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씨의 눈에 비친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이인수 씨의 눈에 비친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 조현주
  • 승인 2009.05.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와이에서 귀국 위해 이발비 아낀 아버지” / 조현주



[인터뷰365 조현주 / 사진 토마스 양]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지만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전 명지대 법대 학장을 그가 살고 있는 이화장에서 만났다.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 당시 참모들과 조각을 논의 했던 작은 전각과 프란체스카여사가 정원을 내다보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곤 했던 당시 모습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했고 종친인 전주 이씨 가문과 협의를 거쳐 친족인 이인수 교수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조건에 맞아 간택이 된 운명적인 부자의 인연이었다. 4.19 학생의거와 함께 경무대(청와대 전신)를 떠나 하와이로 길을 떠난 이승만 부부의 외롭고 절망적인 삶의 끝자락에서 아들로 입적된 이 교수는 이들 부부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고 의지처가 됐다. 하지만 이 교수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일생을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명예회복을 위한 과제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했다. 이 교수는 이 대통령이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역사의 큰 발자취가 독재자란 이름으로 묻혀버린 비애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이날 인터뷰를 하며 화장 곳곳의 소소한 삶의 생활 흔적들을 보며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았던 검소하고 소박한 일상을 작게나마 느낄 수 있었고, 양자이지만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아들 이인수 교수를 볼 수 있었다.



명지대 법대학장에서 퇴임 하신 후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이화장 관리와 아버님의 기념 사업회 등과 관련된 일들이 많아서 여전히 분주하게 보내고 있어요. 이곳(이화장)이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입니다. 구석구석 아버님의 체취와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지요. 해방된 조국의 현대사를 새로 만드신 분이고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던 분이지만 지금은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부각되고 있는 점이 가슴 아픕니다. 건국에 대한 아버님의 정신과 업적 등 발자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 힘이 닿는 대로 잘못된 평가를 바로 잡는 일과 유적, 유품 관리 등에 혼신을 바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된 일입니다만 그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되신 과정부터 먼저 말씀해 주세요. 어떤 인연으로 양자가 되셨나요?

‘무후막대’ 즉, 대를 이을 자손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불효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아버님께서 하와이에 가신 후에 양자를 들일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뜻을 문중에 전하게 됐어요. 전주 이씨 양녕대군종친회에서 생각한 양자의 조건이 있었어요.

첫째는 양녕대군 17대손 중에서(이 대통령이 양녕대군 16대손이고 이 교수가 17대손)찾아야 하고, 둘째는 이대통령이 연세가 많으시니까 나이가 너무 어린 사람은 안 되니(이 교수는 당시 30세)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셋째는 어머니 프란체스카여사와의 언어 소통을 위해서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이 교수는 공군 정보작전장교로 영어에 능통), 넷째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가정 (생가의 아버지가 경기도 양주교육감을 역임한 교육자 집안), 다섯째는 미혼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등 다섯가지 조건이 있어서 이에 부합된 사람을 찾다보니 바로 제가 낙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양자로 가시겠다는 결심은 쉽게 하셨나요?

아니지요.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도 되고 해서 더 좋은 사람으로 하시라고 사양을 많이 했었죠. 그런데 종중의 어른들의 설득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었어요. 권력도 다 떠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어른이 그렇게 소원하시는데 누군가라도 해야 되지 않겠나 하고 또, 네가 결심을 좀 해주면 좋겠다고 하시는 종친 어른들의 말씀에 힘든 결정을 내린 거죠.


4.19 당시 이 교수님께서는 20대 후반이셨을 텐데. 학생시절이면 4.19데모에 혹시 참가하지 않으셨는지요?

데모에 직접 참가는 안했지만 뒤에서 박수는 보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다니고 있었는데 회사가 마침 국회의사당(현재 시의회) 근처에 있었어요. 4월 18일 고려대 후배들이 근처까지 와서 데모하는 것을 보고 저도 뒤에 서서 박수를 쳤었죠. 그때까지는 저도 부정 선거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러셨던 분이 국민들 원성의 한복판에 계시던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가신다는 결정을 하기가 아무래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군요.

그런데, 사실은 4.19 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버님도 모르시는 가운데 3.15부정선거가 일어난 것이고. 그리고 사태를 파악하고 떳떳하게 하야를 하셨어요, 나는 속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책임이지만 맡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심도 평소에 아버님을 존경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양자로 되시고 나서 삶에 변화된 게 있으신가요?

제가 31년생인데,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우리는 나라를 뺏긴 국민이지만 꼭 나라를 되찾을 것이다, 우리에겐 독립 운동가들이 있고 그 중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 박사가 있는데, 우리 일가다 라는 말씀을 들었죠. 그때 이승만 박사에 대해 처음 들었는데. 뵙지는 못했었지만 그 때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뭐. 달라진 게 있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되셔서 혹시 혜택 보신 일은 있는지요? 아니면 피해를 보셨다거나 억울했던 일은 없었나요?

혜택은 무슨, 피해를 봤죠. 내가 고려대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해 대학에 전임강사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안 되었어요. 아버님이 과거 경무대 계실 때 양자로 입적했다면 그럴 리 있었겠어요? 하하하. 세상일이란 게 그런 거에요. 대학에선 괜히 저사람 썼다가 학교가 피해 볼까봐. 그전에 아버님한테 신세도 참 많이 졌었던 분들인데도 참.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이 70년도에 어머니(프란체스카여사)가 돌아오신 후 국내에 더 있을 수가 없어서 제가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혼자 미국에 갔습니다.

