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해역 가스전이 가자 사태 불렀다
가자해역 가스전이 가자 사태 불렀다
  • 김우성
  • 승인 200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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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문가 유달승이 말하는 중동의 오해와 진실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지난 2004년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발생하자, 아랍어가 불가능한 외교부 협상단이 급조돼 현지로 날아가는 촌극이 연출됐다. 김씨 사건을 계기로 아랍어 구사가 가능한 대사급 인력이 국내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협상인력의 부재가 가져온 예견된 비극이라는 비판이 대두됐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우리는 '아프간 선교단 사건'까지 겪으며 사태를 신속히 파악하고 현지와 소통 가능한 전문인력의 부족을 더욱 뼈저리게 체감한다. 당시 일본이 축적한 현지 네트워크와 정보력을 바탕으로 배명규 목사 피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것과 극명히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한국외대 이란어과 유달승 교수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중동정치 전문가다. 한국에서 중동정치학 석사과정을 마쳤던 1992년, 그는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신분으로 반미국가였던 이란으로 간다. 그리고 6년 뒤 테헤란 국립대학교는 그에게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하며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최초의 외국인 박사'라는 타이틀을 달아준다. 그런 연유로 미국 하버드대 중동연구센터는 그를 연구교수로 초빙했는데, 날선 적대 관계에 있던 두 나라를 두루 경험했다는 점에서 유 교수의 이력은 빛을 발한다. 풍부한 중동정치 지식과 남다른 분석으로 일간지에 연재 중인 <유달승의 중동이야기>는 독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연말부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자 사태, 그리고 앞으로의 중동정세에 대한 전망을 들어보기 위해 유 교수를 찾았다.
어눌한 듯한 말투의 유 교수는 세세한 통계치까지 정확히 제시하며 중동을 둘러싼 전후상황을 흥미진진하게 풀어갔다.

 

 

중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요.

중학교 3학년 때 TV에 나오는 호메이니의 모습을 보면서부터입니다. 부모님도 주위에서도 서구교육을 강조하고 서방을 따라가자고 하는데, 자신의 것을 고집하는 그들이 희한했습니다. 다들 한 방향으로 가는 때에 전통적 복장과 차별화된 삶을 살며 다른 길로 간다는 게, 의문점이 점점 동경심으로 변하면서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지요.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란으로 가게 된 겁니다.

 

이란에서도 드문 경우였을 것 같은데요.

(서구의 시선에서) 이슬람 혁명의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란에 가지 않게 됐죠. 제가 이란에 간 뒤로 중국 일본에서 학생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드문 사례로 공부한 덕분에 미국까지 가게 됐죠. 미국의 교수나 학생들은 이란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했거든요.

 

멀리서 온 이방인에 대해 이란 측에서는 호의적이었나요?

처음에는 쉽지 않았어요. 최초의 한국유학생이다 보니 정보당국에서 신원조회는 물론 인터뷰까지 했었고, 또 이란이 워낙 반미국가였던 데다가 전공도 정치학이다 보니 혹시 스파이 가 아닌가하는 의심도 있었지요. 하지만 이내 편해졌어요. 이란이라는 나라가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이 있거든요. 물론 중동전역 유목민의 문화적 특성이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국가의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외국인에게 배려해주고 관대해주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택시타고 가다가 운전사 아저씨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곤혹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 선뜻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란으로 건너간 초기에 겪었을 문화적 충격이라고 한다면 어떤 게 있었나요.

제가 밤잠이 적어서 항상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쭈그리고 자는데 어떤 학생이 저를 깨우더니 '불편한데 왜 여기서 자냐. 사원에 가서 자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신성한 곳에서 어떻게 낮잠을 자냐고 되물었더니 '신성한 곳 이전에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사원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상당한 문화적 충격과 함께 종교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어요. 이란의 사원에는 한구석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 또 한구석에는 낮잠을 자는 사람, 다른 구석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아요. 사원에는 또 계단이 없어요. 누구나 편히 드나들 수 있게끔 만든 것이죠. 이슬람이 강조하는 게 평등사상이잖아요. 아무리 큰 권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신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그런 부분이 사회 곳곳에 있어요.

