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년 효자가문 전통 이어가는 예안이씨 충효당 종손 이준교
5백년 효자가문 전통 이어가는 예안이씨 충효당 종손 이준교
  • 김두호
  • 승인 200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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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엄마’ 살던 안동에 ‘살아있는 원이 엄마’가 있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이준교(66 경북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씨는 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이홍인의 17대 종손이다. 충효의 가문인 예안 이씨 충효당 종손이기도 하다. 그가 살고 있는 종가 건물은 1551년에 건축된 전통 한옥으로 보물 제 553호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옛 우리나라를 일컫던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은 효사상이 근본이 됐다. 왕조시대에는 인륜의 최고 가치를 충(忠)과 효(孝)에 두었는데 한 가문에 임금이 두 개의 정려(旌閭)를 내리고 포상을 하는 충효의 가문은 흔치 않았다.


500여년 풍상에도 쓰러지지 않고 고색창연하게 남아 있는 고택에서 91살 노모를 모시고 아직도 효심을 지극하게 이어가는 예안 이씨 충효당 종손의 사는 모습이 엄숙해 보인다. 중앙경제신문 스포츠레저부장, 중앙일보 월간미술국장 등 언론계에서 활동해온 그의 마지막 직함은 삼성문화재단 문화사업실장이었다.

한층 놀라운 사실은 그의 어머니 안동 권씨(權琪先)가 20대 꽃다운 시절에 남편을 사별하고 마지막 써둔 내방가사의 내용이 1998년 안동사대부 집안의 무덤에서 410년만에 발굴되어 세상을 울린 ‘원이 엄마의 편지’와 같은 사부곡이라는 점이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노모를 모시고 내려와 직접 음식을 차려 올리며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않고 봉양하는 효자에게 왜 효도가 소중한지, 이 시대 효도는 과거와 무엇이 다른가를 물었다. 더불어 ‘살아 있는 원이 엄마’의 또다른 편지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지금 살고 계신 예안(禮安) 이씨 충효당 종가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물로 국가에서 보물 553호로 지정한 고택이다. 함부로 고칠 수도 없어서 그대로 살아야 하는데 불편함은 없는가?

전통 한옥은 현대인에게 편리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여름은 기와지붕이 달아 덥고 겨울은 문풍지가 외풍을 막지 못한다. 방문 출입은 머리를 숙여야 되고 부엌이 통째로 개방되어 있는가 하면 세면시설이 없고 바깥에 있는 화장실 사용은 특히 불편하다.

얼마 전까지 안방도 아궁이에 장작을 피워 난방을 했으나 전기식으로 겨우 바꾸게 됐다. 내집을 내 마음대로 개축하지 못하니 답답하지만 수리하고 보전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받게 되므로 불만은 없다.



전통 한옥의 주거생활이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은 어떤 것인가?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 같다. 집은 가풍을 만들어 낸다. 우리 집은 우람한 솟을 대문도 없고 40여칸으로, 99칸 대가도 아니지만 아늑하고 적은 듯하면서도 넓고 편안한 집이다. 가족들의 성품도 집을 닮아서인지 요란하지 않고 포근한 느낌을 좋아한다.

너무 큰 집에 그 공간을 지탱할 수 없는 가족들이 산다면 그것도 불행하고 허전해 보인다. 집은 작아도 아늑하고 빈 곳이 없어야 행복한 기운이 모인다. 그런 가풍은 가문으로 이어진다. 훌륭한 집안에서 훌륭한 자손이 나오듯이 가풍에서 가족들의 어떤 골격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조상들이 살던 우리의 한옥에는 또 귀신이 많이 산다. 안방에는 잉태 출산 성장을 돕는 삼신 바가지를 모시고, 대청마루에는 집주인을 모시는 성주신, 곳간에는 쌀을 넣어두는 용신(용단지), 부엌에는 불을 다스리는 조왕신, 측간(화장실)에는 측신 등등 곳곳마다 신이 있는데 그 신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보호하고 액을 쫒아내고 집안을 돕는 신들이다.


이 집의 특징적인 옛 건축 방식을 몇가지만 꼽는다면?

본채는 ㅁ자형 민간 주택인데 창틀과 목재 접합에 정교한 목공 기술이 활용됐고 별채 정자까지 8각 두리(원)기둥을 고루 활용한 것도 특색이다. 마굿간이 주거 공간과 연결된 것 등 건축 연구에 많은 특색들이 지적되고 있다. 용인민속촌에 있는 선비집 36호가 우리 집을 모델로 지은 집이다.


