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하수영, 그가 떠난지 25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하수영, 그가 떠난지 25년
  • 김두호
  • 승인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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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의 별들의 고향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지난 1월 1일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른 하수영이 떠난지 25주년 되는 날이었다. 지금 젊은 음악팬들은 가수 하수영을 모른다. 그러나 중년이 지난 어른들의 애창곡 속에는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으로 시작되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들어 있다. 하수영은 그 한곡을 부르기 위해 이 세상을 다녀 갔다. 아내의 손을 잡아본 적도 없이 35살 나이에 외롭게 떠났다. 늘씬한 체격에 얼굴도 잘생긴 미남자였다.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요절 가수라면 차중락도 있고 배호도 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로 시작되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포함해 많은 히트곡을 낸 차중락은 자신의 노랫말을 안고 어린 나이에 낙엽처럼 떠났다. 생전에 그의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다녔던 소녀팬들은 그가 잠든지 몇 년 후까지 무덤을 꽃송이로 덮어주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동숙의 노래’ ‘안녕’ ‘추풍령’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추억의 백마강’ ‘비 내리는 경부선’ ‘울기는 왜울어’ ‘비내리는 명동’ ‘누가 울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배호도 1971년 찬바람이 불던 초겨울 겨우 서른 살의 나이로 갔다. 36년이 지났으니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50줄이 넘어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는 배호의 팬클럽 홈페이지들이 여러 개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국민가수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이라는 배호의 열성 팬클럽도 건재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 요절 가수 중에 하수영의 마지막 떠나는 모습을 취재한 기록만을 찾아냈다. 1982년 차가운 칼바람이 불던 겨울이었다.



하수영은 34살을 막 넘긴 그해 정월 초하룻날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해 있던 부산 백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부산은 그의 고향이었다. 눈을 감기 며칠 전부터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서 입술을 움직이는 듯이 보였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산소호홉기를 입에 문채 영원한 침묵에 빠졌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의 두고 간 가족은 그가 생전에 버릇처럼 뇌던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어머니뿐’이라는 칠순 홀어머니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고 그와의 이별이 서러워 넋을 잃고 흐느낀 주변 사람 중에는 미스 김이라는 젊고 예쁜 여인이 있었다. 창백할 만큼 흰 피부에 청초하고 가냘픈 그녀는 하수영이 입원한날부터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간병에 매달려 정성을 쏟았다.



깨끗하고 청순한 눈동자로 고통에서 신음하는 하수영의 눈물을 대신 담아내던 미스김은 하수영과 어떤 관계였을까? 그녀는 하수영이 영안실로 떠나면서 소리 없이 병실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주변 친지들도 그녀와 하수영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당사자들도 남긴 말이 없었다. 연인이 아니었다면 인정 많은 팬이었을 것이다. 하수영에게는 나이를 불문하고 좋아하는 여성팬들이 많았다. 사망 후 빈소에 문상 온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하수영을 좋아하는 순수한 음악 팬들이었다.



어느 중년여성은 평생 속을 썩이며 살아온 남편이 하수영의 노래만 나오면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빈다면서 그의 노래 한곡이 인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도 했다.



하수영은 가수가 된 뒤 10곡 정도의 노래를 불렀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찬비’ ‘청산별곡’ ‘길’ ‘여수’ 등. 그러나 단 한 곡, 1976년에 발표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로만 이름을 날렸다. 그 노래는 그해 가요무대를 진동시키며 최고의 디스크 판매 기록을 세웠다.



노래 한 곡으로 살롱가의 무명가수에서 인기가수로 떴지만 후속곡이 받쳐주지 못해 그로부터 빛을 잃고 가요계 주변을 빙빙 돌며 방황을 거듭했다. 어쩌면 가수가 되기 이전부터 그의 삶은 어느 한 곳에 정착을 못한 채로 물위에 뜬 풀잎처럼 정처가 없었다.



179cm, 89kg의 건장한 체구에 얼굴도 서글서글한 미남이다. 한 세상 멋있게 살 수 있는 남자였지만 그는 짧은 생애를 결혼식 올리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았다. 임종 무렵에 만났던 그의 단짝 죽마고우는 운이 지독하게 없는 불운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갔다고 말했다.




