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들이받고 죽으려 했던 황손 이석
경복궁 들이받고 죽으려 했던 황손 이석
  • 김두호
  • 승인 2009.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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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마지막 손자의 사랑과 방황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히트가요 <비둘기 집>의 가수 이석(68)은 고종황제와 귀인장씨 사이에 태어난 의친왕(1877∼1955)의 아들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마지막 황제 순종이 태어났고, 의친왕보다 스무살 어린 영친왕은 고종과 귀인엄씨 사이에 태어나 일본왕실의 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해 외아들 이구 씨를 두었으나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이석은 남자로는 마지막 생존해 있는 고종황제 가계의 3세가 된다. 무너진 왕조의 허망한 역사와 비애를 대변해온 대한제국 황제의 혈육이다. 그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 61세 되던 해, 경복궁에 인접한 관훈동의 사동궁(寺洞宮)에서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궁녀들의 시중을 받는 왕자마마로 자란 어린시절이 잠시 스쳐갔을 뿐, 생애 대부분은 정처 없는 역마살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찰생활과 이민생활, 반복해온 사랑과 이별, 가난과 고독···. 그의 삶은 아홉 차례나 자살을 기도하는 험한 역정이었지만, 그러나 어디에서든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는 풍류와, 쉽게 마음을 주고 사랑에 빠지는 열정적인 로맨티스트이면서 인정에 약한 휴머니스트이다.


고희를 눈앞에 둔 그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인생은 꿈이다”라고.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옛말 그대로를 뜻하는 한마디였다.

전주이씨 왕가의 본향인 전주시의 배려로 2004년 전주시 한옥마을에 승광제라는 정처를 마련하고 전주대 교양학부에서 역사 강의도 맡아 전주사람으로 살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탓인지 또 서울을 열심히 오르내리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는 여의도 63빌딩 뒤편에 있는 리첸시아 빌딩의 모린와인빌리지에서 늦은 밤 와인을 마시며 시작했다.


여전히 젊고 건강하신 것 같다. 흰 머플러에 화이트 컬러의 의상도 멋지시고 얼굴에 전혀 고생하신 티가 안 느껴진다.

하하하. 건강하다. 미국 가서 살 때 흑인 강도들에게 시달린 탓인지 협심증이 좀 있긴 하지만.


심장질환인 협심증보다 대인 공포증일지 모른다. 그런데 무슨 곡절로 흑인 강도에게?

미국에서 정략 결혼한 사람과 점포를 운영할 때 강도가 13차례나 쳐들어왔다. 복면도 했지만 주로 흑인이었고 마지막에는 한국어가 튀어나오는 동포강도까지 만났다. 쌍권총을 차고 지켰지만 일일이 맞싸울 수가 없었다.


미국으로 가서 살게 되신 동기에는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가?

황실가족들과 함께 청와대에 인접해 있는 칠궁(七宮)에 살다가 1979년 10.26 사건 후 새로운 군부세력에 의해 그곳을 떠나야 했다. 모든 것이 답답하고 화가 나서 그해 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배우 최무룡 씨도 만났고 한동안 노래를 부르며 지냈다. 3개월 비자로 갔으니 곧 불법체류자가 됐다. 로스엔젤리스에 사는 최 씨 여성을 만나 한인회장의 권유로 결혼했지만 영주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만남이었다.


영주권 때문이라면 실제 결혼생활은 하지 않으신 건가?

그 사람도 나의 불가피한 처지를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서로 애정을 느낄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미국 체류가 가능해지면서 30여개 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알래스카까지 갔었다. 우리 동포들이 사는 곳을 다니며 느낀 것은 사업을 해도 중국 등 다른 민족과 달리 우리 동포들은 서로 화합이 잘 안된다는 점이다. 이유를 모르겠다.


1989년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귀국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10년 만에 돌아왔다. 미국시민권을 버리고 와서 국적을 재취득했다. 귀국 후 6년 쯤 사업도 하고 잘 살았다. 참치집으로 돈도 벌었지만 IMF 때 힘들어졌다. 그 뒤 중이 되고 싶어 강원도 월정사를 찾아갔다. 그곳은 세조대왕이 조카를 죽인 업보인지 나병에 걸려 있을 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병을 고쳤다는 곳이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신 건가?

