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의 예술혼을 현대회화로 일깨운 한국화가 우희춘
고미술의 예술혼을 현대회화로 일깨운 한국화가 우희춘
  • 김두호
  • 승인 201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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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에 채색화로 담아 낸 온고지신의 작품세계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원로 한국화가 석당(石堂) 우희춘(禹熙春 73 현대한국화협회 회장) 화백을 두고 신항섭 미술평론가는 “화가다운 화가로 거명될 수 있는 그 마지막 시대 작가 중의 한 분이다. 한마디로 그는 다채로운 재능의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인화로 시작하여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조(花鳥 꽃과 새) 절지(折枝 꽃가지) 영모(翎毛 새나 짐승) 조수(鳥獸 야생동물) 초화(草花풀에 핀 꽃) 어해(魚蟹 물고기류) 괴석(怪石)에 두루 능할뿐더러, 채색화는 물론 추상까지 넘나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라는 표현으로 화가 석당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화가이면서 미술사를 전공한 선학균 전 관동대교수는 석당의 50여년 화력(畵歷)을 분석한 글을 통해 1990년대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고유한 조상의 숨결이 내재된 채색화의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로 분류했다. 채색화의 대가인 석당이 전통회화의 정신적인 계승과 새로운 가치의 모티브로 삼은 것은 국보 또는 보물로 남아 있는 삼국시대 토기류에서 고려 또는 조선조에 빚어낸 도자기들이다. 현대 미술을 전공한 작가의 내면에서 분출하는 예술혼이 전통 회화의 뿌리인 고미술의 순수와 교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석당은 작품을 통해 웅변하고 표출해 왔다.


석당 화백의 화단 입문 시기를 미술전람회 최연소 입상작가로 천재성을 보여준 고교시절로 소급하면 화력이 반세기를 넘어선다. 왕조가 끝나고 일제 강점기와 6.25 혼란기를 지난 1950년대 후기부터 한국의 미술사가 여러 형태로 진화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삶의 전부로 호흡하고 부딪쳐 온 그의 이력은 그대로 한국화단의 산 기록들이다.

개인전을 포함해 국내외 초대전 출품횟수가 500여회가 넘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역임까지 국내의 각종 미술대전 심사만 60회에 이른다. 무엇보다 원로화가 석당의 남다른 공적은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제자를 배출한 점일 것이다. 그는 대학과 문화센터를 통해 쉬지 않고 반평생을 미술교육에 바쳤다. 작품 활동을 하는 미술인 제자들의 모임인 창석회라는 단체까지 있다.


석당 화백과 40년 지기인 옥전 강지주 화백은 석당을 다양한 장르의 미술을 섭렵해온 다재다능한 화가의 표본으로 지목하지만 석당 화백의 재능은 그림에만 머물지 않았다. 8mm 카메라로 제작하는 소형영화 작품 활동으로 한국소형영화제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12차례 수상 기록을 남겼다. 그는 취미도 다양해 스케치를 겸한 여러 차례 세계 일주 여행도 하고 한 때 수석 수집광이 되어 전국의 산천을 헤매기도 했다. 또 미국에서 마술을 익혀와 행사자리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도 있다. 글 쓰기에도 자신감을 보여 수필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수필집 <그림으로의 삶, 그 아름다운 여백>을 저서로 남겼다.


그러나 화가의 보람은 자신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와 닿는 곳에 걸려 사랑을 받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도 석당 화백은 행복하다. 국내에 있는 박물관 미술관 기업빌딩이나 관청을 비롯해 미국의 존슨대통령기념관에서도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서울시가 제정한 ‘자랑스런 서울시민상’의 첫회 수상자이기도 한 석당 화백과의 인터뷰는 “내 이야기를 내 스스로 하기가 쑥스럽다”며 사양하는 것을 몇 차례의 요청과 설득을 통해 힘겹게 이루어졌다.




석당 선생님 그림은 과거 체신부가 발행하는 연하우편카드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12종 채택했었지요. 모두 공모에서 선정한 것이었어요.

지금은 취미만으로 화가가 될 수도 있지만 옛날에는 남이 흉내 못 낼 정도로 귀신같이 그림을 잘 그려야 화가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그림을 시작하셨습니까?
고향인 충남 강경에서 산양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전국의 미술대회에 나가면 매년 최고상을 받았어요. 중학교(충남 강경중) 시절도 전국에서 열리는 미술공모전에 학교에서 작품을 내보내면 꼭 상을 받곤 해 내가 가야할 길이 화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말 그대로 천재소리를 들으시면서 성장하셨군요.

