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탈공연예술촌 촌장 된 김흥우 교수
국제탈공연예술촌 촌장 된 김흥우 교수
  • 서영석
  • 승인 2009.03.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작업은 100살까지 계속된다”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 바다가 보이는 육지의 남단 끝자락에 버려져 있던 조그마한 폐교가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예술의 공연 및 자료관으로 바뀌었다. 전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김흥우 교수가 평생을 모은 예술 공연 자료를 기증하면서 그곳에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이 건립된 것이다. 정년 퇴임후 한동안 근황이 궁금하던 노교수는 예술촌 촌장이 되어 있었다.


예술촌은 예술창작과 연구를 돕기 위한 전시관, 도서관, 실험극장을 갖춘 다목적 공간이다. 2만여 점의 연극 영화관련 전문서적, 세계 각 나라의 탈 700여 개, 영상자료 3천여 점, 공연 팸플릿 4천여 점, 포스터 3천여 점, 각종 미술품 500여 점 등의 자료를 소장하여 예술적 창작영감을 일깨우고 공연예술 체험의 지평을 넓히는 나눔의 마당으로 유비쿼터스 시대에 맞게 운영될 종합예술촌이다.


서울에서 5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남해에는 따사로운 봄 햇살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잔디가 파릇하게 올라오는 운동장 너머로 쪽빛 바다가 손에 잡힐 듯 발밑에서 넘실댄다. 하회탈의 모습과 관음보살을 연상케 하는 온화하고 포근한 인상의 김흥우 교수는 한국 연극계의 거목이기도 하다. 연극영화과 교수협의회 회장, 연극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여전히 한국희곡작가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공연 현장에서 200여 편의 기획과 제작 작품을 남겼고 교직에서 40여년을 봉직해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와 한국연극계의 산역사로 불리는 분이다.



참 아름다운 곳에 계시는군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서 와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너무 공기가 맑고 물이 좋아서 다시 청년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삽니다.


먼저 연극을 시작하신 초기 시절의 이야기부터 들려주시지요.

가난이 가져다 준 직업이죠. 6.25 전쟁 당시 워낙 경제가 어려워 교회에 다녔어요. 옷이나 신발 등 구호물자를 얻으려 한미종합기술학교에서 운영하던 교회를 다니다 우연히 교회극에 참가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의 직업으로 이어졌지요. 크리스마스 이브나 부활절 때 공연을 했는데 내가 각본을 쓰고 연출, 의상, 소품까지 도맡으며 출연까지 하며 연극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어요. 특히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역은 내가 독점을 했지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1기생으로 당시 시대상황에서 연극영화과 지망이 쉽지는 않았을텐데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을 하고 싶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황우금화학연구소에 조수로 취직을 했지요. 거기에서 돈을 조금 벌어 닭을 키워 돈을 더 모으고 3년 후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연극영화과 진학도 어쩌면 운명이었어요. 교회에서 한참 연극에 빠져 있을 때 유치진 선생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1959년에 동국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생기니 조금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결국 동국대 연극영화과 1기로 입학을 하게 되었어요.


학생시절부터 연극 공연 현장에서 꿈을 키우셨군요.

대학시절부터 줄곧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당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지만 연극을 전공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여유가 있었지요. 공연에서의 조명이나 영화의 스탭으로 참가하여 짭짤하게 학비에 보탤 수 있었어요. 또 드라마 센터의 조명실에서 조수로 1년을 지내기도 했지요. 거기에서 지금 유덕형(서울예대 총장)이라는 젊고 유능한 인재를 만나기도 했지요.


지금도 연극인들은 열정으로 살지만 생활이 여유롭지 못합니다.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은 연극활동이나 연극공부가 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고생도 많으셨지요?

