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탄생 250주년 <소설 목민심서> 작가 황인경
다산 탄생 250주년 <소설 목민심서> 작가 황인경
  • 김두호
  • 승인 2012.09.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 읽어주던 엄마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터뷰365 김두호】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탄생 250주년인 2012년을 맞이해 여러 단체가 국제학술회의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의 기념행사를 잇달아 개최하고 있다. 황인경 작가(56)는 조선시대 실학의 대가로 정치와 사상, 실용과학,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일생동안 500여권을 저술한 다산의 삶을 <소설 목민심서>로 옮긴 역사소설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
황인경 작가의 <소설 목민심서>는 1992년도에 5권의 대하소설로 발매되어 2년간 5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다. <목민심서>는 목민관(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도리와 관리들의 잘못을 지적한 지방행정 지첨서로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로 꼽힌다.
황인경 작가는 어린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로 살다가 직접 쓴 소설을 자식세대에게 전해주려는 일념으로 자료수집과 집필기간까지 장장 10년간 매진하여 200자 원고지 10,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원고를 완성해 책으로 펴냈다.
전국의 고서점과 헌 책방을 뒤져가며 다산과 관련된 사료를 찾아내고 다산의 저술이나 동시대의 역사적인 사건 기록과 배경들이 들어 있는 200여권의 서적을 달달 외울 정도로 파고들어가 <소설 목민심서>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황인경 작가를 만났다.

그때 그 작가


오래 전 <소설 목민심서>를 다룬 신문 문화면의 보도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지금 작가에 대한 자료가 인터넷에서는 많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된다.
그럴 것이다. 1992년 책을 출판했을 때는 인터넷 정보가 활성화되기 전이니까 그때의 자료가 없을 것이다. 다시 그때 일을 얘기하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당시의 독자반응을 다시 설명해 달라.
전 5권으로 출판해 2년간 5백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신문들이 그 사이 쉬지 않고 크게 관련기사를 다루었고 방송사에서도 내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인터뷰나 출연 요청이 많았다.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이다. 나도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등단과정을 거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문학을 전공한 것인가?
아니다. 가정학을 전공했다. 결혼 후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자라면서 점점 읽어주는 책에 흥미를 느끼기에 시집에서 위인전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어주면서 직접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쓴다면 읽어준 책들 못지않게 알차고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더욱이 아이가 읽어준 책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해서 그 답변을 만들기 위해 도서관에서 백과사전 등 관련 자료를 치밀하게 조사 수집하고 정리하는 습관도 생겼다. 어느 날 읽어줄 책이 별로 없으니 엄마가 훌륭한 분의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옮겨 전해주겠다고 한 것이 자식과의 약속이었다.

이를 테면 책을 읽어주던 엄마를 어린 아들이 책을 쓰는 엄마가 되도록 동기부여를 해준 셈인데 다산의 목민심서를 소재로 선택한 배경은?
자식이나 젊은 세대에게 전해줄 인물 이야기로 500년 앞을 내다 본 다산 선생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을 했다. <목민심서>는 모든 국민과 지도층이 알아야 할 윤리질서와 지침을 담은 책이었고 다산 선생의 저술을 대표한다고 생각해 <소설 목민심서>로 제목을 정했다. 동서고금의 역사적인 인물을 망라해도 그분 같이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하고 철학과 사상이 깊은 분이 드물다. 귀양살이 19년의 굴곡진 생애였지만 시와 서화에 능하고 풍류도 즐긴 분이 아닌가.

책 읽어 주는 엄마로 살다가 역사소설가로 삶의 전환점을 마련한 황인경 작가와 장남 동균 씨. 아들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책 읽어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실존 인물의 경우 이야기가 많은 분일수록 오히려 책으로 내놓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다.
모르니까 용감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소설을 처음 쓰는 사람이라 겁 없이 덤벼든 것이다. 내가 존경하고 나에게 멘토와도 같은 분이 작고하신 소설가 이청준 선배님이다. 내 소설이 화제에 올랐을 때 그 분을 뵙게 됐는데 자신도 다산 이야기를 준비했으나 워낙 방대해 못썼다고 하셨다.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어렵게 생각하신 것 같다.