아니다. 월정사는 50살이 넘은 사람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영축산 통도사로 갔다. 그곳은 아버지(의친왕)의 도움을 받았던 절이다. 그곳 월하스님이 세상이 싫으면 들어와 살라고 하셨다. 통도사 자장암에서 2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앉아서 불공을 올리면 정신이 부처님에게 가지 않고 자꾸 주변에 앉은 여자들 쪽으로 흩어지니 어찌하면 좋습니까?”하고 말씀드렸더니 절을 떠나라고 하셨다. 월하스님도 오래전 별세하셨다.

그 길로 환속을 하신 건가?

통도사 암자에서 다시 김해 육주사로 옮겨 6개월 더 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선지식이 많고 사주 주역에도 밝고 다방면에 해박한 정다운 스님을 만났다. 그를 따라 서울에 있는 수국사로 옮겨왔지만 술 마시고 돌아가면 문을 안 열어 주니 찜질방에서 지낼 때도 있었다.


왜 그토록 스님이 되고 싶었는가? 정다운 스님은 당신의 운명을 어떻게 풀이하던가?

인생이 허무해서다. 가진 것도 없고 마땅하게 의지할 곳도 없고. 정다운 스님은 언젠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기다려 보라고 하더라.




이제 가족 얘기로 돌아가자. 아버지 의친왕에 대한 생전의 기억을 들려 달라.

다 알려진 얘기지만 아버지는 일곱 분의 여자 사이에 13남 9녀를 두었다. 그중 셋째 딸인 누님 한분이 6.25 전쟁 때 미국으로 건너가 사시며 현재 콜롬비아 도서관에 근무하신다.
아버지는 61세 때 궁중에서 전화교환원으로 있던 19살 어머니(남양 홍씨)를 후궁으로 받아들여 1941년 8월에 관훈동에 있던 자신의 사동궁에서 나를 낳으셨다. 그 무렵 상해 임시정부에서 아버지를 모셔가려했는데 중국에 가셨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경동중학 시절까지 사셨다. 6.25 피난시절도 함께 겪으셨다. 간혹 나와 마주치면 취중에 “내가 몇째냐”고 물으셨고, 아침에 일어나면 “굿모닝 영길”하고 영어로 말씀하셨다. 내 어릴 때의 아명이 영길이다. 아버지가 지어 주셨다.
아버지는 체격도 건장하고 성격도 호방하고 힘도 장사셨다. 팔씨름은 당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세 살 때쯤 성북동에 있는 별장인 성낙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셨고 내 밑으로 네명이 더 출생했다.



의친왕은 영친왕과 달리 정략 결혼을 끝까지 거부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고 직접 참여했다.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도 추진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소환 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대한제국 마지막 권력의 혼돈기에는 특파대사로 해외를 전전했고 19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5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몰락하는 왕조와 함께 격렬한 시대의 변혁기를 온 몸으로 겪으며 풍류로 고독을 달랜 풍운의 황태자였다.



여러 차례 자살 기도를 하셨다는 얘기도 많이 알려져 있다.

아홉 번이다. 마지막에는 내가 주로 살다시피 한 서울 서초동의 H찜질방에 유서를 남겨두고 타고 다니던 고물 코란도를 몰고 경복궁 정문을 들이받고 죽으려고 생각했다. 1999년 찬바람이 불던 새해 초였다. 죽지 않을 운명이었는지 차량이 제대로 작동을 안해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사는 것이 그토록 힘들다고 느끼시게 된 때는 언제부터인가?

27살 때 어머니가 51세로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로 황실에 들어가셨지만 제대로 궁에 머물 수 없었던 어머니는 명륜동에 따로 사시기도 하셨고 나중에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며 가족을 뒷바라지하셨다. 어머니 별세 후 동생 넷을 거느린 가장이 되면서 사는 게 더욱 힘들고 복잡해졌다.