 

비슷한 일화가 많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소개해주시죠.

테헤란 대학에 처음 갔을 때 학과장을 만나는 자리에서 청소부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학과장에게 불만을 얘기하는 모습도 충격이었어요. 우리의 경우 직장 안의 상사는 직장 밖에서도 상사인데, 거기서는 직장 안이라 하더라도 자기주장을 명확히 밝히고 직장 밖에서는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받는 겁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한국 상사주재원과 현지인들 간의 예를 봐도 그래요. 직장에서는 부하였던 현지인들이 밖에 나가서 한국인 상사에게 '너와 나는 동등한 관계다'라고 했을 때 불화가 많이 발생하죠.

 

혼자 지냈을 테니 생활하는 게 쉽지 않았겠는데요. 먹는 거라든가...

유학생활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물가가 상당히 싸요. 거기다가 이란은 교육지원혜택이 많아요. 원래 테헤란 대학 학생은 전원 학비가 면제였어요. 지금은 국가 재정상태가 안 좋아져서 학비를 면제받는 학생과 기부 입학생, 이렇게 두 부류로 선발하고 있는데 저는 교환학생이어서 면제였죠. 또 학교 안에서 운영되는 식당은 외부 식대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음식을 줘요. 그래서 주로 학교에서 식사를 많이 했고요. 먹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전혀 없었어요. 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아무 음식이나 잘 먹거든요.(웃음)

 

 

 

 

 


현지인들과는 활발히 교류했나요?

이란 사회에 동화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요. 당시 유학생은 저 혼자였지만 기업체나 공관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의외로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이란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러 왔기 때문에 한국인들과의 만남은 되도록 갖지 않았어요. 가끔씩 대사관 만찬에 초대되어 가면 대사님이 저를 옆자리에 앉히고 힘들게 공부하니 한국음식 마음껏 먹으라며 격려해 주셨는데, 한국음식을 먹고 나면 배가 아파서 일주일동안 고생을 했어요. 한국음식은 마늘이 많이 들어가서 자극적인 반면, 이란음식은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유학생활 중에는 거의 이란음식만 먹고 생활했죠.

 

지금도 이란에 있을 때의 지인들과 친분을 유지합니까.

종종 한국에 초청하기도 하는데 주로 제가 많이 가죠. 일 년에 한 번씩은 갑니다.

 

가자지구 얘기로 넘어가보죠. 해를 넘기며 전세계의 이목이 가자지구로 집중돼 있었는데요. 우선 가자지구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궁금하군요.

'가자'는 아랍어로 "강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는데요. 이곳은 중동 분쟁사에어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바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중심지이거든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됐는데, 그와 동시에 가자에서의 팔레스타인 저항운동도 시작이 됐어요. 또한 1987년 '제1차 인티파타'라는 팔레스타인 무장봉기가 시작된 곳도, 이번 전쟁의 또 다른 주역 하마스가 탄생한 곳도 바로 가자입니다.

 

가자지구를 가리켜 '하늘만 열려있는 거대한 감옥'이라고들 표현합니다. 왜 그렇게 불리게 된 건가요?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군이 2005년 철수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철수한 이후에도 가자지구의 영공 해상 육상 통제권을 주장합니다. 그러던 중 2007년 6월, 하마스가 가자를 장악하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전면봉쇄가 시작되는데요. 이 정책으로 가자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생필품뿐 아니라 전기와 수도조차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언론에서는 감옥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감옥에서도 학살은 자행되지 않죠. 가자 주민들은 감옥보다 못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하면서도 강력한 봉쇄정책을 취한 이유가 결국 하마스 때문이라는 건데,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나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2006년 1월에 열린 팔레스타인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수많은 외신과 이스라엘 전략분석가들은 당연히 친서방 온건파 '파타'가 강경파 '하마스'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팔레스타인 집권당이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죠. 총 132석 중 76석을 차지한 하마스가 집권당이 됐어요. 이번 이스라엘의 가자침공 명분이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이었는데요 가자봉쇄는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는 강경파 하마스의 제거, 내지는 무력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봉쇄가 시작되면서 가자 주민들은 상당히 많은 고통을 겪었죠.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책임이 점차 하마스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입니다. 이스라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하마스를 무력화시킬 수 있지만,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내부 분열을 목적으로 파타-하마스 대립구도를 고착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번 침공으로 하마스의 전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킨 후, 다루기 쉬운 파타의 정치기반을 강화시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중동평화 협상을 추진하겠다는 거죠.