<소설 목민심서>를 준비하면서 참고 자료로 암기하다시피 했다는 200여권의 책은 어떤 책들인가?
목민심서를 비롯해 다산시선이나 산문집 등 다산의 저술서적 뿐만 아니라 다산이 살던 시대의 역사 서적과 고문서 야사야담집까지 뒤져 자료를 모았다. 전국의 소문난 고서점이나 헌책방 주인들이 내가 찾는 다산시대의 관련 자료가 입수되면 통고를 해왔다.

솜털기계 발명은 픽션


그렇다면 <소설 목민심서> 내용들은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이야기로 볼 수 있는가?
<소설 목민심서>는 인물전기집이나 역사 서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다산이 실존 인물이므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었다. 다산과 관련한 단 몇 줄의 기록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근거로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구성한 것인데 그럼에도 내용을 대부분 실존 기록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산의 이야기 가운데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부문 중 실존 기록으로 착각할 정도의 내용이라면 어떤 부문인가?
많다. 다산이 과거시험을 보기 전 유기전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솜털기계를 만든 얘기가 나오는데 실제 그가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상상일 뿐이다. 그 시대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역사기록이 있어서 다산을 연관시켰다. 다산이 솜털기계로 돈을 벌어 남을 도와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산은 유배생활 중 딸 하나를 낳았다는 기록이 단 한 줄 남아있다. 어느 것보다 작가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부문이다.
또 신유박해로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흑산도로 귀양 간 형 약전(1758-1816)의 <자산어보>(자산은 흑산도를 지칭. 흑산도 근해의 어류 등 수산동식물 227종에 대해 저술한 한국 최초의 어류생태서)는 원본이 없고 필사본만 남아 있다. 나는 원본이 없어지고 필사본만 남아있게 된 사연을 극적인 드라마로 구성했다. 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눈을 감는다. 뒤에 그의 유해를 선영으로 옮기면서 그의 유품인 <자산어보>원본도 사라진다. 나중에 동생 다산이 성묘 길에서 묘지기 집의 방안 사방 벽에 붙어있는 물고기 그림과 글씨 벽지가 형이 쓴 그림과 글씨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필사본을 만들게 했다는 얘기인데 흑산도 약전박물관 설명문 중에 그 부문을 인용한 내용이 들어 있다.
언젠가 방송국에서 약전의 <자산어보>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그것을 사실로 인용해도 되느냐고 집요하게 물어와 픽션이라고 분명하게 말해 그 부문이 포함되지 않았다. 다산과 약전 형제가 모두 천문, 음악, 의학, 역학에 지식이 깊다는 기록을 살려서 고기잡이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남편이 많아 과부촌이 된 어촌에서 천기를 보고 태풍을 예고해 준다든가, 물고기를 건조 판매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약전의 활동도 쉽게 묘사할 수 있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4형제 중 막내인 다산 정약용은 형인 약현(이복형), 약전, 약종이 모두 천주교신자로 신유박해 때 셋째 형 약종은 순교(처형)할 만큼 가족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년의 유배생활이 다산의 학문적 큰 결실을 낳는 기회가 됐다. 그의 역사소설을 준비하면서 방대한 자료를 통해 접해본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함축해서 소개해 달라. 그리고 <자산어보>를 남긴 약전은 어떤 인물인가?
조선 영, 정조시대의 탁월한 천재 학자였던 다산 선생 형제분들을 두고 역사학자가 아닌 역사소설작가가 몇 마디로 함축해서 소개하기란 조심스럽다. 약전은 동생 다산처럼 학술이나 저술에 깊이 빠지지 않고 술을 좋아하며 호방하게 살다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숨을 죽이며 끊임없이 실학에 몰두한 동생과는 대조적인 면이 많았다.
다산은 인내, 자제, 자중하면서 절약, 절제 정신으로 살았고 농사일에서 차(茶)를 수확하는 일까지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지혜와 실용철학을 전파, 실현하거나 저술로 옮기며 유배생활을 했다. 순조 때 풀려나 고향(경기도 양수리)으로 돌아가 명을 다할 때까지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다. 또 제자를 키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은 분이다.

<소설 목민심서>에 쓴 원고가 200자 원고지 10,000매라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의 분량인가?
쌓아올리면 어른의 보통 키 높이 보다 높다. 10년간 하루 3시간 정도 매달렸다.

