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주도권은 스토리작가들이 가져야” 한국만화스토리작가협회장 조성황
“만화 주도권은 스토리작가들이 가져야” 한국만화스토리작가협회장 조성황
  • 육홍타
  • 승인 200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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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활동, 작가로 이름 나온 건 4년 전부터 / 육홍타



[인터뷰365 육홍타] 한국만화스토리작가협회 조성황(53) 회장은 '스토리 저작권 확보'를 회장 취임 후 첫 목표로 삼고 투쟁해 왔다. 대부분의 만화가 글(스토리작가)과 그림(만화가)으로 나누어 작업하는 분업체제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들만 저작권을 갖고 스토리작가는 작품에 이름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이렇듯 만화가의 그늘 아래에서 작업을 해오던 스토리작가들이 협회를 결성하고, 법적 소송을 통해 창작자로서의 권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심에 그가 있다.
스토리작가들이 만화의 저작권자로서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은 옛 만화들의 재출간, 인터넷 만화의 인기, 모바일 만화의 등장 등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익이 생긴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지만,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만화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서 스토리작가들도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커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재판이나 인터넷 등으로 인한 수익을 스토리작가들에게도 나누어 달라는 이들의 요구에 대해 법원은 긍정적인 판결을 내리고 있다. 만화가 조명운 오일룡 고행석씨 등 3명에 대한 소송에서 모두 스토리작가들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조성황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토리작가가 만화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결국 법정까지 가서야 해결이 됐는데...
점잖은 협상은 성과가 없었어요. 법적으로 확실히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95년 무렵 만화도 재판을 찍기 시작해서 1998년부터 본격화됐어요. 그간 못 받은 재판 원고료와 최근의 인터넷 원고료 중 우리 몫을 돌려달라는 것이었지요.

재판 과정에서의 이야기도 많을 텐데요.
20개월의 법정싸움을 통해 20% 정도의 원고료를 받기로 한 것인데, 그나마 증거나 증인이 있는 것만 인정해준 것이라 만족스런 결과는 못 됩니다. 사실 우리는 만화가를 믿고 스토리 원고를 넘겨주었을 뿐이라, 만화가들이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떼니 어이가 없더라구요. 게다가 재판이나 인터넷을 통해 받은 원고료도 터무니없이 축소해서 말하고... 근거자료를 모두 우리가 찾아서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나는 메모광이라 내 것은 다 모아놓은 상태였어요. 24년 전 첫 작품까지 아직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다른 스토리작가들의 재판에 내 자료와 소견서를 제공하고, 스토리를 썼다는 걸 증언해줄 증인을 찾고 해서 어렵사리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지요. 덕분에 만화가들에게 나는 독사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밤4시에 전화해서 ‘밤길 조심하라’는 협박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문제는 놀랍게도 스토리작가가 더 움츠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이 끊길까봐 걱정하는 거지요. 그런 상황이 안타까워요.

스토리작가협회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스토리작가모임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1993년에 한국만화스토리협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결성해서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의 스토리를 쓴 김민기씨가 초대 회장을 맡았지요. 2대 방경수 회장을 거쳐 야설록씨가 3대 회장이 되었다가 1999년에 해체됐습니다.
지금의 한국만화스토리작가협회는 2005년에 임웅순 선배를 회장으로 해서 탄생한 것입니다. 나는 그때 부회장을 맡았다가 2,3대 회장을 연임하고 있어요. 회원이 335명이구요.
이젠 스토리텔링 시대가 도래했다고 봅니다. 우리가 칼자루를 쥐고 그림작가를 선택해서 그릴 수 있는...