그랬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지만 중고교 때 미술부장 노릇을 하며 선생님의 총애를 별나게 받아 일찍부터 그림에는 기가 살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서울 동북고) 때는 미술선생님 소개로 개인 화실에서 특별수업을 받는 혜택도 있었는데 그 덕분에 미술전람회에서 사상 최연소 입상 기록을 세웠어요.

그 무렵 받은 상은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1957년에 동국불교사상연구회가 주관한 전국서화전람회에 문수보살 그림을 출품해 입상했고 1962년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신인예술상 미술전람회에서는 사군자로 입상했어요. 그것을 계기로 저명인사들의 인물화도 그리고 풍경화도 그리며 장르에 구애 안 받고 내 나름의 창작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도 동양화(현 한국화)를 전공하셨지요?

서라벌예술대(현 중앙대)에 진학하기 전에 제 11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사군자(梅)로 입상했습니다. 대학에서 동양화(한국화)를 전공하면서 서양화 쪽의 모든 활동을 그만두었습니다. 1962년에 한국미술협회가 발족하면서 창단 회원이 되어 한국화 창작활동에 전념해 온 것이지요.




한때 저명인사의 인물화를 그리셨다는 데 어떤 분들입니까? 우정이 깊은 사이인 옥전(강지주) 화백은 석당 화백이 극사실적인 초상화의 명인이었다고 평한 적이 있더군요.

그림이라면 장르를 안 가리고 의욕이 넘치던 1950년대 말기 시절이었지요. 삼성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선친, 자유당 정권 시절 세도가였던 이기붕 국회의장, 최인규 내무부장관 초상화에서 유명한 여배우였던 윤인자 씨, 일엽 스님 등도 그렸어요. 사진자료로 일본 수상의 초상화를 그려준 기억도 납니다. 대부분 실제 인물을 앞에 두고 그렸지만 간혹 사진이나 역사적인 자료를 토대로 한 인물화도 제작했어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도예문화의 뿌리가 된 도공 김삼평 공 후손의 부탁을 받고 가져 온 얼굴 윤곽 자료를 토대로 실존 모습을 되살리는 초상화를 만들었어요. 김삼평 공은 심수관 도예가의 선조보다 먼저 끌려간 첫도공으로 알려져 있어요. 또 주한미군사령부가 주문한 미국의 존슨 대통령 초상화도 그려 주었는데 존슨기념관에는 그 초상화와 별도로 구입해 간 내 화조 그림까지 두 점이 걸려 있습니다.


자유당 정권 때 이기붕 의장과 최인규 장관의 얼굴을 앞에 두고 초상화를 그렸다고요?

하하하. 그랬었지요. 그런데 최인규 장관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날 밤에 잠을 못 잤어요. 큰 집안에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보던 진기한 가구와 물건들을 구경하며 너무 놀라서 잠자리에 눕자 그것들이 떠올라 사흘정도나 잠을 설친 기억이 납니다. 반발심리가 아니라 호화로운 물건에 대한 신기함에서 받은 순진한 서민 젊은이의 쇼크였어요.


또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청담 스님의 좌상 초상화 제작 의뢰를 받고 그분이 계시는 도선사에서 한 달간 동거하며 그린 적이 있습니다. 난 교회에 다녀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화제를 내밀곤 해 밤낮 그 어른과 말싸움을 벌였어요. 젊은 혈기로 무서운 것을 모를 때라 꼬박 대꾸를 했어요. 눈 오는 길을 큰 스님이 행차하면 스님들이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어가며 모시던 모습도 인상에 남아 있군요. 작품을 끝낸 후 의뢰한 절에서 돈을 주지 않아 여러 차례 찾아간 적이 있는 데 나중에 청담스님을 대신해서 육영수 여사 비서가 불교신문사를 통해 대신 돈을 보내주었어요. 그밖에 총무원장을 지내신 월하스님 초상화도 그려준 일이 있군요.