정자처럼 지은 별채의 현판이 쌍수당(雙修堂)으로 적혀 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충효를 닦는 집이라는 의미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집을 그냥 충효당(忠孝堂)으로 부른다. 또 따로 효(孝)가 백가지의 근원이 된다고 해서 쌍수당을 백원당(百源堂)으로 일컫는다. 풍산읍내에 가면 예안이씨정충정효각(禮安李氏旌忠旌孝閣) 정려각이 남아 있고 사도세자의 스승인 유정원(柳正源)의 글씨인 체화정(棣,華亭), 김홍도가 그림이 아닌 글씨로 평생 두 점만 남겼다는 담락재(湛樂齋) 현판이 걸려 있는 정자들이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모두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것들인데 충효와 관련한 명예를 기린 유적들이다. 과거에는 한 집안의 영예가 마을이나 그 고장의 영예로 생각해 덕행을 함께 지키고 누렸다.



집안 선대의 충효와 관련한 내력을 듣고 싶다.

17대 직계 선조인 충신의장공 이홍인(李洪仁 1525∼1594) 어른은 조선 선조 임진왜란 6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안동 지역을 왜침에서 막은 분이다. 구담전투에서 전사하신 후 임금이 충신각(정충각)을 세워 공덕을 기리게 했다.

효자는 8대 선조이신 조선 순조 때의 이한오(李漢伍 1719∼1793) 어른이다. 그 분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에 꿩고기를 찾아 산천을 헤매던 어느 날 지친 그 분 앞에 꿩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잉어를 먹고 싶어 하는 어른을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오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그 어른은 “잉어는 안된다. 어른을 드리고 다시 올테니 기다려라”며 자신의 몸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서자 호랑이도 탄복해서 사라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얘기다. 지금 살고 있는 가족은 어머니와 두 분뿐인가?

아내와 3남매 자식들은 교육 때문에 고향에 함께 지낼 수가 없다. 아내도 아이들의 공부가 끝나면 내려오겠다며 먼저 내려가 있기를 원했다. 내가 무녀독남이어서 당연히 내가 모시고 산다. 거동이 편치 못하셔서 잠시도 곁을 떠날 수가 없다.

어머니는 올해 91살이신데 나를 낳으시고 20대에 남편을 여의고 근 70여년을 아들 하나만 바라보시며 혼자 조용히 살아오셨다.


놀랍다. 부친은 어떤 분인가?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오셔서 내가 갓난아기일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없다. 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기억과 어머니의 꼿꼿한 삶의 모습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어른을 모시고 살면 개인적인 활동은 어려울 것 같다.

직장생활과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오면서부터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산다는 생각이 든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사람으로 회귀했다는 착각에도 빠진다. 모든 사고와 행동이 옛 어른들을 생각하며 살고, 때로는 유건 쓰고 도포 입는 것까지 고풍에 젖어 있다. 전국 각지의 서원이나 유림행사, 집안의 제례에 참석하는 일도 쉬지 않고 이어진다. 무엇보다 예안이씨 충효당 종손으로 문중을 지켜가고 길흉사를 돌보는 일이 중요하다. 9월까지 일정이 꽉 차 있다.


제사는 몇 대 어른까지 모시는가?

고조부 어른까지 모신다. 제사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지키기 귀찮은 고리타분한 인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매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분주하게 살면서 한 해에 한두 번쯤은 우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인간의 근원을 생각해 보고 또 모처럼 비록 형체는 없지만 한 조상 앞에 모여 서로 화합하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기회다. 집안과 가문이 해체되어 가는 시대에 그나마 남아 있는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충효사상이다, 충효정신이다 라는 말이 화두가 되지 않는다.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고루한 말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지금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사는 예안이씨 충효당 종손의 삶은 시대에 드문 효행으로 보인다.

회갑을 지난 내 나이에도 어머니가 곁에 계신다는 것만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축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시대의 충은 자신의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고, 효는 부모에게 걱정을 안 끼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효행일 수 있다.



전해오는 예안 이씨 충효당 종가의 유품이나 가보가 있는가?