당시에는 연극에 대한 자료들이 전무하다시피 했어요. 공부를 하고 싶어도 서적이나 자료가 없어 쩔쩔맸어요. 선배들의 경험담만으로 연극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동료들이 생활고로 방송으로 갔을 때, 나도 외모가 그럴듯했으면 배우를 해서 방송으로 갔을지도 모르지만.(웃음) 나는 연기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연극에서 내 입지를 생각했어요. 책을 모으자. 연극에 관련된 책이나 자료, 공연물에 대한 모든 것들을 모을 수 있는데 까지. 그런 부분들이 나를 지탱해준 중심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어요. 한 때 생활고로 탈선(?)을 하기도 했지요. 1964년 대학 졸업 후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해 당시 기라성 같던 선배(정민, 복혜숙, 김진규, 도금봉 등)들과 함께 공연을 했지만 먹고 살길이 너무 막막해 극단을 탈단하고 교육신문사에서 근무 했어요. 하지만 연극이 천직이었든지 1965년 현대문학 2월호에 희곡 <일그러진 얼굴>이 추천되어 작가로 등단을 하게 되어 다시 연극에 발을 디디게 되었어요.

신문사를 떠나 몇몇 극단을 전전하다 1966년 원방각 재건에 합류, 1972년까지 기획 제작을 도맡아 했어요. 대표는 이광재였지만 기획, 제작을 하다보니 전체 운영을 하게 되었어요. 1973년에는 젊은이들과 연극을 하고 싶어 극단을 신협으로 옮겨 선배들 뒷바라지를 하며 ‘르네상스극장’을 1년간 운영하기도 했어요. 그 시절에는 연출이나 배우가 취미 생활이 많았어요. 연극으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 기획, 제작이지 그저 이리저리 돈이나 융통을 하던 기억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연극예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보니 얻어서, 꾸어서 하기 일쑤였고 관객이 조금 들면 빚 갚기에 정신없었죠.




200여 편의 공연 제작을 진두지휘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극단 에저또’에서 공연했던 <무덤없는 주검>(샤르트르작/신상용 연출)이 자주 생각납니다. 대표였던 방태수씨가 미국으로 잠깐 유학을 가는 바람에 대신 공연을 맡아했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났지요. 돈을 자루에 퍼담을 정도의 대성황이었어요. 검열에서 어떻게 통과가 되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공연이었는데 당시 군사정부의 긴장된 사회분위기가 오히려 관객을 극장으로 몰려들게 했어요. 입추의 여지없이 전회 매진에 입석마저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관객들 때문에 저녁 공연이 끝난 후 늦은 시간에 임시로 한번 더 공연을 해야했던 진기록도 만들어졌지요.


아직도 독신생활을 하시는 것으로 유명하신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연극을 하면서 생활이 안되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지금까지 왔지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돈이 조금 생기면 여행, 전국의 장터를 누비며 자료모음, 국내나 해외의 축제에 따라다니다 보니 결혼자금 마련하기가 힘들었어요. 남들처럼 아픈 사랑의 상처 따위는 거리가 멀어요.


공연 현장에서 대학으로 가신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마, 처음 강사로 시작한 것은 1967년 성신여대였어요. 국문과에서 희곡론, 연극개론, 연극사를 주로 강의했는데 당시 대학원도 졸업하지 않고 강의를 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이 분야에 인재가 없다보니 특혜를 받았다 할까요? 동국대는 장한기 교수가 휴식년 때 조교를 하면서 대타로 1년 강의를 한 것이 인연이 되었어요.