사찰 건축이나 문화재의 복원 작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청미술에도 조예가 깊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50년 전 얘기입니다. 우리 단청미술의 유래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오를 만큼 전통이 깊고 경이로운 분야입니다. 당시 부여교육청의 이만승 교육감이 단청 그림 공모에서 입상한 나를 추천해 부여 낙화암의 고란사와 삼충사 단층 복원 작업을 하게 됐어요. 그 덕분에 부여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기회가 주어져 “자네 재주가 뛰어나다”는 대통령의 칭찬을 들었고 대전일보와 중도일보에서 기사로 소개해 준 적이 있어요.




1960년대는 문인화와 화조 등에 심취하시고 1970년대는 추상화 쪽으로 화풍을 바꾸셨지요?

미술계에 추상 표현주의가 노도처럼 밀려온 시기였어요. 현대미술의 주류에서 동떨어진 길을 혼자서 고집하고 있을 수는 없어 그 무렵 국전에 출품해 입상한 나의 작품들도 추상화였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로 넘어서면서 비구상보다 구상적인 성향이 내게 맞는다는 생각을 했고 수묵담채 계열보다 채색계열에 대한 애정이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다가서기 시작했어요. 창작세계에는 투철하고 치밀하며 성격이 분명한 작가의 의식과 정신이 반영되어야 하는데 채색화 안쪽으로 들어서면서 작가로서 다소 분산됐던 에너지를 한 곳으로 깊이 집결시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요.

현대 채색화의 특징적 요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의 유적을 통해 나타난 채색화의 유래는 BC 7000년도 넘습니다. 우리도 삼국시대의 고분벽화에서 색채 그림을 볼 수 있지만 묵향문화를 귀하게 여겨온 한국화의 오랜 전통으로 채색화보다 문인화를 비롯한 수묵화가 중심축이 되어 왔습니다. 옛날부터 민화 쪽에서 명맥을 이어올 만큼 가치를 잃었던 분야인데 현대적 채색화가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컬러 TV시대가 토해낸 색조문화가 미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무렵부터 대학 교육분야에서도 채색화가 주목을 받고 활발해 지기 시작했고, 미술대전이나 비전이 있는 전시회에서도 위상이 높아져 한국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채색화가 전통적인 미술사조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진보된 현대 한국화의 큰 흐름 속에 자리를 잡아 비로소 새롭고 다양한 변화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현대 채색화와 고대에서 전래된 채색화의 다른 점이 있다면 표현기법과 소재나 재료의 차이 정도이지 예술적인 정신이나 추구하는 미적 세계는 크게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재주를 피우지 않고 보여준 숭고하고 순박한 정감과 리얼리티, 신비감은 고미술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단순한 무늬와 황토로 빗어낸 토기 또는 고분벽화, 청자 백자 등 도자기에서 질박하지만 인간의 정감이 스며있는 분청사기 등을 즐겨 창작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채색화에 천착해 왔지만 색을 절제하고 색깔과 소재의 단순화를 통해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접목 재창조 조화 소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옛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터득한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창작 정신일 수 있습니다. 그림은 또 어떻게 그리느냐 보다 오히려 무엇을 그리느냐가 더 소중할 때가 많습니다.

석당 선생님의 작품에서 다양하게 추상형태로 표현된 배경 이미지에는 어떤 의미가 부여되고 있습니까?

사실적으로 드러난 형태의 이미지가 역사라면 윤곽선에 의한 실루엣의 이미지는 나타나지 않고 감추어진 역사를 생각하며 표현합니다. 생활기물의 형태적인 재현을 통해 그 시대에 담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그것을 이끌어 낸 정서적인 원형을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소재가 된 고미술품 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청자는 화려하고 귀족적이고 백자는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지요. 그런데 분청사기는 겉보기가 투박하고 멋이 없어 보이지만 자유분방한 멋과 순박함을 느끼게 해서 더 정이 갑니다. 내면에서 묻어나오는 정감이 더 깊어요.




새로운 소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고생도 많을 것 같습니다.

공공 박물관에 전시된 국보나 보물급 미술품을 주로 선택했지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도 많아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해왔어요. 사진보다 스케치로 시작해야 느낌을 살릴 수 있어요. 지금은 전국의 주요 문화재급 토기 도자 등의 고미술품 소재지를 모두 꿰고 있어요.


