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애인’ 신일선
‘조선의 애인’ 신일선
  • 김다인
  • 승인 200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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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으로 일약 스타덤에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영희 역을 맡은 신일선에 대해 고(故) 미당 서정주 시인은 1974년에 쓴 에세이 ‘가을이면 생각나는 영화’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나서며 처음으로 본 우리영화 <아리랑>의 몇몇 장면들이다. 눈나리는 광야에서 무성의 몸부림으로 절규하는 나운규와 윤봉춘의 사나이다운 모습, 그들 사이에 이쁘게 댕기를 땋은 긴 삼단머리채를 나풀거리던 곱다스런 처녀 신일선양의 흰 저고리와 껌정 통치마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아리랑> 개봉상영을 보던 때는 내 나이 아직도 틴에이저의 여드름을 새로 단 고등보통학교 시절로 “야 신일선양 한번 꼭 만나봤으며 좋겠다”고 남몰래 혼자 얼굴 붉히며 생각하곤 했던 것인데, 그 신일선양을 내가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그때가 아니라 그로부터 한 30여년이나 지난 뒤-그러니까 1960년대 후반기 어느 겨울 저녁 때였다. 내 술친구 시인 박기원이 “우리 신일선네 술집에 한잔 하러 갈까?”하고 명동 어느 다방의 해질녘에 합석해 있다가 말해서 “야 그것 오랜만에 소원 풀려 잘되었네, 가세”하고 따라나서 서린동 뒷골목의 그녀 경영의 왕대폿집에서 그녀를 비로소 초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녀와 인사말을 나눈 뒤 그녀가 저만큼 서자 중년도 이슥한 술꾼 사내들의 버릇으로 “여, 거 주름살이 자잘하게 앉은 게 더 고으이” 어쩌고 기원하고 같이 소곤거리기도 하고 그녀 친작(親酌)의 술을 거나하게 받아 마시면서는 덤의 허튼 수작으로 그녀 손등도 한두번 살살 어루만져 보고 어쩌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데, 이건 술깬 지금 생각해 보니 많이 미안한 일이다….”

계속해서 시인은 신일선이 절간에 들어 보살의 길을 닦고 있다고 들었다며 ‘어느 겨울의 눈나리는 날쯤 그녀의 승복 입은 모습을 인제는 나도 합장하고 다시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맺고 있다.

서정주 시인이 삼십여년 만에 소원을 풀어 슬쩍 손등이라도 어루만졌던 신일선은 당시에는 최고 인기를 누렸다. 그를 짝사랑한 남자들도 수두룩해서 장안의 한량 박덕양은 기관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박덕양뿐 아니라 <봉황의 면류관>에 함께 출연했던 플레이보이 배우 정기택, 이경손 감독 등도 일선을 사모했다. 특히 수줍음이 많았던 이경손 감독은 그녀를 ‘작은 카르멘’이라 일컬으며 혼자 연모의 정을 삭히곤 했다.

신일선은 ‘앞이마를 살짝 덮은 곱슬머리, 웃을 때 눈꼬리에 살얼음이 잡히는 가느다란 눈, 입은 작아 크게 웃으면 찢어질 듯 조심스럽다. 살결은 희고 성격은 고요한 편이며 허리는 가늘고 균형이 잘 잡혀 오묘한 매력이 있는’ 여배우였다.

신일선을 발굴한 건 나운규였다. 나운규가 영희 역을 맡을 여주인공을 찾던 중 한 친구가 동방소녀가극단이 원산 무대에서 공연중인데 막간에 나와 노래를 하는 소녀가수가 아주 어여쁘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와 함께 가보니 소녀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16세 소녀 신삼순은 이렇게 나운규의 눈에 띄어 영화배우 신일선으로 데뷔하게 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신일선은 오빠 집에서 자라났고 순사 노릇을 하다가 실직자가 된 오빠는 신일선이 14세 때 소녀가극단에 입단시켰다고 한다.

<아리랑>에 주인공 영진의 동생으로 출연하면서 신일선은 연기가 무엇인지도 몰라 이리 가라면 가고 저리 가라면 가는 식이었다. 그래도 영화가 완성되자 영희 역 신일선의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은 영진의 광기를 증폭시켜 보는 이들의 마음에 저며들게 했다. 이후 신일선은 일약 ‘조선의 애인’으로 불리며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사생활 면에서 신일선은 당시 다른 여배우들과 마찬가지로 불운했다.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들쥐>의 스토리처럼 신일선은 오빠의 강압에 못이겨 전라도 어느 부자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광대 며느리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며 노발대발 반대를 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기는 했으나 시집살이 고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결혼 직후 신일선은 남편에게 조혼한 아내와 아이가 있고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참고 견디던 신일선은 아들 둘을 낳고 7년 만에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혼 후인 1933년에 연예계에 복귀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1957년 김소동 감독의 리메이크작 <아리랑>에 특별 출연 하는 것으로 <아리랑>으로 시작한 연기인생을 마무리지었다.

그후 서정주 시인이 만났다던 작은 술집을 경영하는 등 세상 풍파에 시달리다가 불가에 귀의, 1990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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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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