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19)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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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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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여배우의 꿈 / 유지형




(19) 유리


[인터뷰365 유지형] “헉헉...”

월화는 숨이 턱 까지 차오른다. 그는 벌써 저만치 커다란 돌 바위를 향해 오르고 있다. 그를 따라 가야 잡아야 한다. 좀 전에 공연한 내기를 했다.

“저 앞에 보이는 바위까지 우리 누가 먼저 가나 내기해요.”

“그야 응당, 내가 앞서지 않겠소.”

“나도 등산 정도는 자신 있다고요.”

“좋아! 그럼 무엇에 내기에 걸까?”

“산에서 내려 갈 때 진 사람이 업고 내려가기.”

“허허.. 점점 가관이로군. 그럼 해봅시다.”

승희는 빠르게 산길을 오른다.

“아이... 그렇게 빨리 가면 어떡해요?”

분명 월화가 지는 내기가 틀림없다. 그러나 앞서서 성큼 성큼 걷는 저 남자의 젊고 씩씩하고 활달한 뒷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북한산 칼날 바위 위로 둥근 보름달이 훤하게 떠오른다. 승희는 이제 그 달 속으로 걸어간다. 묵묵히 두 다리에는 온통 힘에 가득 차 있다. 월화도 힘을 내어 달빛에 물든 산길을 더듬으려 낑낑 산위로 오른다. 금방 숨이 차고 온몸은 이미 땀으로 가득 젖었다. 월화는 더욱 힘을 내어 승희의 뒤를 따라 산길을 오르고 있다.

공연이 끝나고 승희는 월화와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원래 등산을 즐겨하는 승희는 연극 연습과 공연 때문에 한동안 산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야간산행이다. 오늘은 보름달이 훤히 떴으니 야간산행을 하기에는 안성마침이다. 더욱이 월화가 등산에 동행하니 둘이서의 산행은 마냥 즐겁다.

공연과 함께, 월화는 언제나 승희의 눈빛을 따랐다. 승희 역시, 단원들의 눈을 피해 월화의 눈빛을 늘 의식하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은 눈빛은 서로를 향해 빤짝이고 한쪽이 눈짓을 해 올 때는 두 사람은 어두운 무대 막 뒤로 찾아가 사랑을 불 태웠다. 그러니 산행 정도야 월화가 따라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월화는 산에 오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정말 몰랐다. 왜 남자들은 이렇게 힘든 산행을 자처해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월화는 지쳐 산길에 쓰러지며 승희를 향해 구원의 소리로 외쳐 댄다.

“나.. 더 이상 못 가겠어요. 기.. 기권이에요.”

월화는 등산장비로 챙기지 않은 스커트 차림이다. 요행 단화를 신었기 때문에 망정이지 굽 높은 하이힐을 신었다면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다.

월화는 맨발으로라도 산에 오를 여자이다. 더욱 처음 산행이라 숨이 차고 맥박이 빨라지고 목이 마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허긴 여기까지 올라온 것 만해도 다행이다. 월화의 외침소리를 승희가 들었는지 승희가 바쁜 걸음으로 산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물.. 물 좀 줘요.”

승희는 허리에 찬 수통을 꺼내 월화의 입에 대어 준다.

벌컥 벌컥 물을 다 마신 월화는 죽겠다는 듯 엄살을 부리더니

“아니.. 여자가 내기를 하자고 그렇게 냅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건 숙녀에 대한 예의가 통 빵점이네요?”

그 말에 승희는 사람 좋게 웃으며...

“그래, 산에는 왜 따라 나섰어? 아직 중턱도 못 왔는데.”

“바늘 가는데 실도 따라 가야지. 안 그래요?”

이젠 제법 물도 마시고 숨도 고른 월화는 살았다는 듯 다시 일어난다.

“이번엔 내가 이길 테니 두고 봐요”

월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산길을 바쁘게 앞장서나 곧 몇 발작도 못가고 다시 숨이 차 헉헉 거린다. 그런 월화를 승희가 다가 와 손을 잡아 준다. 그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 댈 정도이다. 손이 이 정도라면 그의 심장은 더 뜨겁게 요동을 치겠지. 이제 두 사람은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승희가 월화의 손을 잡아끌고 당기고 밀고 하는 다정한 산행이다.

정상에서 보는 만개한 보름달은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달을 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월화는 달빛에 물든 달맞이꽃처럼 상기된 얼굴을 승희의 땀에 젖은 어깨에 살포시 기댄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정말로 아름다운 순간이다.

