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대마도 태극기요” ①
“아리랑 아리랑 대마도 태극기요” ①
  • 송명호
  • 승인 2008.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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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 참여기 / 송명호


[인터뷰365 송명호] 올해로 401회를 맞는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른 두 명의 진도북춤 한배예술단원 속에 끼어 아침 여덟시 반에 부산국제부두항을 출발하여 이즈하라항에 도착한 시각은 열한시쯤이었다. 날씨가 너무 맑고 파도마저 잔잔하여 뱃길이 순탄하고 편안했다.

예술단원 중에 목포 문화방송국 김희준 부장은 방송 취재, 구홍덕 박사와 김영준 선생은 사진 촬영 등 나름대로 임무가 있었지만 나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어서 기회가 되면 준비해 온 태극기로 무엇인가를 해볼 참이다.

박흥일 단장은 며칠 전 작고하신 진도북춤예능보유자이신 박관용 명인의 아들로 대를 이을 진도북춤예능 이수자이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가장 어린 정진이는 박단장의 아들로 대학생이다. 3대째 혼이 이어지고 있는 진도북춤의 진수가 대마도 아리랑 축제 무대에서 질펀하게 펼쳐질 모양이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체류 기간 동안 예약한 전세 버스에 올랐다. 이번 행사 기간 동안 모든 일정을 맡고 있는 여행사 주정훈 소장이 차내 마이크를 잡더니 지금 곧 바로 금석관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내일부터는 공연 관계로 단체 여행이 어려우니 가까운 명소 몇 군데를 둘러 본 다음 숙소로 갈 것이라고 미리 일러둔다. 숙소라고 해야 민박집 두 군데라고 한다. 대마도 규모가 길이 80킬로미터, 폭 16킬로미터에 인구 4만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섬인데다가 한국 사람이 아니면 여행자가 별로 없다보니 마땅한 호텔도 없고 해서 민박집 두 군데를 얻어 놨으니 불편하지만 살부대끼며 묵어 달라고 양해를 부탁한다. 외국 여행 다닐 때 마다 호텔에서 묵었던 터라 비록 3박 4일 여정이지만 명색이 일본인데 민박집도 괜찮을 성싶었다. 점심을 마치고 예술단원을 실은 버스가 닿은 곳은 가미자카 전망대였다. 한눈에 들어 온 것은 덕혜옹주와 정략 결혼한 것으로 잘 알려진 대마도 마지막 도주의 손자 소우타케유키(宗武志)의 시가 새겨진 검은돌의 시비이다.



소우타케유키 하면 우리나라 역사상 비운의 덕혜옹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덕혜옹주는 당시 환갑이 넘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이 모시던 궁녀 양귀인(梁貴人)과의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 태어났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점점 기울어지자 고종황제는 영친왕이 이미 일본 여자 마사코를 며느리로 맞이한 전례가 있어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덕혜옹주의 배필로 민씨 집안의 신랑감을 점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알아챈 일본은 덕혜옹주 19살 되던 해 서둘러서 소우타케유키와 강제로 혼인을 시켜버린다. 그런 사연으로 덕혜옹주와 소우타케유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소우타케유키는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후 마사에마저 원인 불명으로 죽게 되자 덕혜옹주는 자신의 고단한 삶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신질환을 이기지 못해 투신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1962년 1월에서야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낙선재에서 1989년 4월 21일 영면하여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시비의 글은 소우타케유키가 생전에 이곳을 들려서 느낀 소감을 표현한 것으로 인간이나 역사는 부질없는 것이며 자연과 더불어 윤회하는 것임을 담담히 토로한 것으로 마치 자기의 생을 예감하는 듯하였다.


이 시비 앞에서 덕혜옹주의 비운을 생각하며 가방 속에 든 태극기를 꺼냈다. 그러자 예술단원들이 몰려와 태극기를 펼쳐 놓고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마도 대마도 여행길이 열리면서 이곳에 태극기가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시비 위쪽의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바다와 대마도에서 제일 높다는 648미터의 아따떼 산이 가까이 보이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대마도 공항이 보인다. 여기에서도 태극기를 펼쳐 놓고 몇 차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다음은 코마다하마신사로 발길을 옮겼다. 고려 말 1274년 10월 마산을 출발한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 점령을 위해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다. 당시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과 일본의 전쟁은 아주 치열하여 일본군인 만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신사를 세웠는데 일본에서는 군인의 위패를 받들고 추모한 신사로는 코마다하마신사와 야스쿠니신사뿐이다. 안내판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표시하고 또 음성 시스템을 통하여 한국말로도 들려준다.