2007년 고희기념 개인전 때 펴내신 <석당 우희춘> 화집을 보면 개인전을 비롯해 국내외 전시회에 참가한 횟수가 5백여 회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발표하신 작품 중에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현대미술관, 포스코와 현대건설, 대통령 별장이나 관공청사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 모두 곁에 두고 싶은 그림들이지만 그 중에 뉴현대빌딩에 전시된 100호짜리 사슴 그림이 제일 그리움과 미련이 많이 갑니다. 그 작품을 위해 사슴농장에서 수백 장을 스케치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원로 또는 중진 화가들이 이력에서 가장 비중 있게 생각하는 것이 미술전의 심사경력입니다. 국전을 비롯해 그 동안 60여 차례 각종 미술전 심사를 해오셨고 제자도 가장 많이 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부터 동덕여대에서 22년, 이어서 성신여대에서 12년간 강의를 했어요. 그러나 30년 전 기독교방송국이 국내 처음 문화센터를 개설하면서 첫 강사진으로 참여해 대학교에서보다 더 많은 학생을 여러 문화센터에서 가르친 셈이 됐어요. 지금도 강의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공통점은 대다수 여자 제자라는 점이지요. 나의 아호에서 ‘석’(石)자를 가져가 창석회(創石會)라는 제자들의 미술단체도 생겨 회원들이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어요. 이제는 제자들이 미술전 심사를 해 그 보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소형영화작가로도 활동하시고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은 수필가로 수필집까지 펴내셨지요?

그림에만 매달려 산다면 쉽게 지쳐버릴 것 같아 틈틈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어요. 주로 다큐멘터리를 직접 촬영하고 제작하는 8mm 영화 촬영에 흠뻑 빠져 국내 영화제에서 12차례 수상작품을 내놓았어요. 대개 미적인 구도와 소재 선택들이 미술과도 통하는 점이 많아서 재미를 느꼈어요.

사실 취미로 평생 즐겨온 세계여행이나 한 때 수석을 찾아 전국을 헤매면서 내 나름의 즐거움을 느낀 것은 아름다운 피사체를 찾는 미술세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때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인 마술사에게 마술도 열심히 배워 지금까지 모임자리에서 즐기고 있어요. 하하하.




세계 일주 여행을 하셨다고요?

혼자서 여러 차례 했어요. 1970년대 미술계는 화가들에게 호황기였습니다. 전시회를 하면 한 작품에 20명 이상의 예약자가 몰려들곤 했어요. 미국에서 전시회를 해도 작품이 순식간에 한 뭉치의 달러로 바뀌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좋은 일만 있지 않고 불행한 일도 겪었어요. 화재로 집이 잿덩이가 되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또 호텔에서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어 쉽게 새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으니 재미있는 시대였지요.

그래서 그 무렵 여유가 생기면 세계 일주를 떠났어요.


미국에서도 작품 활동을 하셨습니까?

1975년부터 전시회를 다섯 차례 했고 몇 년간 살다시피 그곳에서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작품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어요.


자녀 분 중에 혹시 예기를 이어받은 분이 있으신지요? 가족을 소개해주시지요.

해외여행을 하며 영어 잘하는 사람이 가장 부러웠던 때에 고교 영어교사 출신으로 미국 회사에 다니던 아내(김정자)를 만나 1967년에 결혼해서 아들 형제를 두고 있습니다. 큰 아이(종균)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네덜란드 에라스무스대학에서 국제물류학 박사과정 학업을 계속하고 둘째(승균)는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모두 그림과는 무관한 길을 가고 있어요. 그런데 결혼한 큰 아이가 낳은 8살박이 초등학생인 손녀(주연)가 뛰어난 그림솜씨로 학교에서 칭찬을 많이 받고 있어서 아마도 할아버지 대를 이을 것같아 기대하고 있답니다. 하하하. 나는 영어 때문에 고생했는데 영어와 다른 과목도 고루 잘하고 있어서 요즘 그게 내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언제나 붓을 들면 최후의 걸작을 남겨야겠다는 욕심을 내지만 최선을 다해 그려도 완성된 작품에 만족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모든 창작인의 공통점일 겁니다. 나는 완벽주의를 좋아하는데 스스로 크게 만족할만한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습니다. 또 소재도 토기 도자류에서 벗어난 새로운 물상을 구상중입니다. 4월부터 쉬지않고 전시회 출품 작품을 내야하고 7월에는 개인전을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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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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