작가의 문학적인 소양은 선천적인가?
아버지는 사업가였다. 어릴 때부터 글 솜씨가 있었던 것 같다. 서울 신촌에 살면서 창천초교를 다녔는데 3학년 때 교장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소풍을 주제로 쓴 나의 작문을 읽어주고 칭찬을 하신 일이 있다. 소풍 때 모두가 어머니를 동반했으나 나는 어머님이 아버지 출장길에 함께 가셔서 혼자 소풍을 가게 된 것인데 그로인해 깨달은 부모님의 소중함에 대해 심리적인 느낌을 표현한 문장이 돋보였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속의 은밀한 생각들이 전교생에게 공개된 것이 부끄러웠고 충격을 받아 더 이상 글 쓰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을 좋아해 그림으로 상을 받았다.

<소설 목민심서>는 황 작가가 10년 동안 하루 3시간씩, 200자 원고지 1만매 분량을 쓴 대하소설이다.


성수대교와 이청준


무명작가가 쓴 첫 소설이라면 빛을 보기까지 순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가?
처음에는 연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문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월간지도 무명작가는 지망생 취급을 했다. 여러 곳을 노크하다가 모 신문사에서 관심을 보여 앞머리 200매를 전달했다. 이어서 전체 줄거리를 보내달라고 해서 나는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재미는 있지만 작가가 무명이라며 퇴짜를 놓았다. 10여년의 삶을 쏟아 넣은 원고지 보따리를 들고 헤매다가 속이 상해 순간적으로 차를 몰고 한강으로 추락해버릴 생각도 했었다. 성수대교에서 교각난간을 향해 충돌을 하려는 순간 두 아들의 얼굴이 시야를 막아섰다. 그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범퍼만 찌그러졌을 뿐 무사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 후 숙명여대에서 시행한 장편소설 공모가 있어서 내가 쓴 원고 중 다산의 형 정약전 부문만 떼어내 응모해 차석을 했다. 그 때 심사를 보신 분이 바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었다. 심사평에 내 소설을 저력이 있는 작가라고 크게 칭찬해주셨다. 그 후 명절 때면 찾아가 멘토로 생각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단편에도 관심을 갖도록 하셨지만 첫 작품 때의 창작습성 탓인지 펜을 잡으면 길어져 단편을 쓸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
공모에서 뽑힌 약전의 이야기는 <떠오르는 섬>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고 그 책을 계기로 <소설 목민심서>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밀리언셀러가 된 책이라면 출판계에서는 빅뉴스의 주인공이 된다. 작가와 함께 사라질 뻔한 책의 사연이 드라마틱하다.
제1권이 나오자 서점 판매대에서 불이 붙어 그 독자 열기가 5권까지 이어졌다. 출판사 직원들이 링거를 꼽고 일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 당시 작가의 저작권을 인지로 표시했는데 가족들이 밤새워가며 도장 찍는데 매달리기도 했다. 결국 내 책을 원작으로 12년 전 TV드라마도 만들어져 과거 무명의 상처를 말끔하게 씻었다. 감동적인 일은 또 다산 선생의 정 씨 가문 종친회 후손 어른들이 감사의 표시로 회자리를 만들어 황금열쇠를 전해주신 일이다.

<소설 목민심서>에 이어 계속해서 위인 중심의 역사소설을 발표했는데
<장보고>는 전문지를 통해 신문 연재소설로 시작했고, <고선지>도 친분이 있는 지방신문사 대표의 요청으로 신문 연재부터 시작됐었다. 고선지 장군을 쓰기 위해 여러 차례 중국과 일본 등지의 자료 헌팅을 위한 여행을 해야 했다.

지금 준비 중인 새 소설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 때 표류중인 베트남 난민 96명을 구제해 부산항으로 데려온 전재용 선장의 이야기를 <더 캡틴>이란 제목으로 탈고했다. 그분은 난민들을 데려오지 말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들을 부산항으로 데려와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이다.

이제 글을 읽어주는 엄마가 글을 쓰도록 동기를 만들어 준 두 아드님을 소개해 달라.
큰 아들은 37살로 사회체육을 전공한 후 사업을 하고 있고, 경영학을 전공한 둘째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둘 모두 건실한 사회인으로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가고 있다.

press@interview365.com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