한때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도 히트시킨 인기 가수였고, 방송에서 사회자로도 바쁘게 활동하지 않았는가? 황실 집안에서 자란 분이 어떻게 연예계로 발을 들여놓으셨는지 엉뚱하다.

경동고를 졸업하고 외국어대 스페인어과에 다니던 시절에 음악감상실에서 개최한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베사메무쵸>를 불러 1등을 했다. 시계가 귀하던 당시 고급 사발 시계를 타기도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종로에 있는 음악감상실 DJ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장 대우가 좋다는 은행원이 3천원 받을 때 4천5백원의 월급을 받았다.

노래에 자신감을 가진 나는 1960년대 초 미8군 공연제작사가 공개모집한 신인가수 오디션에 참가했다. 그 자리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불러 미국인 여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 6명이 ‘원더풀’을 합창하며 합격시켰다. 사실 DJ로 음악 속에 파묻혀 살며 200여 곡의 노래를 외워 신곡은 꿰고 있었다.


가수로 타고난 가창력과 성량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 디스크 쟈키를 한다고 모두 노래까지 잘 부르지는 않는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창덕궁을 거쳐 다녔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궁녀들이 도시락을 학교까지 가져다주었다. 자유당 정부 시절도 창덕궁을 개방하지 않을 때 나는 마음대로 그 후원에서 혼자 놀며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목소리가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노래를 시작해서 방송을 타게 되자 그때까지 생존해 계셨던 윤대비마마(순종황후)가 우리 어머니를 불러 황손이 어찌 광대가 됐느냐고 통곡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64년 그 분이 별세하면서 오히려 나는 연예계에 흥미를 잃었다.


잘나가던 가수였다면 왜 일찍 안정된 생활기반을 갖지 못하셨나?

결혼생활의 실패가 반복되면서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힘들게 살았다.


첫 결혼은 누구와 언제 하셨나?

29살 때 한양대 디자인학과 3년생인 독고 성을 가진 여성과 결혼했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주례를 서고 가수 최희준 씨가 사회를 맡아 화려하게 올린 결혼식이지만 딸 하나 낳고 헤어졌다. 돈 문제와 술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어느 날 “내가 때리고 싶을 정도면 헤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고 1년 만에 결별했다.


그후 만난 분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분은 어떤 분인가?

이방자 여사(영친왕비)를 모시고 1975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미모의 일본여성을 만났다. ABC방송의 직업 아나운서였다. 그는 조종사인 남편이 사망해 7살짜리 아들과 살고 있을 때 나를 만났다. 내가 돌아가지 말고 함께 그곳에 살기를 간절히 희망했으나 나는 일본 여성과 결혼할 수 없는 내력을 밝혔고 또 국내에는 함께 사는 여성이 있었다. 나를 잊지 못해 서울까지 찾아왔지만 되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한번 결혼하면 불만이 있더라도 참고 견딘다. 자식을 낳게 되면 한층 헤어지기가 쉽지 않다. 후회하신 일은 없는가?

불가에서 인연을 두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굳이 잡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서로 고통을 느끼며 사는 것은 짐이 되지 않는가? 물론 나도 참을 때까지는 참는다. 내방에는 아버지의 유필인 참을 ‘인’(忍)자가 걸려 있다. 그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지만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어깨에 부상 입고 상이용사로 귀국했던 일은 보람 있는 시기였다. 논산훈련소와 강원도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군예대 요원으로 활동했는데 3년이 넘는 젊은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겪은 이야기만으로도 오늘 밤을 새워야 한다.


꿈이 있으시다면?

인생이 꿈이다. 지난 것도, 다가오는 것도, 모두 꿈이다.

외교관이 되어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 외국어대를 갔는데 연예인이 된 것은 정말 내 의지보다 우연이었다. 지금 나는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를 맡고 있다. 대학에서 특강을 하면서 가요무대에 나가 노래도 부르고 있고, 전국 음악 투어도 추진하고 있다.

구 황실가족에 대한 배려가 따른다면(그는 모종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방자 여사가 못다 이룬 특수학교인 명휘원과 자혜학교를 돕고 싶다. 사회를 위해 봉사와 기여활동을 하고 싶은 것이 남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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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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