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 떠나 화가로 다시 사는 강현두 서울대명예교수
강단 떠나 화가로 다시 사는 강현두 서울대명예교수
  • 김두호
  • 승인 201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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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인생의 종장이 아니라 제2 인생의 서막이다”

 

 

【인터뷰365 김두호】 생활환경과 삶의 질이 달라진 21세기 우리 시대의 변화는 남녀 평균 기대 수명이 과거보다 20여년 더 길어졌다는 사실이다. 일하는 80대의 미래를 생각할 때 60대는 인생 후반기에 또 한차례 새로운 변화의 전기(轉機)를 맞이하는 시기로 볼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60세 전후 정년퇴직과 함께 직업 활동을 접는다.

정년을 앞두고 전공을 새롭게 선택해 당당하게 서양화가의 길로 들어선 언론학의 태두(泰斗)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75 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이른바 인생 2모작 시대를 개척한 이 시대의 성공한 1세대 모델이다. 그는 라디오시대에서 TV시대로 접어든 1961년 KBS-TV 개국을 준비한 공채 1기 프로듀서 출신이다. 방송 현장의 제작활동을 거쳐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대학 신문방송학 창립 초기의 학자로 참여한 뒤 대중매체와 언론학을 전공하는 후진을 위해 일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그의 제2 인생 설계는 서울대에서 정년퇴직을 몇 해 앞두면서 시작됐다. 연구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일하는 직업을 동경하며 정년을 또하나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생각한 끝에 선택한 직종이 전공과 전혀 다른 분야인 미술이었다. 기초과정부터 배우기 시작해 미술공모전에서 입상작품을 내고 단체미전 참가를 비롯해 전업(轉業) 10년 만에 두 차례 큰 규모의 개인전을 열었다. 풍경화 중심의 수채화에서 작가의 감성과 느낌을 표현하는 인물화로 옮겨가며 독창적인 예술성의 아티스트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대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벽에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강현두’라는 명함은 지금도 언론학 뿐만 아니라 방송 저널리즘과 한국 텔레비전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름이지만 이제 그는 ‘화가 강현두’라는 이름의 예술인으로 신분을 바꾸어 머릿속에 늘 무엇을 그릴지 열심히 그림 소재와 주제를 찾아 여행을 즐기며 살고 있다. 그의 여유로운 삶의 행로에는 아름다운 부인이 동반하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의 내레이션으로 근래까지 건강한 목소리의 스타로 인기를 누려온 성우 김세원 여사(66 전 EBS 이사장)를 곁에 두고 직업을 통해 세상을 두 번 사는 그의 지난 삶을 인터뷰로 정리해 두 차례 나누어 소개한다.

새 직업을 택한 동기

강현두 화백이 지난 2010년 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 작품도록에 고백한 글을 먼저 소개한다. 새 직업을 택한 동기와 배경을 밝힌 내용이다.

<요즈음은 세상이 변해 직장도 자주 옮기고 직업도 쉽게 바꾸지만 예전에는 평생 한 직장만 다녔다. 평균 연령이 길지 않아 정년까지 사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한 직장의 인생도 끝까지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나 정년을 넘어 20년을 더 살 수 있는 시대다. 나는 운좋게 이런 장수시대에 정년을 맞을 수 있었다. 하늘이 내린 보너스 인생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삶을 한번 살아보리라 생각했다. 언론학 교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정반대편에 있는 삶, 예술의 세계, 창작세계의 삶을 살 결심을 했다. 그래서 나는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작업하는 화가의 인생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막상 그림을 시작하니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오랜 직업생활 탓인지 아직 저널리즘의 눈과 사회과학적 마인드로 사물을 보는 것 같다. 이번 전시는 저널리즘 교수로서의 나의 이전 삶과 화가로서의 새로운 삶이 함께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회가 있으면 나는 지구촌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닌다. 사진을 찍고 소통하는 그림을 그린다.>

