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독일에서 금의환향한 차범근 오은미 부부
[그때 그 인터뷰] 독일에서 금의환향한 차범근 오은미 부부
  • 김두호
  • 승인 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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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들이 ‘차붐’ 외칠 때 정말 짜릿했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축구감독 차범근의 역량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지난 2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개최된 JOMO컵 한일프로축구 올스타전에서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K리그 올스타가 3대1로 J리그올스타를 제압했다. 지금은 수원삼성블루윙즈의 감독인 차범근의 이야기라면 한국인들은 대다수 유럽에서 뛰던 시절을 떠올리며 흥분한다. 해외무대에서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떨치며 우리에게 세계를 향한 야망과 자긍심을 안겨준 ‘수출 선수’의 원조가 그였다.

19세 때인 1972년 최연소 국가대표 선수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79년 독일(당시 서독) 최고의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명문 팀 프랑크푸르트에 스카우트 되어 축구의 본고장에서 전설의 빗장을 열었다. ‘차붐’이란 이름으로 통하며 3년 뒤 레버쿠젠으로 이적, 중하위팀을 유럽 최강의 영예인 UEFA컵 우승팀으로 끌어올리는데 수훈을 세웠다.

1980년 6월 차범근(당시 27세)의 소속팀인 프랑크푸르트가 한국 대표팀(당시 화랑팀)과 친선경기를 위해 한국에 오면서 1년 만에 부인 오은미 씨와 세 살박이 어린 딸 하나양을 안고 돌아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체류중인 호텔에서 그들 부부를 만났다. 이 때 부인은 둘째인 두리의 출산을 앞둔 만삭이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고, 질문에 대한 답변도 부인이 주로 했다.


귀국 소감부터 궁금하다.

차범근) 정말 감개무량하다. 서독구장에서 입은 상처로 오른쪽 다리에 붕대를 감고 뛰면서도 고통을 잊었다. 내가 우리 대표팀이 아니고 지금은 프랑크푸르트 소속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긴 것(2대 1로 프랑크푸르트팀이 승리)에는 큰 의미를 느끼지 않는다.


지난 1년간의 서독 선수생활 중 인상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오은미) 하나 아빠의 지난 1년은 앞으로 겪을 10년 고생을 가불해서 산 것처럼 보였다. 만일 기도의 힘과 인내가 없었다면 하나 아빠는 쓰러져도 몇 번 쓰러졌을 것이다. 선수에게는 운이란 것도 필요하지만 그 운은 실력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가장 큰 고통은 어떤 것들이었나?

오은미) 아빠에게 가장 큰 위기는 서독에 간 직후였다. 한국을 떠날 때의 부푼 기대와 달리 안정된 선수자리를 찾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했다. 꽃다발을 목에 걸고 김포공항을 떠났지만 도착 후 밀어주기로 약속한 프랑크푸르트의 슐테 조감독은 막상 눈앞에 나타나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차범근) 도착 직후 한동안은 나를 참담하게 했다. 숙소부근에서 연습을 하는 오쿠데라(일본출신 선수로 당시 IFC 쾰른팀 소속)가 한없이 부러웠다. 나는 지옥에서 천국에 사는 오쿠데라를 구경하며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때로는 아마추어팀의 연습게임에 끼어들어 몸을 풀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입단계약을 하고 떠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차범근) 물론 약속을 받고 갔다. 여우종 서독교민회장이 교섭을 시작해 프랑크푸르트와 1981년까지 연봉 24만 마르크(당시 약 6천3백12만원)로 입단계약이 이루어졌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지만 한 달 후에 선수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은미) 입단소식과 함께 당신이 필요하다는 급한 전화를 받고 달포만에 서독으로 갔다.

차범근) 집사람은 곱게만 자란 탓으로 결혼 후에도 부엌살림이 좀 서툴렀다. 그 곱던 손이 물과 기름에 데고 또 칼에 다쳐 거친 손이 됐다.


유럽축구연맹컵(UEFA컵)에서 프랑크푸르트가 우승하면서 최고의 찬사들이 쏟아졌다. 그때의 감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오은미) 물론 그때 기분은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1979년) 11월 24일 프랑크푸르트와 오쿠데라의 쾰른팀이 대전했을 때도 잊을 수 없다. 그날 아침 우리 세 가족의 식탁은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내가 아침기도를 하자 딸 하나가 “아빠 골 넣어”하고 내가 경기장에서 외치던 소리를 흉내내며 재롱을 떨어 한참 웃었다. 아시아를 대표하던 오쿠데라가 아빠에게 밀리는 모습이 너무 통쾌했다. 나의 일중에 유럽 축구팬들의 팬레터에 대한 답장을 쓰는 일이 더 생겼다.


경기는 승리로 끝난 걸로 알고 있다. 현장에서 지켜 본 게임 내용은?

오은미) 전반 25분, 아빠가 수비수 두 명을 제치고 첫 골을 터뜨릴 때 내 고함소리가 너무 컸는지 주변 관중들이 화들짝 놀라 일제히 나를 쳐다보아 내가 다시 놀랐다. 전광판에 톨(독일어의 골) 글자와 함께 차범근이라는 이름이 두 차례나 뜨자 관중들이 차붐을 외치며 승리의 환호를 질러댈 때는 정말 짜릿했다.

차범근) 기자들이 몰려들면서 우리는 사생활이 있는 대로 다 공개됐다. 하나가 장난치는 모습까지 카메라가 담아갔다.


수입도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 같다.

오은미) 연봉 외에도 보너스가 따르고 부수입들이 성과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서독은 세금이 38∼40%나 된다. 세금이 아니면 한 1억쯤 될 것이다.


기쁨 뒤에는 남모르는 고뇌도 있을 것 같다. 어떤 때가 힘든가?

오은미) 게임 전날은 아빠와 각 방을 쓴다. 하나가 잠자리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혼자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서다. 종종 내성적인 아빠의 얼굴에서 우수같은 걸 본다. 언젠가는 동료들이 볼을 잘 주지 않아서 찬스를 놓친 일이 있다고 독백하는 말도 들었다. 프로선수는 내일을 예측 못하고 하루하루 있는 힘을 모두 쏟는다. 인기가 오르면 그걸 감당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기쁨은 잠깐이고 힘든 시간이 더 많다.



당시 서독 신문들은 1979년 세계 상승세 4대 인물로 차범근의 이름을 올렸다. 그는 그로부터 소속을 옮겨가며 308 경기 출전에 PK를 찬 적이 없이 필드골로만 98골을 날리며 정상급 선수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 1999년 ‘월드사커’지는 20세기 축구에 영향을 미친 100명의 인물에 차붐을 포함시켰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우리 선수에게 스포츠신문사의 전담 특파원이 등장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필자가 인터뷰를 하던 당시 부부는 두 달 후 낳을 아기가 아들이면 ‘두리’, 딸이면 ‘두나’로 부를 이름까지 지어 놓고 있었다. 두리는 성큼성큼 자라 서울 월드컵 때 한국 대표선수로 활동했고 지금은 아버지가 활동하던 독일에서 뛰고 있다. 현재 분데스리가 2부 리그인 코블렌츠팀 소속이다. 1980년 그들 부부가 안고 왔던 3살짜리 하나는 이제 자신이 3살짜리 아들을 둔 31살 주부가 되어 차범근 감독 부부는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고 산다. 하나 씨는 독일계 항공사에 근무하면서 월드컵 때 독일의 축구동화집을 한글판으로 번역하는 번역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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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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