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꼬꼬무’라는 말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이라는 뜻이다. 나쁜 것보다는 좋은 일이 잇달아 일어날 때 즐겁게 쓰는 말이다. 지승룡 작가가 쓴 '명동 다다이스트'라는 책이 필요해 온라인 서점을 검색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지 작가에게서 '명동 다다이스트'를 선물 받은 지인에게 연락했다.
서울시립미술관(세마, Seoul Museum of Art)에서 행사가 있으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의 본디 이름) 부근을 자주 갔지만, 세마 안으로 들어가기는 처음인데, 그곳에서 뜻하지 행운을 만났다.
천경자 화가의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세마 지하1층 ‘세마홀’에서 지인에게 '명동 다다이스트'를 받고 3층으로 올라갔다. 천경자(千鏡子, 1924~2015) 화가의 ‘탄생100주년 기념전; 천경자-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를 보기 위해서였다.
천 작가는 당신의 작품이 흩어지지 않고 영원히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작품 93점을, 1998년 세마에 기증했다. 이 중, 30점이 선보이고 있었다.
작년 8월6일부터 이어지고 있는 전시는 ‘환상과 정한의 세계’, ‘꿈과 바람의 여로’, ‘예술과 낭만’, ‘자유로운 여자’ 등 4개 부분으로 구성돼 천 작가를 깊게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환상과 정한의 세계’는 천 작가의 화려하고 몽환적인 채색화와 특유의 여인상 위주로 구성됐다. 1965년 작 '초혼'이 눈길을 끌었다. 바다에서의 토속적 제사를 그린 작품이다. 원삼을 입은 여자와 바닷길을 나서는 배, 그리고 바닷물 속으로 휘몰아치듯 꿈틀거리는 커다란 물고기(언뜻 보면 뱀처럼 보인다)가 몽환적으로 그려졌다.
1984년 작 '여인의 시1'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무치는 고독 속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작품으로 이듬해 그린 '여인의 시2'와 함께 2부작이다. 천 작가는 1980년대 중반부터 여인 누드를 적극적으로 화폭에 담았다. 나체 여인의 등장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원을 여성으로 보는 모체회귀와 연관된다고 한다. 크게 뜬 여인의 두 눈은 고독으로 가득 찼고, 외로운 여인을 위로해줄 것은 오로지 담배인 듯, 오른손으로 담배를 들고 있다. 천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 여인과 함께 있던 새 나비 동물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은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 내고 고고하게 살아온 천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꿈과 바람의 여로’는 1969년 타히티와 파리, 이탈리아 등을 시작으로 1980년대 영국 미국 일본 등으로 이어진 해외여행을 통해 만난 것을 그린 작품들이다. 이중 '모뉴멘트 밸리'(1987)는 천 작가가 막내아들과 함께 두 번째로 여행한 미국 남서부 지역을 그린 작품이다. 모뉴멘트밸리는 메사(mesa)라는 테이블형 대지가 빗물로 침식돼 생긴 뷰트(butte)라는 바위산이 여기저기 흩어져 기념비처럼 줄지어 서 있는 경관을 가리킨다.
‘예술과 낭만’에서는 '폭풍의 언덕'(1981)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작품은 에밀리 브론테가 1847년에 발표한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되었던, 영국의 웨스트요크셔 지역 하워스를 그린 것이다. 화폭에는 말라버린 검붉은 관목인 히스와 누런 갈대밭이 거센 바람에 몰아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슬픔, 불행, 고독 등을 작품의 소재로 연결해 표현했다. 미국의 테너시 윌리엄스가 쓴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배경이 된 뉴올리언스를 그린 작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7)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자유로운 여자’는 천경자의 수필집에서 가져온 글을 모았다. ‘자유로운 여자’(집현전, 1979), ‘꿈과 바람의 세계’(경미문화사, 1980), ‘캔맥주 한 잔의 유희’(문화서적,1981),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자유문학사, 1984) 등에서 가져온 글은, 모두 한편의 시였다. 전시장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전시장 입구에 비치된 팜플렛에서 작품의 사진을 찍고, 설명도 인용했다.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인생이 떠있는지로 모른다
…
담배를 피워 물고 긴 한숨을 내려 쉬며 거울에다 연기로
「자유」라고 쓴다
– 천경자, ‘자유로운 여자’에서
더러는 ‘뱀을 즐겨 그리는 그’라고 칭찬(?)조로 내가 소개되는 일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연실색하는 것이다
…
요즈음 나의 작품 주제에는 ‘꽃’이 많고 ‘여인’이 많다.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리는 그……”
라고 칭찬(?)받을 시절이 올 것인지 모르지만,
- 천경자, ‘캔맥주 한 잔의 유희’에서
나는 글쓰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그림 그리기를 더욱 사랑한다.