언제부터 새로운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인가?마음속으로 화가를 결정한 것은 정년을 3년쯤 앞둔 1999년 무렵이다. 본격적으로 연필 쥐는 기초부터 공부를 시작한 것은 정년 2년을 앞두고 한국디지털 위성방송 창립사장으로 갔을 때부터였다. 매주 하루씩 일과를 끝낸 저녁시간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동네 부근의 예술의 전당 문화강좌를 다녔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해서 미술을 선택했다는데 고명한 교수님이 기초반 그림공부를 하려면 주변의 눈치부터 살폈을 것 같다.솔직히 가족에게만 알렸다. 퇴근할 때 비서실 직원에게도 행선지를 밝혀두었지만 나의 그림공부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속성으로 공부해 대한민국 수채화대전, 세계평화미술대전, 목우회공모전을 통해 입상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연보를 보면 그동안 동인전과 단체전,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이 수 백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2004년에는 코엑스 전시장에서 ‘지구촌 풍경기행’이란 주제로 수채화를 전시했고, 2010년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는 ‘인간, 일상 소통’이라는 주제로 인물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선보인 작품은 모두 몇 점이며 그림 소재와 형식을 풍경화에서 인물화로 바꾼 동기는?두차례 개인전에서만 모두 100여 점을 내놓았다. 풍경화는 국내가 아닌 아프리카에서 동남아, 미국 영국 등지를 여행하며 소재를 찾았다. 역사와 문화, 서로 다른 세계인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그러다가 사람에게 다가갔다. 삶의 흔적, 저마다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인간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역시 나는 평생 머릿속에 찍어온 저널리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인물화 작업은 그림을 통한 일종의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는 것이다. 인물의 표현은 쉽지가 않다. 나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는 끝장을 보는 집중력이 있지만 그림은 아직도 어렵다.

이제 친구도 학자보다 화가들이 많을 것 같다.사실 개인전을 서둘러 준비한 것은 내가 새로운 직업을 택했다는 일종의 알림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찾아온 손님들은 대다수 동료 교수들과 방송관계 지인이나 제자들이었다. 굳이 미술인들을 만나야할 이유는 없지만 아직은 이력이 그들 속에 들어가 내가 잘난 척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그림 그리는 명사들과 어울릴 때는 있다.

그림 소재로 선택한 사람은 모두 양해를 해준 사람들인가?인물화는 실물 앞에서 직접 그릴 수도 있지만 사진을 찍어서 그리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허락 받고 그리는 게 예의다. 나는 그림 도록을 들고 다니며 신분을 소개하고 허락을 받기도 하는데 때로는 외국에서 망원렌즈로 담아와 양해 없이 그릴 경우도 있다. 꼭 그리고 싶은데 이야기할 기회가 안 되거나 소통이 힘들 때는 불가피하다. 한번은 일본 여행길에 공원에서 찍은 노인의 모습을 그려 전시회에 내놓았더니 그 인물의 이웃에 산다는 분이 나타나 자신이 너무 잘 아는 분이라고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세계가 좁다는 걸 실감했다. 다행히 그 인물화는 본인의 양해를 받았었다. 허락 없이 그렸다가 초상권 문제를 걸어오면 난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회 도록을 보면 사고 싶은 작품도 많다. 그 동안 팔린 작품은 몇 점인가?판매된 그림도 있지만 헤아려 보지 않았다. 기증을 한 작품도 많다. 나의 모교이고 내가 재직한 서울대 캠퍼스 여러 곳에 나의 작품이 걸려있다. 태안 환경오염 때 자원 봉사자의 인물화와 연암 박지원이 머물렀던 중국 승덕의 풍경화, 시위하는 정신대할머니 인물화 등 주로 시사적이거나 역사적인 인물사진들이 대학과 여성역사박물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강 교수의 전시회 도록. 다양한 얼굴들에 담긴 삶의 이야기가 그의 연륜을 그대로 담고 있다.