하수영은 어릴 때 집안이 좋았다. 아버지는 청백리로 꼽히는 법무부의 고위 관리였으나 하수영이 경남중학 2학년 때 별세했다. 남긴 것은 마지막 월급봉투와 퇴직금, 바깥 물정을 모르시는 어머니와 3남 3녀 대가족이었다. 하수영은 6남매 중 끝에서 둘째다. 부산공업고를 택한 것도 일찍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집안 형편에서 였다. 부산공고 전기과를 다니면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노래였다. 주로 교회와 청소년적십자단의 자선 공연에서 그는 클래식 명곡을 부르며 소년 성악가로 촉망을 받았다. 대중가수로 꿈을 돌린 것은 부산극장에서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에 참가하면서 였다. 그 무대에서 루찌의 ‘아베마리아’와 한창 유행하던 ‘라노비아’를 불렀고, 열광하는 박수 소리에 파묻혀 가수로 출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것이 오히려 방황의 시작이었다. 밥 세 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고물 기타만 들러메고 하루종일 걸리는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서울에서 갈 곳이라고는 고교 동창인 대학 2년생 친구의 자취방 뿐이었다. 빈털터리로 친구의 좁은 자취방에 오래 얹혀 살 수 없었던 그는 서울 성북동 산비탈에 있는 움막같은 무허가 빈집에도 살았다. 찬바람이 살을 벨 듯이 불어 닥치는 1965년 겨울을 그 집 냉방에서 의리를 지키려고 찾아온 친구와 부둥켜 안고 체온을 녹여가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낮이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술집을 찾아 나섰고 밤이면 두세끼 밥값을 벌기 위해 새벽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런 어느 날 자신의 전재산이라고 할 악기를 잃고 왼종일 울며 실의에 잠긴 일도 겪는다. 큰 덩치를 뒤척이며 잠을 자다가 머리맡에 세워둔 기타가 넘어져 배 밑에 깔려 그만 박살이 난 탓이다.


지금은 대형 가수가 된 나훈아 조용필 태진아 송대관 현철 등 대다수가 가수 지망생 시절, 그런 소설 같이 눈물에 젖은 비화가 따른다. 그 시대는 그렇게 가난하고 서럽게 살았다.



하수영의 슬픈 이야기는 계속된다. 먹을 것이 없어서 10원짜리 호떡 한 개를 먹고 나머지 빈 배는 물로 채웠다. 그는 별나게도 허기를 느낄 때 물 한바가지를 단숨에 들이켜 공복감을 해소하는데 익숙해 있었다.



3개월 쯤을 그렇게 보내다가 동대문 스케이트장 부근에 있는 원로 작곡가 계수남 음악학원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찾아가서 통사정을 해 사무실 잡일을 해주고 노래를 배울 수 있게 된 것. 빗자루와 걸레질도 하고 서무일도 하고 틈나면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가수가 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길옥윤을 찾아 나섰다. 1967년의 일. 그런데 그에게 곡은 주지 않고 악기를 운반하는 짐꾼부터 시켰다. 불만없이 몸으로 때우는 일을 시작한지 1년 만에 몽매에도 그리던 노래 한곡을 취입했다.



제목은 ‘사랑은 홍역’. 죽을 힘을 다해 노래에 정성을 쏟았지만 빛을 못보고 사라진 노래였다. 다만 이때부터 취입곡이 있는 가수로 인정을 받아 지망생이라는 딱지는 뗐다. 결국 ‘아내..’로 히트 가수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것은 그로부터 8년 뒤였다.


봄비처럼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노래, 가난한 세월을 묵묵히 살아 준 아내에게 어느날 한번쯤 시선을 돌리게 해 준 노래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 본 순간 /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행복 /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 땀방울로 씻어 온 나날들 /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노랫말이 들을수록 느낌을 주고 리듬도 편하고 부드럽게 넘어 가는 이 노래는 지금도 노부부들의 기념일에는 빠지지 않는 18번이다.



다시 하수영의 인생으로 돌아 가보자. 그는 ‘노젖는 뱃사공’을 평생 부르며 길고 꽉 찬 행복을 누리고 떠난 원로가수 김정구처럼 한곡의 히트만으로 잘 살 수도 있었으나 그렇지를 못했다. 큰 재산을 만져 보지도 못한채로 다시 밤무대를 떠돌며 살았다. 1977년에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9개월 동안 병상에서 시련을 겪었다.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노모가 살고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하늘로 갈 때도 노모 곁에서 살았다. 한때 친구와 가구점을 차렸다가 실패해 쇼크로 쓰러지는 고생도 했다. 한번도 마음 편하게 돈을 휘둘러 써본 적이 없으니 재운도 지독하게 없었다.



“나는 죽으면 生花(생화)로 덮인 花棺(화관)에 들어간 채로 재가 되어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고 그 말을 전해들은 가족들이 유언대로 육신을 꽃과 함께 화장해 하늘로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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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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