이제 개인적인 얘기를 해 보죠.
고등학교 때 집안이 쫄딱 망했어요. 아버지가 금광을 찾는다고 전국을 헤매는 바람에 이태원에서 자가용을 타던 집이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지요. 버스값이 없어 3,40분씩 걸어서 통학을 해야 했고...
그 와중에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대학도 청강생으로 겨우 다니고 하면서 불량기 있게 살고 있었는데, 문득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4시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다가 신비로운 체험을 했어요. 청강하던 영문과를 그만두고 신학대학에 들어갔지요. 소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학교 다니면서 회의가 들었습니다. 착각이었던 거죠.
졸업을 앞두고 건축오퍼상에 취직했습니다. 근데 해보니 그게 딱 내 적성이더라구요. 1년 만에 독립을 했는데, 충분한 경험이 없다보니 금방 망했습니다. 사업을 접고, 이젠 샐러리맨을 하려고 삼성전자에 지원했어요. 3차 면접까지 다 합격해서 노동계약서라는 것도 쓰고, 일주일간 수원서 강릉까지 걸어가는 극기훈련까지 마쳤습니다. 뭐 실제로는 다들 버스도 타고 했지만요.
첫 출근을 앞두고 일요일날 집에 있는데 옆 빌라 지하에 사는 여자가 자살하려고 기름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났어요. 여러 가구의 가스통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거기에 불이 옮겨붙으니까 모였던 사람들이 정말 0.3초 안에 다들 도망가더라구요. 나하고 이층 새신랑, 둘만 남아서 불을 껐어요. 여자를 끌어내려는데, 저항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그 과정에서 독한 공기를 많이 마셨지요.
막상 첫 출근을 하니 열이 40도나 되었습니다. 결국 기절하는 바람에 입원해서 기관지 세척도 하고 산소탱크에도 들어가고... 거의 죽었다고 할 정도였지만 다행히 소생해서 15일 만에 퇴원했어요. 의사가 1년간 못 움직인다고 했는데 정말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고 열이 나는 거예요.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인간이 된 거지요. 회사는 2개월간의 기회를 줬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습니다. 결국 회사는 못 다니게 되었지요.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언제였나요?
글을 쓸 운명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어렴풋이 느낀 것 같아요. 담임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물어보셨는데 다들 대통령 같이 평범한 것을 대답하더라구요. 나는 좀 튀는 걸 하고 싶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너는 글을 잘 쓰니까...” 라고 긍정적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글짓기 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탔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인정해주니까 비로소 ‘아, 내가 글을 잘 쓰는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엔 ‘빨간책’이라고 부르는 책이 인기였어요. <꿀단지>니 <벽창호>니 하는, 요즘 말로 하면 야설책이지요. 애들이 이걸 청계천서 어렵게 구해 와서는 버스표 두 장쯤 받고 반 아이들한테 빌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모두들 돌려보곤 했는데, 읽다 보니 나도 쓰겠다 싶어서 진짜로 한번 써봤습니다. 그게 히트를 했습니다. 버스표 1장에 팔기 시작했는데, 다음 편을 빨리 내라고 협박을 받을 정도였어요. 천부적 소질이 있나 봐요. 하하.



그게 첫 작품인 셈이네요. 진짜 작가가 된 것은 무협으로였죠?
회사도 못 다니게 된 상태에서 어느 날 길을 가다 동창생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40만원어치 술을 사는 겁니다. 삼성의 ‘노동계약금’(월급)이 27만원이던 시절이었거든요. 그 친구는 모두위라는 필명으로 무협을 써서 한달에 200만원을 번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나도 그거 쓰면 안 되냐고 했더니, 무협을 적어도 2천권은 읽어야 한다면서 7권짜리 무협소설 7질을 갖다 주더라구요.
그걸 읽고, 나도 무협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 작품을 3개월 만에 써서 주니 120만원을 주더군요. ‘돈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심히 써냈지요. 목우생이라는 필명으로 <사황> <강호춘추> <천면서생> <파천서생> <강호소야곡> <군림제왕성> <중원제일인> 이렇게 일곱 편을 쓰고 났더니 무협시장이 하향길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7질 읽고 7편 쓴 사람’이라는 전설(?)이 되었지요.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쓰다 보니 어이없는 실수도 많았습니다. 무당파인 장삼봉 검법이 아미파에 나온다든가... 그래도 진급은 빨라서 2년 만에 실장이 되었습니다.(무협소설계는 출판사에서 집필실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책임자를 실장이라고 불렀음.)
그런데 그 작품들이 후에 사마달 이름으로 재간이 되었더군요. 바로북(인터넷으로 책을 읽는 사이트)에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마달씨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고... 알고 보니, 오래 전에 재판을 찍겠다고 했던 후배의 소행이었지요. 차일피일하고 책을 내지 않더니 나중에 엉뚱하게 남의 이름으로 낸 거죠.

무협소설가 다음에 만화스토리작가로 전업한 것인가요?
1986년엔 이미 무협이 사양화되었거든요. 그런 참에 만화가 조명훈씨가 스토리작가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하루 만에 콘티까지 다 해서 갖다 주니 권당 20만원을 주는 겁니다. 돈 되는구나! 생각하고 만화스토리를 쓰기 시작했지요. (만화스토리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써서 넘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림 구성까지 염두에 두고 칸을 나누어 구체화시키는 콘티로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해서 <본토박이길>로 데뷔했는데, 데뷔작이 떴어요. 조명훈씨와 <남아의 혼> <대꼬챙이 시리즈>등 다섯 작품을 하고 나서 강촌씨와 손을 잡았는데 히트작이 많았습니다. 강촌씨는 나하고 잘 맞는 작가였어요. 애증이 교차하는 작가지요.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고행석씨랑 박원빈씨 작품도 했습니다. 고행석씨의 <벼락맞은 불청객> <불청객과 황금나그네 > <불청객과 이쑤시개 하나> <불청객과 담배가게 아가씨>, 박원빈씨의 <한계 돌파> <광야의 노래> 등등...
사실은 만화가 이름을 얻어서 내가 주도권을 갖고 직접 작품을 해보려는 생각을 했었는데 잘 안 됐어요.
1996년부터 97년까지는 SBS의 <스피드왕 번개> 26부작의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이 애니가 롤러블레이드 붐을 일으켰지요.