 

탈북 소년시절

1937년생이시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다. 까마득한 어린시절 얘기부터 듣고 싶다.나는 평양시내 경제리라는 곳에서 출생해 지금의 초등학교 과정인 보통학교도 시험을 보고 입학했다. 군복 입은 군대식 일본 선생이 송진덩어리인 관솔을 따오라는 시대였다. 그걸 비행기 기름 대신에 사용한다든가. 하늘에서는 B29 미군 폭격기가 날던 것도 보았다. 평양에도 화신 백화점이 있는데 그 앞으로 전차를 타고 지나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전쟁통이라 평북 선천에 있는 외가를 찾아가 김을 매며 농촌에 머물렀던 시기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해방 후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5년제 인민학교를 다녔다. 모란봉극장에서 오영진 작품의 연극 <이순신 장군>도 관람했다. 모란봉 넘어 공설운동장 담 밑에 있던 개구멍으로 출입하며 축구놀이하고 나무에 스크린을 걸어 보여주는 간이극장에서 소련영화와 빨치산 선전영화를 보며 신기하게 생각했던 일, 군중대회가 열리는 공설운동장 뒷문으로 들어가 연설하는 김일성도 보았다. 옆에는 조만식 선생과 소련군인들이 있었다. 재미있게 남아 있는 기억중에는 모란봉극장 옆에 댄스홀이 있었는데 소련군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사교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어린 눈에 비친 김일성은 어떤 인물인가? 가까이서 보았지만 젊은 김일성은 어린 나의 눈에도 사람들이 말하는 초인간 같지가 않았다.

남으로 내려온 시기는 언제인가? 중학생 시절이다. 남북회담차 김구 선생이 북으로 온다는 선전벽보가 나부끼던 때였다. 집안이 부유했지만 아버님이 일찍 별세하시고 가세가 기울어 어머님이 압록강을 건너다니시고 또 서울을 오가시며 장사를 하셨다. 3.8선이 길을 막았지만 몰래 통과할 수 있는 시기였다. 어느 날 서울에서 어머님이 인편으로 외아들인 나를 서울로 불렀다. 3.8선 부근에는 월남하는 사람을 상대로 금품을 탈취하는 산적까지 설치던 어수선하던 때에 나는 학교에 시골 다녀온다는 거짓말을 하고 열차편으로 해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3.8선 근처까지 온 뒤 길잡이 젊은 청년을 뒤따르는 7, 8명의 탈북행렬에 끼어들어 낯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갈대가 얼굴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산길을 헤쳐 가며 남으로 내려왔다.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마른 번개와 천둥소리가 한층 공포에 떨게 하는 가운데 잔뜩 배는 고파서 죽을 지경일 때 철모를 쓴 군인들을 만났다. 영화에서 본 남쪽 국군이었다. 개성이라고 했다. 그게 1948년 가을이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그래서 사선을 넘어 탈출하는 탈북자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서울에서는 북한사람들이 몰려 사는 서울 후암동 해방촌에 살았다. 서울생활은 평양사투리를 쓰는 사람에게는 서러운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북쪽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얼마 후 6.25가 터져 나의 시련은 멈추지 않았다.

 

강 교수가 그린 법정스님, 그리고 어느 시골 할머니의 모습

 

6.25와 4.19 현장에서

 