글 없는 나는 있을 수 있어도 그림 없는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천경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에서
최재은 작가의 ‘약속’에서 나를 되돌아보다
천경자 화가의 작품을 음미하면서 1층으로 내려와 최재은 작가의 개인전시 ‘약속’을 봤다. 12월23일부터 2026년 4월5일까지 열리는 ‘약속’ 전시는 루시 경종 소우주 미명 자연국가 아카이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실 입구에서 인류의 기원을 상징하는 ‘루시’를 만났다. 320만전 인류 화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루시’는 돌과 구조물을 통해 인간만이 아닌 여러 종류의 존재가 함께 온 시간을 상징한다.
‘경종’은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제기한다. 대형 화면에 지구 곳곳의 해수면 온도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보여진다.
‘미명(微名)’에서는 일상에서 마주한 들꽃과 들풀을 수집해서 이름을 기록한 것 가운데, 베들레햄별꽃 등 560여점의 화초(花草)를 볼 수 있다.
‘자연국가’는 비무장지대(DMZ)를 군사적 시각이 아니라 생명이란 측면에서 본 작품이다. ‘대지의 꿈 프로젝트’를 통해 군사분계선에 걸쳐 있는 철원의 궁예 옛 궁터 부근에 생태계를 복원하는 과제를 제시한다. 또 DMZ 철조망을 녹여 제작한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는 작품도 만난다.
작품을 보면서 “‘약속’은 선언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의 일부라는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 이름을 모르는 식물에게 다가가, 식물의 눈에서 공유되기를 바란다”는 최재은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편리하다는 이유로, 하루하루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가속시키는 ‘무뇌(無腦)대열’에 휩쓸리고 있는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세마(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은 옛 대법원 청사의 앞부분(파사드, Facade)만 그대로 보존하고 뒷부분은 새로 지은 것이다. 옛 대법원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8년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경성복심법원이다. 일제는 조선시대 의금부를 1890년대에 평리원으로 개편한 것을, 1907년에 강제로 해체했다. 국권상실로 많은 애국지사가 일제로부터 겪지 않아도 될 옥살이를 멍에처럼 떠안아야 했던 이곳이, 일상에서 지친 시민들을 위로해주는 세마로 변신한 것은 참으로 감탄할만한 일일이다.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앞뜰을 거닐었다. 가을에 떨어진 은행이 노랗게 쌓여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1980년대 이전만 해도 가로수에 붙은 은행을 털어 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대로 방치돼 있다. 시절이 많이 변한 것이다. 뜰 한쪽에 이곳이 대한제국 때 육영공원과 독일영사관과 독립신문사가 있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을사년(乙巳年)을 보내고 병오년(丙午年)을 맞이하는 세모에 유서 깊은 곳에서 멋진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소확행’을 확실히 누렸다.
겉과 속은 늘 다른 것이다
조선총독부 경성복심법원이었다는 겉모습이 싫어
광복 후에도 억울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낸 대법원이었다는 선입견을 이기지 못해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새가슴이 활짝 열렸다
파사드만 남긴 것이 비밀이었다
인생이 영원하지 않듯
건생(建生)도 수명이 있다는 한계를
겉모습만 그대로 두고
안을 모두 바꾸는 마술을 깨달았다
천경자 화가가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미소짓고
최재은 작가가
베들레햄별꽃의 약속으로
무시무시한 DMZ을 생태계가 살아나는 자연국가로 바꾸고 있었다
- 홍찬선, '서울시립미술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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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 칼럼니스트
시인 겸 소설가. 충남 아산 출신으로 천안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다. 한국경제신문과 동아일보 머니투데이 기자를 하면서 서강대 경영학과 박사과정(재무관리전공)과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기업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칭화(淸華)대학교 경제관리학원 고급금융연수과정,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등을 수료했다. 머니투데이방송(MTN) 보도국장, 머니투데이 북경특파원과 편집국장 역임한 뒤, 100세 시대에 제2인생을 살기 위해 2017년 7월부터 시인과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2016년 가을호)한 뒤 시집 ‘틈’ ‘독도연가’ ‘서울특별詩 1, 2, 3, 4, 5’ ‘생명과 사랑’ 등 19권과 부부시화집 ‘그 섬에서 1박2일’ 등 2권을 출간했다. ‘연인’에서 소설 등단(2019)해 소설집 ‘그해 여름의 하얀 운동화’와 장편소설 ‘백석의 불시착’도 출간했다.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패치워크인문학’ ‘20대 대통령을 위한 경제학’ 등 경제분야 저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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