무협도 만화도 ‘돈 되는구나!’... 집필 동기가 어째 좀 삭막한데요?
나는 친구인 스토리작가 박하처럼 소위 말하는 ‘작가정신’은 없어요. 만화는 서비스산업이라고 믿거든요. 사람들에게 만화로 인한 즐거움, 만화로 인한 분풀이를 줘야 한다고요. 만화에서조차 심각하게 그러면 사람들이 도망갈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도 좋은 작품 쓰겠다 생각하지 말고 돈 버는데 에너지를 맞추라고 조언합니다.
나는 철저히 상업성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어줍잖게 메시지 전달할 생각은 말아야지요. 일본만화를 보면 메시지와 모티브가 헷갈리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누가 돌팔매를 던지더라도 ‘만화는 서비스산업’이라는 게 제 신념입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작품을 쓰는 게 중요해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도 나오고 하겠지요?
애착이 가는 작품은 있지요. 애착 갖는 것을 쓸 때는 하루 종일 생각해요. 꿈에도 생각할 정도로요.
만화스토리도 처음엔 현대물을 하다 나중엔 시대물, 즉 무협을 많이 했거든요. 황성씨하고 <독행검> <파천지애> <환> 등 5~6 타이틀을 했고, 야설록씨랑 <월인몽 월인색> <적화소대검무> 등 7편, 사마달씨하고 <검생검사> <절명수> 등 7편을 했어요. 모두 40타이틀, 총 1천권쯤 썼는데, 그중에서 애착이 가는 것은 딱 4편뿐입니다. <검생검사> <독행검> <월인몽월인색> <적화소대검무>. 나머지는 스스로도 별로...
강촌씨가 그린 <혈맥> <호모사피엔스> <해커대전쟁>(이상 스포츠서울) 등 이름을 밝히지 못한 신문연재 작품들도 있고... <혈맥>은 일본 NHK가 강촌씨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관심을 모았지요.

스토리작가로 작품에 이름을 명기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2005년부터 내 이름을 갖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포츠칸>과 하나포스에 조성황 글, 이경열 그림으로 <명품 열전>을 연재했지요. 도박만화 <끗발>(이영석 그림)은 <스포츠칸>과 하나포스 외에 지금은 폐간된 <데일리줌>에도 동시연재했었어요.

광고 카피를 하려고 했던 얘기도 좀...
1995년에 광고계에 진출할 계획을 하고 광고세미나에 참여했다가 덜컥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만화를 어떻게 광고에 접목시키나 뭐 이런 주제로 한국광고연구원 강의까지 했지요. 강의 시간에 세콤을 소재로 애니메이션 광고 얘기를 했더니 광고회사에서 그 아이디어를 20만원에 팔라고 하는 겁니다. 당시 만화스토리 한권에 120만원 받던 시절이었거든요. A4 한 장이 10만원, 한 줄에 2500원꼴이어서, 줄 바꾸면 ‘2500원 벌었다!’ 하고 농담을 하던 때인데 20만원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팔지는 않았고, 그 광고는 <애드버타이징> 잡지에 실렸습니다.

한 줄에 2500원이라면 대단한 원고료였네요.
옛날 얘기지요. 최근엔 만화계도 불황이라 찍는 부수가 줄어들다보니 원고료도 터무니없이 줄어들었습니다. 단가가 낮다보니 한 달에 열권 이상 무조건 써야 하는 상황이에요. 최근 5년간 쓴 게 그 동안 15년간 쓴 것보다 많을 정도니까요.

이젠 작품도 작품이지만 명강의로 더 알려지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요. 만화스토리 작법 강의를 하고 계시지요?
인덕대 애니메이션학과 스토리텔링 강사하고 문화콘텐츠진흥원 아카데미 스토리텔링 책임강사, 이 두 군데 강의를 주로 합니다. 저는 강의가 적성에 맞나 봐요. 고등학교 때, 누나가 집에서 과외를 했어요. 꼬마들을 거의 20명씩이나 모아놓고 가르쳤지요. 누나가 외출할 일이 있으면 내게 수업을 맡겼는데, 애들이 내가 가르치는 걸 더 좋아했어요.