두 사람은 보름달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눈다. 승희가 앉아 있던 넓은 바위위에 월화를 눕히고 땀에 젖은 옷을 벗긴다. 월화도 승희의 옷을 벗기며 그의 품에 깊숙이 안겼다. 울퉁불퉁한 바위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원하고 서로를 주고 서로를 받았다.

산의 정상, 그것도 사방이 구름으로 펼쳐진 바위위에서 그들이 서로가 바라던 바람을 마치 한 쌍의 노루나 꽃사슴처럼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서로의 모든 것을 놔 눴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멋쩍은 듯 그 크고 환한 보름달도 어두운 구름 사이로 숨어든다. 두 사람은 그 보름달이 질 때 까지 바위와 한 몸이 되었다. 그제야 서로의 몸에서 떨어진 두 사람은 바위에 알몸을 스치고 다쳐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것을 알았다.

더욱이 월화는 등 뒤가 툭 튀어 나온 바위의 돌출 부분으로 하여 움푹 붉게 파져 있다. 또 한, 승희도 양 무릎이 허물을 벗듯 까져 피멍까지 들어 있다.

“허허.. 신성한 산행 길 못된 짓을 했으니 산신이 노한 모양이야.”

“더욱 노하시게 한 번 더 할까요?”

“졌어! 내가졌다고..”

월화의 진담 같은 농담에 승희를 손을 훼훼 내 젓는다.

새벽이 되어 산을 내려오며 이번엔 승희는 월화를 업어 주기 까지 한다.

호사가 넘쳐도 너무 넘치는 호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월화는 왠지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무겁지 않아요?”

“무겁긴 새털처럼 가벼운데.”

“아이... 그런 거짓말이 어딨어요? 새털이라니?”

월화는 마냥 기분이 좋다. 승희도 신이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해댄다.

연극에 미친 사람 아니랄까봐 온통 극단과 연극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이다.

“다음 공연은 말이야. 독일작가 마이어 푀르스터의 하이델베르크를 올리려고 해”

“하...이..델 베르크가 어떤 연극이에요?”

“유럽의 어느 나라의 왕자님이 이웃나라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을 오는 이야기야. 이 왕자님은 카페에서 일 하는 가난한 소녀 캐디를 사랑하게 되는 아주 재미있고 아름다운 연극이지.”

“그럼, 그 캐디 역은 누가 하나요?”

“그건 당연히 월화지 누구겠어? 난 왕자님이고 말이야 하하?”

월화는 지금 마치 왕자님의 등에라도 업힌 느낌이다.

그 느낌은 하산을 하고 연극공연이 계속 되면서도 당분간 지속 되었다. 또 다른 연극의 여주인공 캐디를 꿈꾸며 또한 승희에 대한 사랑의 꿈도 함께 꾸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시작되어 산행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사랑은 벌써 오래전 단원들의 눈에 목격되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랑은 축복이 아니라 비극으로 다가 왔다. 단원들 사이에 이상한 풍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좋아해 받자지?”

“곧 동경에서 결혼하기 위해 돌아온다며?”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니?. 그것도 동경 유학을 마친 권세 있는 부잣집에 영애(令愛)란다.

그녀의 이름이 장세숙이라는 것 까지... 이런 귀띔을 해준 건 신입단원으로 입단한 복혜숙 이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월화는 두렵거나 겁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지금 현재의 사랑이 중요하다. 그 사람은 지금 이 시각에도 날 사랑하고 있고 나 역시 그 사람을 사랑한다. 더 이상 뭐가 겁날 것인가?

그런 두 사람의 사랑에 처음으로 제동을 걸어온 건 뜻밖에 이서구 이었다.

저녁 공연이 끝나자, 이서구가 월화에게 할 말이 있다며 극장 옆에 있는 한 카페로 불러냈다.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요?”

“그냥 같이 차나 한잔 마시려고?”

서구는 당황하며 얼른 여급을 불러 차를 주문한다.

“뭘 마실까? 난 홍차.”

“나도 같은 걸 마시겠어요.”

홍차가 나오는 시간이 지루하도록 그는 말이 없다. 분명 용건은 확실한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그 자신도 난감한 모양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 하세요”

“역시 월화는 화끈해서 좋아. 모든 세상 여자들이 귀양만 같다면 세상은 정말 천국 일거야. 하하...”

사람 좋은 이서구는 막상 할 말을 못하고 괜한 말을 해댄다.

“용건을 말씀하시라니까요?”