이제는 6.25전쟁을 겪은 분들의 체험담을 듣는 기회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피난을 가다가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발길을 돌려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숨을 죽이고 지내면서 집단으로 총살당한 경찰가족 등 수많은 희생자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인민군들의 시신도 많이 봤다. 나이가 어린 덕분에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고 전쟁에서 비롯된 참혹한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 휘문고등학교를 다녔다. 천막교실에서 30여명이 국어 영어 체육 사회 과목 정도를 공부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힘든 수업을 받으면서 덕분에 생각하는 힘을 키웠다. 수복이 되어 서울에서 졸업할 때 정치학과에 관심이 있었으나 사회학과 출신인 담임이 사회학을 추천해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지성의 요람이면서 ‘마로니에의 낭만’으로 상징되는 서울 동숭동 문리대 시절에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면?3학년을 1학기를 마치면서 군복무를 하고 1960년 봄 복학했을 때 나의 복장은 군복이었다. 그때는 군복을 물들여 입고 다니던 시절이라 허물이 되지 않았다. 문리대 2층 강의실에서 한우근 교수의 한국 최근세사 역사 강의를 듣고 있을 때 한 학생이 뛰어 들어와 형님들 지금 어느 때인데 뭘 하고 있느냐고 소리쳤다. 이미 교정 밖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뛰어 나가자 밖에는 비무장 경찰을 향해 학생들이 교정 앞의 개천에서 주워 온 돌멩이를 던지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4.19가 터진 것이다.우리는 너나없이 발걸음을 시위행렬로 옮겼다. 회화동의 고교생들까지 합세하고 종로에서 동국대생들이 합세해 광화문에 이르렀을 때는 사방에서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부근 파출소와 소방서 등 관공청을 습격하고 점령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저녁 무렵부터 거리에서 총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부상자를 실은 자동차에 묻은 검붉은 피가 시위대를 걷잡을 수 없이 흥분시키며 서울은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다음날 군인이 등장하고 교수들이 학생지지 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시위가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키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당시 문리대에는 저명한 교수들이 많아 나중에 사회 지도층이 된 학생들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케인즈 경제학이 시들고 진보적 경제관이 관심을 끌었는데 김두희 교수의 강의실은 도강 학생까지 몰려 언제나 북적거렸다. 박종홍 조가경 철학교수, 심리학의 이진숙 교수, 사회학의 이상백 교수, 문학의 이양하 이희승 이숭녕 교수, 이병도 역사교수 등의 석학들이 문리대에서 가장 큰 7, 8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에게 명강의 명교수로 존경을 받았다. 서울대 뱃지 중에서 문리대 뱃지를 달고 다니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강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뽑는 TV 방송요원 모집에 응시, KBS 창립멤버로서 오늘날 방송의 초석을 다졌다.

 

TV프로듀서 1세대

졸업 후 KBS의 TV방송 창설 맴버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1961년 가을 학기에 졸업을 하고 바로 정부기관의 공채시험에 응시해 수백 대 1의 경쟁률에서 1차 합격을 했다. 5.16이 일어난 해인데 알고 보니 채용기관이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였다. 정보요원으로 뽑아 밀봉교육을 시킨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2차 면접에 응하지 않고 포기했다. 이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이름으로 TV방송 요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다.

함께 선발된 공채 1기는 어떤 분들인가?14명인데 9명이 프로듀서 분야이고 5명이 기술직이었다. 지금도 현역방송인으로 남아 있는 홍두표 JTBC 회장을 비롯해 쇼PD로 활동한 황정태, 드라마 연출을 한 신윤생, 이남석, 그리고 보도와 편성 음악 분야에서 활동한 김철린, 이한영, 김용구, 오승호 씨 등이었다.

21세기 인류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영상매체가 영화와 TV인데 우리나라에 텔레비전 문화를 상륙시킨 TV 방송국의 창립멤버는 살아있는 TV 역사로 볼 수 있다. 초기 비화를 들려달라.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끌어가는 5.16 주체세력들이 TV방송에 대해 엄청난 관심과 기대를 걸고 정책적으로 서둘러 개국을 추진하고 재촉했다. 부산에서 민영상업방송 MBC(라디오)가 등장한 뒤 서울에서도 첫 민방 MBC의 개국을 준비하던 최창봉 씨가 차출형태로 자리를 옮겨 TV 창설 책임을 맡았고 프로듀서로 이기하 허규 최덕수 홍의연, 보도국 기자로 유인목, 카메라맨으로 마종훈 신면식 씨 등이 특채 요원으로 개국에 참여했다. 여기에 공채로 뽑은 우리 1기생들이 합세를 한 것이다. 뒤에 삼성전자의 창립공신이 된 강진구 씨도 미군방송인 AFKN에서 일하다가 스카우트 되어 시설설비 책임을 맡은 기술계장으로 참여했다.

TV 시스템에 대한 전문 지식을 습득하는 신입 사원의 교육은 누가 담당했는가?우리 사회가 텔레비전을 못보고 살던 시대라 프로듀서라는 직업의 개념도 잘 모르던 시대였다. 남산에 있는 국제방송의 3층 라운지에서 미군 AFKN TV를 보는 것이 교육이었다. 철필로 긁어 등사판으로 찍어낸 ‘테크닉 오버 텔레비전’(TV기술)이라는 노트 한권씩을 받았지만 실습 장비 시스템이 없는 마당에 이론 교재로는 지식습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계속>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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