 

팔레스타인 민심이 하마스에 표를 줬던 이유는 뭔가요. 바꿔 말해 ‘고난’의 소지가 적을 수 있었던 파타에게 등을 돌려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60년대에 창설된 파타의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역사는 사실 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외에서 망명정부 형태로 혁명운동을 지지해왔어요. 파타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아라파트인데요.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친서방 팔레스타인인들과 손을 잡는데, 그 중 대표적 인물이 압바스입니다(후에 아라파트에 이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된다). 한마디로 파타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무장투쟁이나 저항운동을 할 때, 즉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의 주역은 아니었던 겁니다. 거기에 더해 파타는 오랜 망명생활을 하고 돌아와 자치정부를 수립한 이후 부정부패 혐의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파타와 하마스 간 갈등구조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나요.

내전을 벌였었죠.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예상 밖으로 하마스가 압승을 거두자 파타는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고 정부구성에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대립구도가 점점 확산되다가 2007년 결국 내전이 발생했죠. 그리고 2007년 6월, 가자지역을 하마스가 장악하게 된 겁니다. 현재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서안지구는 파타가 통치하고 있는데 반목의 골이 무척 깊고, 가자 복구사업문제로 다시 대립하고 있습니다.

 

복구사업이요?

가자를 복구하는 데 있어 서구의 지원, 그리고 복구의 주체를 두고 또 대립하고 있어요.

 

하마스의 영향력이 소멸되도록 파타와 갈등구조로 만들겠다는 이스라엘의 전략이 현실화되고 있네요. 팔레스타인 전체로 볼 때는 무척 치명적이겠습니다.

그렇죠. 내부의 적이 무서운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은 국제적 비난여론이라도 받고 있지만, 파타는 아무런 여론을 받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서안지구의 상황은 어떤가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가 어떻게 다른지, 서안지구에도 가자사태와 같은 불씨가 있는지요.

가자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가자지구와 달리 서안지구에는 아직까지 유대인 정착촌이 있고, 확대되고 있지요.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분리장벽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2002년 6월부터 서안지구 곳곳에 분리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이는 상당히 엄청난 사건인데, 그 지역에 있던 팔레스타인 가옥과 농토가 일방적으로 몰수되고,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해서 마을과 마을 사이 이동의 자유도 제한받고 있습니다. 서안지구를 가보지 않고는 그 상황을 이해 못합니다. 특별한 사유 없이 검문소가 막히면 출산을 위해 병원에 가다가 검문소에서 낳는 경우도 허다하고. 일상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지역이죠. 인권 차별 정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기나 물 공급을 통제하지는 않기에 가자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처참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곳입니다. 유엔은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을 불법이라고 규정했지만, 장벽은 계속 설치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진짜로 원하는 것

 

하마스라고 하면 흔히 '강성테러조직'을 연상하게 됩니다. 앞서 정당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정확한 실체가 무엇입니까.