아유모도시 공원을 가는 농촌 시골 길에 돌이 얹힌 지붕이 있는데 이시야네라고 한다. 5톤이나 되는 납작돌을 얹어서 만든 이 집은 곡식 창고로 쓰이는데, 바람 많은 섬사람의 무지막지한 지혜를 발휘한 것 같았다. 강원도에 너와집이 있다면 대마도에는 이시냐네가 있는 셈이었다.

아유모도시 공원은 원시림과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휴양지로 초록빛 물이 그림처럼 흐른 계곡위에는 청류교라고 이름을 지은 출렁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물이 워낙 맑아 은어가 노는 계곡이라고 했다. 청류교 입구에 일본의 어느 시인은 이곳을 보고 일본의 그랜드캐년이라고 극찬했다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는데, 내 눈으로 보아서는 울진의 불영계곡에 비하면 조족지혈 같아서 과장된 표현 같았다.


숲은 울창하여 물소리와 매미 소리는 요란한데 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삼나무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 삼나무하면 가벼우면서도 곧고 습도에 강하며 잘 휘거나 틀어지지 않아 건축 인테리어, 가구 등에 많이 사용한 고급 나무지만 항균 작용이 뛰어나 병충해가 강해서 벌레가 살수 없다. 그러다보니 먹이가 없는 나무에 산새가 살리 만무하다. 예술단 일행은 여기서 발목도 담그고 잠시 쉬기로 했다.

내일은 오전에 공연 연습을 해야 하고, 오후는 두 차례의 공연이 있어서 긴장도 풀겸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마지막 명소 관광은 오후나에였다. 대마도의 옛 선착장이었다. 조선통신사들도 이곳을 통하여 오고 갔었다. 옛 선착장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었다. 이곳의 안내판도 일본어와 한국어로 표시되어 있고, 음성 시스템의 단추만 누르면 언제든지 한국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기야 한국 사람들이 매년 10만명 정도나 대마도를 찾는다니 그럴만도 했다. 한국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이라면 아주 작은 것에도 신경을 쓰고 배려하려는 대마도의 관광 기술은 놀랍기만 했다. 작년 가을에 대마도를 온 적이 있었는데, 대마도 시청 시계가 정오를 알리면서 ‘고향의 봄’ 멜로디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 이런 발상은 기발함을 초월한 걸작 관광 기법일 것이다. 반대로 일본 관광객을 겨냥한 광고 기법이라할지라도 서울시청 광장에서 정오에 일본 음악이 흘러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있을 수 없는 심판의 민원으로 서울시장은 당장 물러나고 말았을 것이다. 한일간의 역사적 감정과 현실적 이성을 엄격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우리들의 사고가 부족하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일본은 창과 방패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창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는 치열하다. 자기 나라의 이익이라면 어제의 적국이 오늘의 맹방국이 되고, 이익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맹방국도 내일의 소외국으로 팽개쳐버리는 냉혹한 선택의 시대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우리는 가리는 것이 많아 일본을 따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자, 오전에 들었던 대로 정해진 숙소부터 알아 두기로 했다. 대마도 시청 옆 쯔쯔라는 민박집에는 박흥일 단장과 문하생들이 묵기로 했고, 쥬하찌은행(十八銀行) 방향 골목 주택가의 기라쿠나야도(氣樂宿) 민박집에는 나와 구홍덕 박사, 김희준 목포문화방송국 부장, 서영훈 피리 악장, 함태선 선생과 김영준 선생, 여행사 주정훈 소장과 여성 예술단 여섯 명이 묵기로 했다. 기라쿠나야도 민박집은 전형적인 일본식 이층 가옥이었다. 입구 오른쪽 좁은 공간에 신을 모시는 제단도 있었다.


별도로 현관이 없고 밖에서 출입문을 열자 바둑판만한 마루와 이층으로 올라가는 좁다란 나무 계단이 보였다. 신발을 벗어 놓은 대로 주인아주머니가 가지런히 놓곤 했었다.

난간 손잡이를 꼭 붙잡지 않으면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이층에는 고만고만한 다다미 방 5개가 있었다. 셋은 여성 단원들이 쓰고 둘은 남성들이 쓰기로 했다.

대마도에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대마도 아리랑 축제에 진도북춤을 공연하러 온 것이니 불편을 타박한다는 것은 이곳에 온 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일이었다.

짐을 풀고 저녁 식사 장소로 갔다. 도심을 흐르는 수로를 따라 이즈하라항 쪽으로 내려가면 낮에 점심 뷔페를 먹었던 금석관 못미처에 <아지트>라는 식당이었다. 쯔쯔 민박집 예술단원들도 떼 지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안 본지 불과 삼십 여분도 채 안되었는데, 쯔쯔 민박집예술단원을 보니 펄쩍 뛸 정도로 반가워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벌써 저녁상을 차려 놓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 태극기선양운동중앙회 상임고문 송명호(시인)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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