어머니의 평생은 어린 나이에 당신을 버려두고 떠난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산 한의 세월이다. 남편과 사별하면서 4미터가 넘는 두루마리에 장문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쓰시고 절필 하셨다. 문경에 사는 안동 권씨 집안의 종녀로 예안 이씨 충효당 종손과 혼인해 남편을 사별한 뒤 핏덩이 같은 아들을 곁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쓰셨다는 그 가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글은 18살 때 15살 연하의 아버지와 혼담이 오고간 때부터 철도가 생긴 초창기에 기차를 타고 시집갔던 일, 일찍 남편을 잃고 절망과 슬픔에 빠지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애절한 사부곡이다.


1998년 안동 인근 지역의 무덤에서 410년 만에 발굴된 ‘원이 엄마의 편지’와 같은 성격의 가사문학 같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로 시작되는 그 애절한 사대부여인의 편지 내용이 한동안 해외에서까지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렇다. 우리 어머니가 70여년 전에 쓰신 편지도 동기나 한글 표현 형식이 비슷하다. 또 같은 지역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만하다. 어머니의 편지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자소회가>

어화 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 덕으로 생겼는고

하나님의 덕택으로 아버님 전 뼈를 빌고

어머님 전 살을 빌고 칠성님 전 복을 빌어

하나님 전 명을 빌고 삼신님의 덕택으로

이 세상에 탄생 시켜 마른 자리 갈아 눕혀

진 자리는 엄마 눕고 고이고이 길러낼제

아침 이슬 잎에 굴 듯 봉선화 꽃처럼

삼신님 전 축복 드려 아자 아자 기를 적에

남녀 분간 전혀 없이 자랐구나

어느 덧 십 육칠 세 되었으니 저의 배필 구하려고

동서남북 구혼하여 명문호걸 구한다고

문벌 좋고 문호 좋은 재상가댁 구하려고 동서남북 구혼할제

이씨댁 문벌 좋고 만고기남 두셨다고

호를 듣고 허사왕래 하온 후에

혼인 날자 돈정하니 이월 초파일로 완정이라

백곡필을 필필이 푸재하여 행중석 시답돌개

계수나무 방망이로 오음육 장단 맞춰

거울같이 다듬어서 육척을 비껴 들고

온갖 의복 말라놓고 시양 시침 가는 바늘

가는 바늘 가는 실 꿰어들고 온갖 의복 꾸며낼제

실밥이 간데 없고 바늘 흔적 전혀 없이 하여 놓고

당일이 박두할제 음식을 입에 맞게 장만하여 놓고

당일 요화 하기 바랐더니 일기 풍사가 온전치 못하여

설중에 초립을 무사히 치운 후에 금실우지하고

일낙서산 하니 화촉동방 금병 속에 옥대를 둘러매고

인물병풍 둘러치고 금침을 펴 드리고

샛별 같은 놋요강은 맛치 맛치 밀터리고

원앙에 녹수같이 봉황에 쌍유같이

금실 우지하고 평생사에 맺은 인연

군자의 나이는 십 오세요 소녀의 나이는 십 팔세에

서로 만나 만단정곡 다 못하고 날이 이미 새는구나.

조반을 들인 후에 후행 손님 떠나시는데

어제 오신 새 손님도 간데 없이 헤어지고

용모도 기억지 못 머리를 만져보니

금봉채가 꼽혔으니 이것이 표적인가 하고

그곳을 향망하여 언제나 오시난고 바라고 기다릴제

자주자주 내왕하시니 반가워라

그대 행차 길경치 단첩하고 가을을 당하오니

풍편에 들린듯이 택일지가 오셨기로

살펴보니 시월 십육일로 완정이라

동무야 들어봐라 추상 같은 시댁 영을 가자 하니 가기 싫고

안 가지는 못하리라 한 번 걸음 하고 보면 후일 기약 어찌할고

동무들아 네 올적에 나도 와서 상봉하여

그리던 회포를 낱낱이 풀어 보세

하루 이틀 지나가고 당일이 다가오니

[인터뷰이 나우] 국보로 지정된 안동 풍산의 500년 된 한옥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효자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던 예안이씨 충효당 종손 이준교 씨가 최근 구십 노모를 여의고 슬픔에 잠겨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20여년 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풍산 고택에서 살아온 그는 모친 별세 후에도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종택을 지키며 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준교 씨는 과거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중앙경제 문화부장, 계간미술을 담당하는 편집책임자로 근무한 언론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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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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