“저... 잘 알고 있겠지만 승희 이야기 인데...”

“승희씨가 어쨌다는 거예요?”

“이제 그만 승희를 놔 줘..”

“뭐라고요? 겨우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나요? 그리고 뭘 놔줘요? 누가 잡았나요?”

월화는 속사포처럼 쏘아 대었다. 그런 월화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던 서구도 이왕 말을 꺼냈으니 끝을 보겠다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알다시피... 승희에게는 약혼녀가 있잖아?”

“그래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 사랑한다며 나를 꼬여 내었나요.”

“솔직히 승희에게만 잘못이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럼 내가 그를 유혹 했다 그 말인가요?”

“누가 누구를 유혹했든, 누가 누구를 사랑했든, 그게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앞으로 더 큰 문제가 야기 된다는 것이지.”

“그건 우리 두 사람 문제예요. 서구 씨가 나서서 말할 게재가 못되죠. 물론 친구인 승희 씨의 부탁을 받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승희가 괴로워하고 있어. 그 친구는 그런 괴로움마저도 스스로 감당치 못한 사람이라는 걸 월화도 잘 알 텐데..”

“그래서 울기라도 한답디까? 가서 전해요. 난 절대로 이 사랑을 포기 할 수 없다고..”

그러자 이서구가 간절한 눈빛으로 월화를 바라보더니

“난 월화와 연극을 계속 하고 싶을 뿐이야. 그건 극단 단원들 모두의 바람이야”

‘아니? 내가 박승희와 사귀는 것과 연극과 무슨 상관이 있담 말인가? 나뿐이 아닌 남들도 막 뒤에 숨어 사랑을 나누지 않던가? 김명순의 애인도 고등 재판관이며 주지사 역을 맡은 마슬렌니코프의 임노월이 아니던가? 임노월! 그 사람은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라던데?’

그런데 왜 두 사람의 사랑만 금기 하는지 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테이블에 놓인 두 잔의 찻잔은 누구의 입도 대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월화는 더 아상 서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카페를 뛰쳐나왔다.

사랑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 역시 내가 좋고, 그래서 맺어지는 단순한 행위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사랑의 행위에 조건과 수식을 붙여 복잡하게 만든다. 난 지금 이 순간도 그를 사랑한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그 이상 복잡한 것은 싫다. 월화는 다시 공연이 끝난 불 꺼진 극장 안으로 찾아 들어 갔다. 역시 승희는 무대 뒤 막 뒤에 홀로 서성이고 있었다.

월화가 다가가자 승희는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릴 뿐이다. 그러더니 겨우 입을 연다.

“미안하오.”

“미안하다니? 뭐가요?”

“내 언젠가 말 하려 했지만, 용기만 없어 말하지 못했소.”

“그럼, 지금 다 말하세요.”

“그녀와 나는 서로 집안이 맺어 준 사이라오. 물론, 그녀도 나도 서로 장래를 약속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럼, 이제 어떡하고 싶어요?”

“미안하오!”

“미안하다는 말은, 나와 관계를 끊고 싶단 말인가요?”

“...........”

더 이상 승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무언의 표정에서 월화는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 그는 겁에 질려 있다. 곧 그녀가 돌아온다니 이 부질 없던 사랑이 들통 날 경우, 그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월화가 어떻게 행동 할지, 그게 무섭고 겁이 난 승희 이었다. 다음날부터 승희와는 서먹한 관계가 시작 되었다.

월화는 무대 위에서 대사도 더듬고 동선도 재 멋대로 이다.

결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무대에만 서면 다리에 힘이 없고 쩌렁쩌렁 극장 전체를 울리던 목소리도 작아진다.

그런 월화의 행동에 당황하는 것은 승희이다. 그저 월화의 눈치나 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뿐, 그 어떤 주장이나 말 한마디가 없다.

그런 승희의 무저항의 태도에 월화는 이제 오기 같은 것이 생긴다.

오늘도 낮 공연을 한 시간이나 앞두고 무대 위 소품으로 갖다 놓은 소파위에 길게 누어 괜한 시위를 해 본다. 마침 무대장치를 다시 꾸미는 중이어서 미술부원들은 소파에 누워 거치적거리는 월화를 꼴사납게 보지만 감히 월화에게 누구도 말을 못하고 가슴만 친다. 결국 참다못한 안석영과 함께 미술을 맡은 이승만이 다가오며

“월화 씨! 낮잠을 자려거든 분장실에 가서 자도록 하오. 공연시간 전 까지 무대 장치를 완성해야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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