강의를 하시면서 일화도 무척 많았을텐데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많기에 이름을 거명하기는 그렇고, 젊은 나이에 여대에서 강의를 하다보니 자연 겪는 일도 많았어요. 당시 연극이 여대생들에게 절대적 호감을 받던 시절이라 강의가 주로 여대에 편중돼 있었지요. 성신여대를 비롯해 동덕여대, 덕성여대, 한성여대 등을 옮겨다니며 바쁘게 보냈어요. 특히 기억이 남는 일화라면 성신여대에서의 학과별 단막극 경연대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와 학생들의 수업의욕을 돋궈주기 위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극작을 겸해 단막극 축제를 열었지요. 학생들이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과 배우를 도맡아 하면서 스스로들의 기량을 연마할 수 있도록 강의를 했어요. 이것이 10여 년 동안 학생들의 호응을 얻게 되어 유행처럼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전기가 되었지만 당시 시국에 대한 예민했던 학교와 당국에 의해 강제로 폐지가 되었어요. 학생들의 데모에 민감했던 시절이라 학생들이 모이는 자체를 금지했던 시기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학생으로는 정경순(영화배우)이 있었지요. 성신여대 가정과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새마을 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던 것을 기회로 영국 유학을 하고 배우로 활동을 하고 있지요.


희곡도 많이 발표하셨지요?

30여 편의 희곡을 썼지만 공연에 올려진 작품은 불과 10편 정도입니다. 기획을 맡다보니 당연 내 작품에 대해서 소홀할 수밖에 없었죠. 또 내 작품의 경우 실험성이 짙은 작품들이라 흥행에는 불투명해 공연에 선뜻 자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200여 편의 공연을 하면서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며 후진 양성에 더 신경을 썼어요. 이용우, 김창하, 김성민, 황동근 등 수 많은 연출가와 배우, 희곡 작가들을 배출했다는 점에 더 자긍심을 느낍니다.


일전에 교수님 작품으로 단막극제를 하셨는데?

그거... 5편을 공연했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연출과 생각의 차이랄까? 내 희곡과 거리가 많아 씁쓸했지요. 작가가 추구했던 포인트를 연출들이 살리지 못해서겠지요. 요즘 연출들은 특성이 없어요. 그저 흘러만 가서는 절대 좋은 연출이 될 수 없어요. 유학을 했든 국내에서 전공을 했든 학교에서 이론을 공부하고 현장에서 실기 기량을 갈고 닦아야 되는데 졸업이나 유학 후 배운 지식으로 바로 연출을 하니 문제가 클 수 밖에요. 연출하려면 진짜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연극영화과 교수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셨는데 현재 연극영화과 교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적당히 배워 현장 경륜을 쌓지 않고 연출과 강의를 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연극영화학 교수는 이론과 실기 경륜을 쌓아서 학생들 앞에 서야 합니다. 젊어서는 공연 현장에서 예술과 씨름을 해야지요.

외국 유학은 한국 연극의 미래를 위해서 바람직하지만 제대로 유학을 하고 왔는가에 대해선 많은 의문이 갑니다. 덜렁 학위 하나 받아와서 국내 예술의 흐름도 모르고 연출 현장도 모르면서 강의를 한다거나 연출을 하는 현실이 너무 황당하지요. 특히 유학파에 있어서 현장수업은 필수입니다. 젊은 시절, 혈기를 현장에서 갈고 닦아야 됩니다. 한창 배워야 할 시기에 현실에 안주하여 강의에만 논을 돌리면 유학의 의미는 퇴색되고 맙니다. 학교나 유학에서 배운 것들을 현장과 접목시켜 나름대로의 안목을 잡아야 합니다. 현장에서 10년 정도 기량을 연마한 후 교수는 40대 중반 부터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극 영화 교수와 다른 전공학과의 교수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꼽을 수 있는지요?

교수도 예술가도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교수도 예술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인격적으로 공부와 수양이 되었을 때 비로소 교수가 가능하겠지요. 비록 연극 영화를 전공하더라도 동서양 철학 지식도 꿰고 있어야 기본이 아닐까요? 연극은 순수한 예술을 하는 작업이라 철학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기능인이나 앵무새처럼 달달 외워서 하는 강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한국의 연극영화과 학계는 체계가 잡히지 않았어요. 학생 머릿수 채우기에 골몰하지 진정한 스승을 고르지 못하는 재단이나 학교에도 문제가 있지만 교수들 스스로에게 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누가 뭐라든 자리만 잡으면 철밥통으로 생각하고 학교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수들이 어떻게 예술 인재를 제대로 키울 수 있겠어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희곡작가협회 회장으로서 한국희곡의 문제점을 지적하신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우선 테마가 약합니다. 인간의 근본을 다루는 작품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예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할까? 작가나 연출이 관객을 따라가서는 어렵지요. 신변잡기 같은 가벼운 공연에만 몰두하다보니 예술이 사라져버렸어요. 미래는 사이버 시대입니다. 대사보다는 동작, 춤이나 노래 등에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합니다.

