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7)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7)
  • 임정진
  • 승인 200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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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7. 미선의 임신




양호실 강 선생은 상담실 최상준 선생의 느닷없는 방문에 깜짝 놀랐다.

「강 선생님, 저 잠깐만 들어가도 됩니까?」

양호실에 남자 선생님이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네, 들어오세요.」

강 선생은 밝게 웃으며 최 선생에게 의자를 꺼내 주었다. 최 선생은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선생님, 어디 편찮으세요?」

「아뇨, 걱정이 돼서요. 강 선생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지금 상담실에 여학생이 하나 와 있어요. 이름은 미선이라고 하는데 걔 좀 데리고 병원에 같이 가주십사 하고요.」

「아프면 왜 양호실로 먼저 오지 않고...」

「산부인과에 제가 데리고 가기가 뭣해서요.」

「산부인과요? 그럼...」

강 선생은 깜짝 놀랐다. 고등학생들이 이성 관계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기 학교 내에서 임신까지 한 여학생이 생길 줄은 몰랐었다.

「제가 보기에 임신 4개월쯤 된 것 같습니다. 벌써 두 번째예요. 저도 참 미치겠어요. 그런데 본인은 저보다 태연하니 더 환장할 노릇 아닙니까?」

강 선생은 최 선생에게 커피를 타주고 상담실로 올라갔다. 상담실엔 해맑은 표정의 여학생이 오도카니 앉아 꽃병의 꽃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선이...?」

강 선생은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몰라 그냥 문을 닫고 섰다.

미선이는 살며시 웃으면서 일어섰다.

「죄송해요. 이런 일로 귀찮게 해드려서. 저 혼자 가려고 했는데 미성년자는 보호자가 있어야 한 대요. 그래서...」

미선이는 앞장서서 상담실을 나섰다. 강 선생은 뭐라 말도 못하고 미선이 뒤를 줄레줄레 따라갔다.

미선이는 버스에 올라타고는 또 강 선생에게 <죄송해요>라고 속삭였다.

「어디 아는 병원 있니?」

「아뇨, 그냥 학교나 집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려구요. 어느 동네에나 병원은 있잖아요.」

강 선생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계속 미선이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문제아같이 안 보였다. 옷차림도 깔끔했고 말씨도 공손했다. 양호 교사로 발령받기 전에 나름대로 상상하던 문제아와는 전혀 달랐다.

버스는 30분쯤 달렸다. 미선이는 강 선생의 팔을 잡아끌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3층짜리 산부인과병원이 있는 걸 미리 본 모양이었다. 간단한 수속을 밟고 미선이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강 선생은 생전 처음 보는 미선이가 너무나 불쌍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 2시간 가량 누워 있다 가라고 간호원이 말해 주었다. 강 선생은 미선이 침대 곁에 앉아 두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

「선생님, 먼저 가셔요.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선생님 시간까지 뺏을 필요 없어요.」

「괜찮아. 나 오늘 안 바쁘거든.」

「선생님, 고마워요.」

미선은 그제서야 맑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안 아프니? 아프지? 내가 바보같이 물어 보았나?」

「아기 떼고 나면 참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그래요.」

강 선생은 또 할말을 잊었다. 대체 이 아이의 마음속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단 말인가. 눈을 감고 한참을 있던 미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면 우습지만... 저, 비밀은 지켜 주시겠죠? 우리 담임이랑 엄마랑 애들이랑...」

「그, 그럼. 걱정 마.」

강 선생은 미선이에게 어떡하다 애를 가졌느냐, 어떤 놈팽이와 놀아났느냐, 왜 피임은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미선이의 얼굴이 창백하면서도 맑아 그런 질문이 도대체 미선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생님, 궁금하시죠? 제가 왜 이 꼴이 됐는지.」

「아니, 뭐...」

강 선생이 오히려 당황하자 미선이는 살짝 웃었다.

「사랑을 했거든요. 열여섯 살은 사랑에 빠지기 쉬운 나이잖아요.」

강 선생은 마주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맹추야. 열여섯의 사랑은 짝사랑이면 족한 거야. 어쩌자고 겁도 없이...)「선생님도 사랑해 보신 적 있으세요?」

강 선생은 미선의 느닷없는 질문에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체 이애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사랑? 세 번쯤? 열병 같았지.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그게 사랑이었을까 싶어지더구나.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건 잠시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슬프게도 말야. 그냥 내가 사랑하고픈 열망에 휩싸였을 때 누군가가 나타난거야. 내 욕심에 휘말려 그를 사랑한다고 믿게 된 거지. 그러니까 누구 말처럼 사람을 사랑했던 게 아니라 사랑이란 감정을 누려 보고 싶었던 거야. 그 사람은 운 없게 거기에 말려든 거고.」

「그럼 후회하세요?」

「아니. 후회하진 않아. 좋은 기억들을 참 많이 갖게 됐거든. 그래서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면 행복해져.」

「저도 후회 안 해요.」

미선은 야무지게 말했다. 미선은 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난 후회할 수 없어. 후회하면 난 불행해지니까. 사랑에 빠졌던 결과를 나 혼자 책임진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마지막 호의지.)

강 선생은 쥬스를 사왔다. 그리고 미선에게 쥬스를 마셔 보라고 권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전 계획 같은 거 없어요. 그냥 그날그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강 선생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또 이런 꼴 당하려구? 넌 지금의 네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아?」

미선은 강 선생이 화를 내자 또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난 널 오늘 처음 봤지만 나쁜 애가 아니라고 느꼈어. 하지만 철딱서니가 없어도 분수가 있지. 앞으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어야 하는데 벌써 이런 일을 당하고 나면 뭐가 제대로 되겠어. 그러고도 천하태평이니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넌 제정신이 아닐 꺼야. 산부인과보다도 정신과에 먼저 가봐야 되는 애야.」

「선생님, 화 내지 마세요.」

미선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강 선생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강 선생은 열통이 터져 미선이가 누워 있는 것까지 못마땅해 보였다.

「두 시간 다 됐어. 그만 집에 가. 택시 잡아 줄 테니까.」

강 선생은 미선을 부축해 일으켰다. 미선은 매미의 빈 허물처럼 가벼웠고 곧 부수어질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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