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鉉)위의 보석,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삶.
현(鉉)위의 보석,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삶.
  • 소혁조
  • 승인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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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혁조의 인터미션


[인터뷰365 소혁조] Давид Фёдорович Ойстрах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난 이 글자를 읽을 줄 모른다. 하지만 난 위의 글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다. 위의 글자는 사람 이름이며 구 소련 사람이고 현재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20세기의 음악사에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그 명성을 만천하에 널리 알린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


러시아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만일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살았던 시절로 돌아가 설령 그와 대면한다고 한들 나와 그는 단 한마디도 나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의 음악을 안다. 그가 연주하는 바흐를 알고 모차르트, 베토벤을 알고 브람스를 안다. 다른 어떤 연주자의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들려주어도 난 그의 연주를 정확하게 구별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연주는 나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슴으로 듣기 때문이며 그가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했던 그 어떤 바이올리니스트도 그만큼 나의 가슴을 울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악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영향력이 후세에까지 널리 퍼질 수 있고 비록 말과 글은 통하지 않더라도 그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의 위대함, 예술의 위대함이 아닐까?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로 그 사람도 그가 추구했던 위대한 음악예술이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선전과 선동의 목적으로 포장되어 구 소련 최고의 인민예술가로 한 시대를 호령했던 사람이었다. 그 이름, 너무도 유명한, 언제 들어도 나의 감성을 흔들어놓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이다.


오이스트라흐는 냉전시절의 구 소련이 자랑하는 최고의 인민예술가였다. 당시 소련에서는 자국문화와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뛰어난 예술가들을 서방세계에 연주여행을 보냈는데 오이스트라흐는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엄선된 소련의 훌륭한 음악예술인들은 철의 장막 너머에 소개되어 매끄럽고 부드러운 식의 음악만 들어왔던 서방세계의 음악애호가들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살인적인 기교와 직선적이고 격한 감정을 듬뿍 담은 그들의 음악세계는 확실히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러시아의 흑해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오데사라는 곳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24세가 된 해에 모스크바에 진출, 러시아 바이올리니즘의 대가들 사이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 콩쿨에 출전하여 2위(비예니아프스키 콩쿨)와 1위(이자이 콩쿨)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오이스트라흐가 전 소련을 대표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2차대전이 발발한 직후부터였다. 소련 당국에서는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뛰어난 예술가를 보호하고자 하였으나 나치의 침공이 본격화되었을 때부터 최전방까지 목숨을 건 위험한 연주여행을 다녔고 병사와 노동자를 위한 공연을 많이 하며 그의 명성을 전 소련에 확실하게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42년엔 스탈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이스트라흐가 2차 대전 당시에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소련이 배출한 훌륭한 작곡가들-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프로코피예프 등-의 바이올린 곡을 초연했다는 점이다. 이들 작곡가들의 곡을 초연함으로써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소나타 등의 레퍼토리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었고 러시아의 음악예술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오이스트라흐는 1951년부터 본격적인 연주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체코의 프라하부터 시작하여 동독, 프랑스, 영국 등을 돌며 서방세계의 음악애호가들을 경악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1955년엔 드디어 미국 땅에도 발을 밟게 된다.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열린 그의 미국 데뷔 무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극찬을 아낌없이 받았다.

당시 소련에서 서방세계에 자신 있게 내놓았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바이올린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레오니드 코간, 피아노의 에밀 길렐스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그리고 첼로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지휘자 중엔 레닌그라드 필 하모닉의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등이 되겠다.


그렇게 서방세계에 첫 발을 내딛고 열광적인 인기를 얻게 된 오이스트라흐는 철의 장막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조지 셀과도 협연을 하였고 미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에후디 메뉴인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많은 협연을 하였다. 또한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권역에서도 연주여행을 하며 그의 명성은 전 세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여기서 한 가지. 일본까지는 왔는데 비행기로 2시간이면 오는 한국엔 못 왔다. 지금이야 오이스트라흐가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며 극찬을 거듭하면서 그의 음악을 즐겨 듣지만 불과 20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에선 오이스트라흐를 비롯한 소련 음악인들의 연주 자체를 들을 수 없었고 그저 입소문으로만 그의 존재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몰래 들었더라면 국보법에 위배되어 오랏줄에 철창신세를 졌을 것이다.


오이스트라흐는 단순히 명 연주자, 명 바이올리니스트로 정의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임과 동시에 수많은 제자들을 육성한 교육자였고 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매우 공정한 심사위원으로도 유명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기돈 크래머가 바로 그의 제자이다.


예술인들에게까지 신변의 자유를 속박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고 서방세계에 망명을 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쥔 수많은 예술가들처럼 오이스트라흐에게도 망명의 유혹이 있었다. 그의 친한 친구였던 메뉴인이 그에게 망명을 권유하기도 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은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이스트라흐가 어떤 정치적인 제스처를 강하게 했다는 기록은 볼 수 없다. 오히려 너무 비정치적인 사람이라서 소련 당국은 그에게 무리한 공연일정을 요구했고 이에 피로가 누적되어 과로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바쁘게 연주여행을 다니던 오이스트라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가 사망하기 10여 년 전부터 앓고 있던 지병이 바로 심장마비였다.


66세의 너무 이른 나이에 그가 떠난 후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그는 진정 보석 같은 인간이었다"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 그토록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선율을 들려주었고 겸손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가졌던 교육자였으며 공정한 심사위원으로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던 그는 진정 보석처럼 빛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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