하마스는 1987년 1차 인티파타 때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발생한 2차 인티파타의 과정을 주도합니다. 자연스럽게 반이스라엘 저항운동의 상징단체로 올라서죠(1차 인티파타 1천4백여 명, 2차 2천9백여 명의 팔레스타인인 사망). 그렇게 자살폭탄공격과 같은 무장투쟁을 주도하면서 이슬람 테러조직 혹은 무장단체라고 불리게 됐지요. 그러나 이는 하마스의 단면만 본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선에서 승리한 합법적 집권정당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공격의 주된 원인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것 때문이라며 세계 언론을 통해 주장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주장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있어요.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휴전 협정할 때 하마스의 대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마스도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만, 이후에 하마스의 정책이 변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강조하지 않고 있어요. 하마스 창건의 주도적인 인물이 아하메드 야신인데, 2003년도에 일명 '야신독트린'이 발표됩니다. 이 독트린에서 가장 중요한 게 팔레스타인 국가설립의 영토를 주장하는 부분인데요.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 가자, 그리고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로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이 원래의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약 22% 정도에 불과해요. 이것은 하마스가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스라엘과 공존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변화에 대해 서방언론은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죠.

 

 

오랫동안 국가 없는 민족으로 살며 독특한 복장과 종교의식 등으로 지역사회와 융화를 이루지 못하던 유대인들은 차별과 억압이 심해지자 19세기 후반 국가설립운동을 본격화한다. 고대 유대인들의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 한 유대민족주의 '시오니즘'이 그것이다. 20세기 초 유럽 각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몰려온 시온주의자들은 도시 및 농촌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자치조직을 완성하는 한편, 고유의 문화와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한다. 팔레스타인 내 시온주의자의 수가 점점 늘어가자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며 영국의 정책에 강력 반발한다. 영국은 아랍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도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 창설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아랍인과 시온주의자들의 긴장이 극에 달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일임한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 및 유대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며 팔레스타인 영토의 55%를 유대인 국가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에서 유대인은 30%에 불과했고, 토지는 겨우 6%만 차지하고 있었다. 이듬해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결국 아랍과 이스라엘 간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더 많은 영토를 아랍으로부터 획득했다. 이후 팔레스타인에서의 분쟁과 갈등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자지구는 어떠한 특수성이 있을까요?

과거에는 수에즈 운하와 관련해 (가자가 속한)시나이 반도의 중요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자의 지정학적 의미는 크게 변했다고 봅니다. 1999년 11월 <브리티시가스그룹>이라는 영국회사가 당시 아라파트 수반과 향후 25년 간 가자해역 원유 및 천연가스 탐사권에 대한 협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해인 2000년에 가자지역 두 해역에서 1조 입방미터에 해당하는 매장량의 가스전이 발견됩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 지역이 새로운 자원의 보고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이 가스전이 발견된 후 <브리티시가스그룹>은 이스라엘과 다양한 협약을 맺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초 협약내용에는 이 가스전을 이스라엘 남부도시 '아시켈론'으로 연결하는 수송로 사업을 추진했었는데 가격에 따른 이견으로 협상이 결렬된 거죠. 그리고 이듬해인 2001년 이스라엘은 가자해역의 천연가스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이 협상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침공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지요.

앞서 설명한 아시켈론이란 도시는 가자 해역 천연가스 송유관과 카스피해 유전을 연결하는 송유관이 건설된, 이스라엘로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최근 '제2의 중동'이라는 카스피해 유전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는데 2006년도에 일명 'BTC' 송유관 사업이 개통됐죠.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T), 터키 항구도시 세이안(C)을 의미하는 이 사업은 카스피해 자원을 유럽으로 보내기 위해 3국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007년 6월 이스라엘이 가자 봉쇄를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터키와 이스라엘간 새로운 송유관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BTC 송유관을 또 세이안에서 아시켈론으로 연결한다는 내용인데 문제는 이 아시켈론이 하마스의 로켓포 사정거리 안에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아직까지 가자 북부지역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이유는 바로 아시켈론을 전략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주목적이 있는 것이죠. 이렇듯 이번 침공은 가자의 에너지 지정학이 부각된 사건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 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 자체가 이번 침공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는 말이군요.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작전명이 '캐스트리드(Cast Lead)'인데요 약 6개월 전부터 입안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캐스트리드는 '하누카'라는 유대교 명절의 팽이놀이를 말합니다. 기원 전 164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던 걸 기념하기 위해 성전을 쌓았는데, 이 명절은 그때 성전 쌓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입니다. 영토확보 기념행사인 것이죠. 따라서 캐스트리드라는 작전명이 의미하는 것은 영토 확장과 관련한 문제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가자 해역의 자원, 또 그 자원의 중요한 수송로인 아시켈론 지역 보호를 위해 가자 북부의 영토를 보다 확장시키는, 이런 다양한 목적이 이번 전쟁에 관련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반미 이슬람강경파가 중동 주역으로 등장할 것

 

일각에서는 이스라엘 총선을 전쟁의 주요인으로 분석하기도 하던데요.

