서 응원가로 사용해도 그럴싸하게 어울릴 만큼 힘을 샘솟게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맥이 빠진 일본 팬들을 보면서 제가 그 분들에겐 외국인이지만 일본이 잘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응원구호로 쓰이는 말 ‘간바레’를 노래로 만들게 되었어요”라고 말했다.

서울 태생으로 총신대학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염수연은 국내보다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대학 1학년이던 지난 1987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고봉산 선생(1990년 별세)이 작곡한 ‘김현희 모노가다리’를 일본어로 취입하며 데뷔했다. 김현희의 이야기란 뜻의 이 곡은 1987년 11월 29일 일어난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으로 희생된 115명의 고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곡으로 만들어졌다.

“고봉산 선생님은 같은 과 친구의 소개를 거쳐 알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일본말로 취입하자는 말씀에 놀랐지요. 일본말을 전혀 못하는 상황이어서 한글로 일본어 가사를 적어놓고 억지로 외워 부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지도해주신 고 선생님이 나 저나 모두 애를 많이 먹었어요.”
고봉산 선생은 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난 직후 일본 거류민단의 요청을 받아 이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곡을 만들어 일본어를 잘하는 여가수를 찾다가 쉽지 않자 우연히 알게된 염수연의 노래실력에 반해 발탁한 것이다. 염수연은 이 노래를 취입하기 무섭게 고봉산 선생에게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가 난생 처음으로 공연무대에 오르게 된다.
“도쿄돔에서 추모공연이 열렸는데 일본 전역에서 민단 소속 재일교포 여러분들과 심지어는 일본 팬들까지 몰려 오셨어요. 김세레나 선배님 등과 함께 오른 무대였는데 무대라곤 서본 적도 없는 생짜배기 신인이 우리말도 아닌 일본 말로 수만 명 관중 앞에서 노래했으니 정말 ‘쎄게’(?) 데뷔한 셈이지요.”


가수 염수연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수만 명이 모인 체육관 도쿄돔에서 겁 없이 일본어로 노래한 가수도 아닌 이 여대생은 이듬해인 1988년 국내에서 또 다시 ‘쎄게’ 가수로 데뷔해 가요계를 놀라게 만든다. 신인이 TV 드라마 주제가를 부르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중록’을 쓴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일대기를 그린 KBS 2TV 드라마 <하늘아 하늘아>의 주제가 ‘하늘아 하늘아’(박성훈 작사 임택수 작곡)를 취입한 것이다.
“원래 나훈아 선배님이 취입할 곡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주제가였는데 제가 불렀으니 정말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드라마 방영이 시작된 한참 후 제가 주제가를 불러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진 덕택인지 그 드라마에 출연한 김성환씨는 저를 볼 적마다 ‘하늘아 하늘아’라고 부르시곤 했어요.”
하희라가 혜경궁 홍씨로, 정보석이 사도세자로 나온 이 드라마가 한참 방영되는 도중에 MBC TV가 거의 비슷한 내용의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한중록’을 편성해 방영하는 바람에 두 드라마의 경쟁이 뜨거워졌고 도중에 염수연이 주제가를 부르며 인기가 더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그는 ‘하늘아 하늘아’를 발표할 당시 함께 취입한 ‘사랑의 자리’와 ‘사랑은 무죄’까지 히트시키며 가요계의 신데렐라가 되었다.

“음악과 결혼했어요”


염수연이 일본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2001년 봄. 히카리엔터테인먼트사 소속 가수로 킹레코드사에서 데뷔곡 ‘다키기노 조엥’(불타는 사랑이란 뜻)을 발표했다. 도쿄돔에서 ‘김현희 모노가다리’를 노래한 이후 줄곧 일본 가요계에서 활동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대학을 마친 후에 생각해보자며 뒤로 미루다가 늦어졌다.
“원래 9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일본에서 활동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계속 늦어졌어요. 무엇보다 전국의 야간업소에서 출연료를 미리 받아둔 게 가장 큰 이유였어
지요. 큰돈을 가져다주니 좋다고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빚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거기에다 일본에서 활동하려면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부담이었죠. 하여간 일본 소속사와 계약키로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무려 2년 동안 야간업소 출연일정을 끝냈으니까요.“

그는 일본 가요계에 데뷔한 지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더 어릴 때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일본어를 익혀야 하는 것은 물론 가수들의 활동 방식이 국내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신인가수가 데뷔를 하면 방송 위주의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곡을 알리지만 일본에서는 전국을 돌며 방송 출연과 라이브 활동을 병행해야 한다.
라이브 활동이란 한 가수가 실내 또는 야외 무대에서 ‘원 스테이지’라는 이름의 무대에 올라 45분 내지 60분 동안 관객들에게 자신의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일을 말한다. 이 원 스테이지에서 관객들을 감동시켜 내 팬으로 만들어야만 가수로 계속 활동하며 생존할 수 있게 된다.
“저는 이 원 스테이지에서 국내에서 부른 곡들은 물론 민요와 일본 노래 그리고 일본에서 발표한 신곡을 노래하곤 했어요. 사회자도 없이 오직 저 혼자 무대에 올라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제 소개를 하고 큰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어요. 한국 무용도 배우고 제가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보여야 했어요. 그 무대에서 그들이 제 노래와 저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방송 출연도 할 수 있고, 가수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염수연은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일본어가 너무 어려웠고 음식도 맞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에 친구가 없어 너무 외로웠다.
“당장 귀국하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중도하차할 수가 없었어요. 이를 악물고 하다 보니 점차 제 노래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잠시 귀국해 신곡 ‘사랑아 내 사랑아’를 발표한 외에는 2010년까지 앨범 4장을 발표하며 계속 일본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2011년부터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한일 양국에서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젠 제법 여유가 생겨 일본 무대에 올라도 한국 무대에서처럼 편안하게 노래할 정도가 되었다.
“일본에서 활동을 펼치며 8년 동안 국제교도소 위문공연을 다녔는데 정말 보람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인들은 물론 아프리카 사람들과 중국인 우리 한국인이 죄수들로 수용된 곳인데 그 분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면 무척 좋아했어요. 특히 한국 분들에겐 무리말로 ‘다음에는 한국에서 뵙시다’고 인사하면, ‘네 감사합니다’라고 큰소리로 대답하곤 합니다. 가수로 활동하다 보니 어려운 분들도 많이 만나고 높낮이 없이 모든 곳에 갈 수 있고 활동의 폭이 넓어서 참 좋습니다.”

아직 미혼인 염수연은 앞으로도 결혼할 계획은 전혀 없다고 한다. 너무 바빠 남자를 만날 시간도 없었지만 요즘에는 음악이 너무 좋아 미치겠다며 음악과 결혼한 여자가 되기로 했다. 수영으로 건강관리를 하며 최근에는 전자 오르간 연주를 익히고 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을 오가며 활동을 펼치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시야가 넓어진 것은 물론 애국자가 된 것 같기도 하다는 그는 앞으로 큰 무대 작은 무대 가리지 않고 어디라도 달려가 노래할 생각이라고 한다.
왜 트로트 가수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염수연은 학생시절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지만 대본 외우기가 너무 어려워 포기했다고 한다.
염수연은 어려서부터 트로트를 좋아해 이미자와 나훈아의 노래들을 불러 엄마한테 야단을 맞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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