강의를 해보니 어떤가요?
학생들이 스토리의 기승전결 자체를 모르더라구요. 나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만화스토리라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제 강의가 특별난 것도 아니고, 스토리작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강의인데 그러니 어이가 없었지요.
대학에 만화 관련학과가 생긴 지 꽤 됐고, 학원까지 포함하면 그동안 배출된 졸업생이 6만 명 넘습니다. 그런데 만화대학을 나와 유명작가 된 이가 하나도 없어요. 교수진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스토리는 스토리 전문가에게 맡겨 현장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강의에서조차 그림작가들이 스토리작가를 누르고 밀어내온 것이지요.




자신의 창작비법을 직접 전수해주는 건가요?
‘소컬레이터기법’이라는, 제가 창안한 스토리 작법이 있습니다. 소쿠리와 에스컬레이터의 합성어예요. 소쿠리로 이미지를 건져내서 채우면 쭉 밀려간다는 뜻에서 명명한 거지요. 이 소컬레이터 기법을 배우면 기승전결과 만화스토리 라인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천부적 소질이 없어도 작품을 쓸 수 있게 돼요.
소설 같은 기존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모티브마다 이미지를 부여하다 보면, 이미지 라인이 곧 기승전결이 됩니다. 다른 이야기를 쓸 때, 그 이미지 라인을 따라가면서 고의적으로 맞춰가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지요. 하지만 아무도 원래 텍스트로 삼았던 작품이 뭔지는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춘향전을 예로 들면, 이몽룡이 그네 타는 춘향이를 처음 보는 장면은 ‘사냥감 포착’, 둘이 만나 잘 지내는 모습은 ‘삼삼하다’, 이몽룡 아버지로 인해 헤어지게 되는 장면은 ‘날벼락’ 이런 이미지를 각각 부여합니다. 그러면 다른 소재로 작품을 쓸 때, 사냥감 포착에 해당하는 상황을 만들어 시작을 하고, 삼삼한 상황을 넣고, 날벼락에 해당하는 상황을 만들고...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거죠.

그 기법은 어떻게 창안한 건가요?
만화를 한 지 7년째 되는 날, 강촌씨가 그린 <몽고반점>을 쓰는데 너무 힘이 드는 거예요. 좀 쉽게 쓰는 수는 없을까, 그런 궁리를 하게 됐죠. 그런데 작품노트를 보니 내가 이미지를 만들고 있더라구요.
처음 생각한 게 <이녹 아든>의 이미지를 이용해 보자는 것이었어요. <이녹 아든>의 줄거리를 이미지화해서 붙여 놓고 하니 정말 일이 쉽게 되는 겁니다. 강촌씨의 최대 히트작인 <수직상승>이나 <인생치기> 같은 작품도 그렇게 해서 썼지요.
그렇게 이미지로 정리된 것을 17개 갖고 있는데 주로 다섯 개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장 크리스토프> <주홍글씨> <이녹 아든> <데미안> <사람의 아들>을 애용하지요. 이 기법을 쓰면 특출난 것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 ‘빵작“은 안 나옵니다.

제자나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작품은 감각 20%, 자료 80%라고 생각해요. 자료가 있으니 저절로 얘기가 되더군요.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자료를 요구합니다. 전엔 감각이 80%라고 생각해서 자료조사 잘 안하고 대충 쓰는 수도 많았지만 이젠 인터뷰를 하고 간접경험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 오히려 역으로 작용한다는 거예요. 인터넷을 믿고 자료 구축을 안 해놓는 거죠. 하지만 인터넷 자료는 상상력이 없어요. 인터넷이 작가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셈입니다.
간접경험인 독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세대 작가 중에서 시대변화를 넘어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데, 공통점은 독서광이라는 거예요. 나는 우리집 아이들에게 독서 시간만큼 게임을 하게 해주었어요. 그냥 눈으로 하는 독서가 아니고 필사를 해서 진짜 읽은 것을 증명하게 했죠. 그 덕에 아이들이 <어린왕자>류에서 시작해서 <로마인 이야기>까지 필사했어요. 큰 자산이 되겠지요.

만화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요즘엔 정부나 기타 사회적으로 만화계에 대한 지원이 많아졌어요. 만화스토리작가를 위한 프로젝트나 작품공모 같은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만화계엔 아직도 구태의연한 부분들이 많아요.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부분도 있고... 사실 과거의 만화계엔 부조리한 면이 많았잖아요. 나조차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공장만화에 일조하고, 비리에 야합했던 거죠. 이제는 만화가들이 다 모여서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국내 만화계를 위한 새로운 방법의 만화제작을 의논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인덕대 조성진 교수와 합작으로 <해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인덕대에서도 지원해 주기로 했구요. 동양신화를 모티브로 하는 학습만화 30부작으로 기획중인데요. 원 소스 멀티 유스로, 애니메이션과 머천다이징까지 계획하고 있어요. 제 만화인생의 승부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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