전쟁에는 주요 목적이 있고, 다양한 전시적 이해관계 획득부분이 있지요. 그 중 하나로 이스라엘의 국내 정치요인을 들 수 있어요. 2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카디마당과 노동당의 연립내각 지지율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밀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올메르트 총리는 지난해 9월 부정부패 혐의로 사의를 표명, 차기 정부가 구성되기까지 임시총리직에 불과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으로 이스라엘 민심이 흔들리면서 극우 강경파인 리쿠르당 네타냐후 전 총리의 경우 국방장관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어요. 가자 침공은 이러한 이스라엘 국내의 다양한 역학관계, 표심잡기 전략과도 무관치 않았습니다.

 

오바마가 당선되자 이스라엘이 보란 듯이 위기를 조성했다는 분석도 있고요.

오바마 정부가 새로운 실용협력외교를 지향한다지만, 대테러전쟁을 포기한 건 아닙니다. 이제 부시의 전쟁이 오바마 전쟁으로 바뀌고 있는데 오바마의 대테러 전쟁 주요 전선축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입지약화가 예상되는 상황이었죠.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이집트를 항복시키고 시리아를 초토화시켰으며 팔레스타인 전역을 장악했습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3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67년 이후 미국의 대이스라엘 원조규모가 4백%나 증가합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직접 지원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런데 2006년 레바논전쟁에서 ‘전쟁불패’의 신화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상대로 군사적으로 승리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무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불패신화가 무너지자 미국 이스라엘 동맹관계에 불협화음이 나타났어요.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대테러전쟁 전선축마저 이동할 경우 중동평화 문제가 미국의 핵심사안에서 제외될 것을 우려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고였다고도 볼 수 있죠.

 

오바마 정부의 대응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요.

이번 전쟁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비난여론 때문에라도 오바마는 팔레스타인 문제, 중동평화 부분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보여집니다. 실제로 오바마는 당선자 신분으로 "취임 즉시 중동 특별 팀을 구성하겠다"라고 천명한 바 있고, 취임 직후에는 중동지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본격적인 중동외교를 추진하게 됐죠. 향후 오바마 외교정책의 중요한 핵심과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가 다시 제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들어서 알고 있는 게 미국 주류사회에서 유대인들의 영향력입니다. 실제 어떤 형태로 발휘되고 있나요. 또한 이번 전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지요.

미국에서 유대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차기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소문이 있어요. '미-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는데, 지난해 6월 오바마가 이곳에 가서 "이스라엘의 안보는 신성불가침이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사회의 유대인, 정확히 유대계 미국인들은 경제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등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때문에 미국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다시 말해 미국은 이스라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압력단체에 의해서 좌우되는 사회가 결코 아니거든요. 다양한 압력단체가 있기 때문에 유대계의 압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정책결정까지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서 규정됩니다. 다양한 아랍 국가를 지원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하나를 지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죠. 중동이 미국에게 중요한 건 석유 때문인데 안정적 석유자원 보호를 위해 그 지역의 안보, 질서유지, 그리고 강성단체나 미국이 지목한 테러리스트 제거를 손에 피 안 묻히고 이스라엘이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가자 사태를 계기로 중동 정세에 예상되는 변화가 있나요?

이미 아랍세계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6일 카타르의 제안으로 도하에서 아랍정상 긴급회의가 소집됐는데 이집트와 사우디가 불참하면서 반쪽짜리 정상회담이 되었었죠. 나흘 후 쿠웨이트시티에서는 가자사태와 관련해 아랍정상 경제회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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