물론 연극이 놀이에서 출발했다는 절대성을 외면해서는 안되겠지만 유비쿼터스에 대비해 현재의 뮤지컬과는 다른 우리의 토속적 춤과 음악과 이야기를 디지털문화에 맞도록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작품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옛날의 혼례나 장례 장면들을 삽입시켜 한국 특유의 의식을 다루면 좋겠지요.



40여 년을 강단에 계셨는데 정년퇴직으로 막상 학교를 떠나신 기분은 어떠신지요?

앞을 내다보는 생각들이 너무 얕은 경우가 많아 안타까워요. 후학들을 위해 평생을 모은 자료들을 모교(동국대학교)에 기증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안쓰러웠어요. 받아줄 시설이 없어 포기했고 결국 스스로 이 먼 곳에 옮겨올 수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지방의 특색을 살리고 많은 분들의 관심과 애정이 따르면 다행일 수도 있어요. 정년퇴직을 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후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결별했다는 생각이 안들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흐뭇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으니 외롭다거나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거리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료를 검색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수많은 공연 포스터 자료는 거의 촬영을 마쳤고 프로그램과 다른 자료들의 촬영을 준비하고 있어요. 비디오를 미래에 맞게 DVD로 전환도 해야 하고 또 20,000여 권에 이르는 책의 목록 작업과 사진자료, 직접 찍은 것과 모은 것들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 하려면 최소한 5년 이상은 걸릴 겁니다. 또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한국희곡전집의 발간입니다. 일본의 경우 6, 70년 전 이미 세계희곡전집, 일본희곡전집이 발간되었는데 우리는 100년의 연극사를 지니고서도 이런 희곡집이 없다는 것은 문화후진국으로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집 발간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은 현실이라 마음만 바쁩니다.


국내 희곡 작품 중에 아끼는 작품이 있으신지요?

한국을 대표할 만한 희곡이 없어요. 물론 대표적 작가들은 있습니다만 ‘이것이 한국을 대표한다’라고 내세울만한 희곡?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이근삼씨 초기 단막극들이 시선을 모을 수 있겠고, 이광재씨의 단막극들을 좋아합니다.


끝으로 연극영화를 지망하거나 전공하는 후학들에게 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연극이란 인간이 인간을 묘사하고 표출하는 작업이다 보니 가장 먼저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연극은 너무 삭막합니다. 또 어디서 사는 가에 대한 고찰도 많이 고려해야 합니다. 땅과 하늘에서 기운을 받아야 수양도 되고 감성이 풍부해 지지요. 도시에 살더라도 땅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곳이 으뜸이겠지요. 지형적 선별에서 예술적 기운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또 여행을 권하고 싶어요. 인생 자체가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훗날 가장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생각과 동시에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따지다 보면 여행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까요. 무조건 출발하면 됩니다.

여행을 통해 인간들의 삶과 자연과 역사를 느끼고 배우게 됩니다.



연극영화학의 이론적 토대와 공연 예술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온 노교수는 캠퍼스를 떠났지만 여전히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아 나섰다. 평생 모은 자료를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자신의 작업 일정을 100살까지 넉넉히 잡아두고 있다.

눈을 감는 날까지 후학을 생각하고 예술을 생각하며 일하겠다는 김흥우 교수의 삶은 지금이 시작인지도 모른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관심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