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새해는 늘 [엄마 생각]으로 시작된다.
딸의 새해는 늘 [엄마 생각]으로 시작된다.
  • 김세원
  • 승인 200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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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의 살롱 큐리어스


[인터뷰365 김세원] “어쩌면 이렇게 엄마를 하나도 닮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나서면 늘 듣는 말이었다. 젊었을 때 별명이 게리 쿠퍼였던 아버지와 같이 다니면 한눈에 부녀 지간임을 알아보는데 엄마와는 도통 남들 눈에 모녀 지간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병원에서 애가 바뀐 게 틀림없다. 이 아이는 니 애가 아니라 미군하고 붙어먹은 양공주 아이야” 생전에 이모할머니는 어린 나를 ‘아이노코(혼혈아란 뜻의 일본말)’ 라 부르며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서슴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손이 오동통하고 새끼 손가락이 유난히 짧은 것 외에는 나는 어는 것 하나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굴이 둥글고 후덕해 전형적인 부잣집 맏며느리 인상인 반면 턱이 뾰족하고 얼굴이 긴 나는 이모할머니 말대로 서양튀기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식성도 대조적이어서 어머니는 콩 중에서 강낭콩만 좋아하고 젖비린내가 난다며 유제품을 싫어하는데 비해 나는 콩 중에서 강낭콩만 싫어하고 유제품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학창시절 수학을 잘했던 어머니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천단위 암산을 자유자재로 했지만 나는 계산문제에서 틀리기 일쑤였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라 성격은 더욱 딴판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싫어하고 말보다는 실천이 앞섰다. 반면 나는 아버지를 닮아 남 앞에 나서거나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한다. 어머니의 완벽주의 덕분에 어려운 형편에도 집안은 늘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였다. 어머니는 속옷과 양말도 일일이 삶아 풀을 먹이고 다듬이로 두드려 아침마다 풀기가 채 마르지 않은 행장(行裝) 일습(一襲)을 내놓곤 했다. 초등학교 친구들이 나를 부잣집 딸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반면 나는 덜렁대고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는 개구장이 선머슴아였다. 공부는 전교 3등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언덕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굴러 떨어지고, 개 등에 올라탔다가 팔을 물리는가 하면 홍길동 흉내를 내다가 얼굴이 찢어지는 등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어머니 닮지 말기

고등교육을 받고 결혼하기 전까지 운수사업을 한 신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인색하면서도 자식과 남편에 대해서는 자기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서른여덟에 결혼해 사십이 넘어 얻은 무남독녀 외동딸이 너무도 소중해 어머니는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 나를 키웠다.


내 운동화를 매일 빠는 것은 기본이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나온 라면을 내가 좋아하자 점심시간에 맞춰 냄비 채로 라면을 교실로 날라 주기도 했다. 어쩌다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늙은이 자식이 돼서 골골한다’며 눈시울부터 붉어지던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우리 둥글 송아지’, ‘우리 새끼’ 40년의 나이 차 때문인지 어머니가 늘상 나를 부르던 말은 할머니가 손녀를 어르는 말에 가까웠다.



외출하기 전에 화장을 하거나 옷장을 열고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기억에 없다. 집안에서는 화장품, 하이힐, 브래지어, 거들 같은 여성용 소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본받을만할 여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인 이상 멋진 옷을 입고 싶고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욕망이 조금이라도 있을 터인데 도대체 단 한 번도 어머니는 자신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


사춘기 때는 이런 어머니가 정말 싫었다. 자기 자신은 없고 오로지 새끼만을 위해 살아가는 짐승의 암컷 이미지가 연상됐다.



두 번의 대수술로 한창 나이에 실직한 아버지 대신 가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내가 대학교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평생을 두통과 수족마비에 시달려야 했다. 사고 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려 하자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내가 자초한 사고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채근에도 묵묵부답이던 어머니는 한참만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때 내가 성모님께 빌었다. 제발 교통사고를 당하게 해달라고”

“뭐라구? 아니, 도대체 왜 그랬어?”

“보험 모집도 잘 안되고 당장 생활비가 없어서. 사고를 당하면 보상금이라도 탈 수 있잖아”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몸을 던져서까지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어머니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그때 나는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절대 어머니처럼 살지 말아야지.'


윤회의 법칙, 또는 삶의 연속성

어머니는 프랑스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 나를 따라 이역만리 프랑스 파리에서 생의 마지막 3년을 보냈다. 고혈압, 심장병, 관절염, 당뇨병으로 고통을 받고 거동도 불편했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세례명을 따온 소화 테레사 성녀의 성지인 리지외(Ligieux)를 방문했을 때 정말 기뻐했다. “자식 잘 둬서 내 일생에 이런 호사를 다 누리다니”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어머니는 파리에서 위암 판정을 받아 위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수술 받은지 5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하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는 임신중독증으로 예정보다 1개월 빨리 제왕절개수술을 받고 딸을 낳았다.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어머니가 나를 제왕절개수술로 낳은 뒤 제일 먼저 손가락, 발가락을 세어본 것처럼 나도 갓 태어난 딸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세어보았다. 딸은 나를 거의 닮지 않았다. 새끼 손가락이 유난히 짧고 손이 오동통한 것만 빼놓고는. 둥글고 동양적인 얼굴이 오히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예전에 어머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딸을 데리고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날더러 이모냐고 묻는다.


평일에는 직장 일에 바빠 거의 딸을 볼 시간이 없는 게, 평생 나에게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주말 아침마다 내 품으로 파고드는 일곱 살 되는 딸을 끌어안으며 나는 유전자의 연속성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어머니가 사십 년 전 내게 했던 말을 나도 모르게 딸에게 되뇌면서 말이다.



“우리 새끼, 둥글 송아지, 아이 착하지"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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