한번은 버스 안에서 우연히 전에 다니던 회사 여직원을 만났는데 그 여직원이 나에게 “아니 대통령 양자가 되었는데도 똑같이 버스 타고 다니세요?” 하고 놀라며 물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선 어떻게 지내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뉴욕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받고 8년 만에 돌아왔어요. 대학 근처에 방 하나 얻어 거기서 장학금 받아 공부하고 고생하며 학교 졸업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하와이에 계실 때는 자주 뵈셨는지? 또 임종은 지키셨는지요?

아들로 입적한 지 한 달만인 1961년 12월 13일 하와이에 가서 아버님을 처음 뵈었어요. 그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수시로 하와이를 오가며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아버님은 틈만 나시면 먼 바다를 바라보시며 고국을 한없이 그리워 하셨어요. 한국에 간절히 돌아오시고 싶어 하셔서 귀국할 돈을 만드시려고 얼마나 돈을 아끼셨는지. 심지어는 이발비도 아까워서 하지 않으셨었어요. 그래서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고 준비하셨는데 떠나시려던 날 아침에 박정희정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결국 저만 혼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겉으로는 담담하게 내가 가지 않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가시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그렇게 바라고 바라시던 귀국이었는데 연세가 87세이신 아버님께는 정말 충격이 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나 유품이 있습니까?

이화장이 전부이고, 그 외엔 없습니다.


유지 관리가 쉽지 않을 텐데. 이화장 관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있습니까?

그동안은 정부의 지원 없이 관리해오다가 82년도에 서울시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후 긴급한 보수 정도는 해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적인 사적지로 지정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가 지정하면 격이 올라가고 조금 나은 지원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또 우리 아들도 저와 같은 생각으로 잘 이어가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세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십니다.

특별히 건강에 신경은 안 쓰고 살아요. 젊었을 때부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는데 그게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는 비결인 것 같습니다.


가족은 어떻게 되시나요?

집사람(조혜자 여사)과 아들이 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다 성인이 되어서 자기 몫을 하며 잘 살고 있어요.


미혼 때 양자가 되셨는데 그 후 사모님과 어떻게 결혼하셨어요?

아버님(이승만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셨던 당시 한표욱 주미 공사의 소개로 만났는데, 양쪽 집안을 다 잘 아시는 분이 소개를 해서 믿음이 갔고, 또 만나보니 마음에도 들고 그래서 교제하다 결혼했지요.



부모님과 관련된 추억이나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면 좀 말씀해주시죠.

아버님을 생각하면 늘 기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와이에서 모시고 있을 때 기독교인이셨으니까 식사하실 때마다 기도를 하셨는데 “이제는 저의 몸이 쇠약해져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기오니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영원한 축복을 내려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을 지켜주시옵소서” 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성경의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하셔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게 우리 민족에게 주고 싶은 나의 유언이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겐 나라를 잃었던 불민했던 과거가 있는데 이제 그 소원하고 소원했던 자유를 얻었으니 그 소중한 자유를 잘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 아버님의 단 한 가지 소원이셨습니다.


사모님은 프란체스카여사에 대한 기억들이 많이 있겠군요?

어머님을 만 22년간 한집에서 모시며 세끼 식사 수발을 제가 다 옆에서 했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님은 참 대단하신 분이셨어요. 아버님 살아계실 때엔 건강관리며 모든 것을 다 일일이 챙겨드리더니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님 산소에 일주일에 한번씩 빼놓지 않고 다니셨어요. 손자들에겐 떨어진 내복 손수 기워 입히시고, 애들 먹다 남긴 것 다 드시고, 빨래도 세탁기를 안 쓰고 손세탁하시고. 심지어 가물면 산동네 사람들 물 모자란다고 목욕도 못하게 하셨어요. 그 근검절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모님이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고생이랄 것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시집살이 좀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할머니셨어요. 특히 큰 손자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어쩌다 100점 맞아온것을 갖고 손님들이 올 때마다 우리 손자들이 100점만 맞아온다고 하도 자랑을 하셔서 어찌나 민망한지 어디로 숨고 싶었다니까요. 하하.

그리고 맛있고 좋은 음식만 있으면, 무조건 저와 제 아들에게 먼저 밀어놓으시는, 외모만 서양 분(오스트리아)이셨지 속은 영락없는 우리 전통적인 한국 어머님이셨어요.


부모님의 기념일에 특별한 행사 같은 게 있나요?

올해가 두 분의 결혼 75주년이어서 10월 8일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우리 교포들과 대사관 주최로 기념행사가 있을 예정이고 5월 8일에는 오스트리아 각계의 저명인사들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뮤지션 오십명이 여기 이화장에서 연주회를 합니다.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다과준비를 하고 150명 정도 되는 한국에 사는 오스트리아인들 모두가 참석하는 아름다운 음악회가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이 아닌 정치학과 교수로서 이승만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한마디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작품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정선거다 4.19다, 말하지만 어떤 위인에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반드시 얘깃거리가 있는 거고, 그것을 크게 포장을 해서 그게 마치 저분의 인생 전체모양인 양 하는 게 저는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큰 인물일수록, 또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고 완성된 작품이 아닌 이상 결점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현대한국을 만든 메이커를 제대로 공정하게 판단해서 그 분을 제대로 알고 진실을 아는 게 우리 국민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고 그 분을 낮게 평가하고 폄하할수록 우리에게도 마이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대통령은 정말 순수한 한국인이십니다. 그 어른은 내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교육을 8년간 받았던 영향으로 한국인으로서의 당당한 정체성을 갖추지 못했던 저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셨고 제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저를 정신적으로 부활하게 하신 어른입니다. 저는 한국인이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른이 한국인을 대표할 자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조현주
조현주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