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것이다. 기록에 머물지 않고 자료와 유물을 모아 뒷사람에게 전해주는 사람의 몫이 크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일제의 압제 속에서 지켜냈듯이.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잊히던 단군(檀君)을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은유와 상징으로 전해줬듯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되살려냈듯이….
전보삼(全寶三) 만해기념관(萬海紀念館) 관장도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다. 전 관장은 평생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 ‘만해기념관’을 만들었다. ‘만해기념관’ 덕분에, 우리는 ‘1920~40년대 일제강점기에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만해기념관은 1926년 5월20일에 출간된 만해의 첫 시집 '님의 침묵' 초판본을 비롯해 만해의 유묵(遺墨)과 만해와 관련된 저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만해가 회갑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 회갑축하연에서 만든 '송수첩(頌壽帖)'과 만해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에 받은 건국공로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훈기번호 제25호)’ 등도 포함돼 있다.
'님의 침묵' 100년 100권 아카이브 특별전
올해는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이 출간된 지 100년 되는 해다. 전 관장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5월12일부터 6월11일까지 한달 동안 ‘만해기념관’에서 ''님의 침묵' 100년 100권 아카이브 특별전'을 열고 있다.
1926년 5월20일 회동서관(滙東書館)에서 출간된 '님의 침묵' 초판본을 비롯, 그동안 출간된 '님의 침묵'의 여러 판본과 해외에서 영어 불어 등 해외에서 번역돼 출판된 판본, 그리고 '님의 침묵'에 관련된 학술서적 등이 전시되고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리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침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전문
이번 특별전시회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님의 침묵' 초판본이다. 국내에 몇 권 남아 있지 않은 회귀본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또 시 '님의 침묵'의 전문과 만해 한용운의 진영(眞影)을 비단에 자수로 새긴 임재원 님의 작품이 놀랍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느라 2년여의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님의 침묵' 초판본의 5가지 가치
전보삼 관장은 “'님의 침묵' 초판본의 가치를 5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 문헌적 가치다. 초판본의 종이 재질, 잉크 제본 방식 등은 100년 전 한국의 출판 상황을 보여주고, 맞춤법통일안이 시행되기 전의 한글 모습과 일제의 검열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역사적 가치다. 만해에게 '님의 침묵'은 3.1만세운동의 연장으로 3.1정신의 문학적 완결이다. 셋째 저항과 서정의 유기적 결합을 보여준 시집으로서의 의미다. 넷째 한글 아카이브의 보루로서의 언어적 가치이며, 다섯째 종교와 철학의 회통을 보여주는 철학적 가치다.
만해 선사가 회갑을 맞이해 직접 쓴 ‘회갑연 한시’도 뭉클하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환갑을 맞이하는 심정을 불교적으로 풀었다. 이 한시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비뚤비뚤한 글자체에 더욱 눈길이 간다.
만해는 국권을 상실한 이듬해인 1911년, 서른세 살 때 독립운동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만주에 갔다가 ‘굴라재’라는 고개에서 ‘일본 첩자’로 오인받아 독립군 청년에게 총을 맞았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목숨을 건졌으나, 총알을 모두 꺼내지 못해 체머리를 앓게 됐다. 그렇게 흔들리는 머리와 손으로 쓴 한시가 바로 ‘회갑연 한시’다.
怱怱六十一年光(총총육십일년광)
云是人間小劫桑(운시인간소겁상)
歲月縱令白髮短(세월종령백발단)
風霜無奈丹心長(풍상무내단심장)
聽貧己覺換凡骨(청빈이각환범골)
任病誰知得妙方(임병수지득묘방)
流水餘生君莫問(유수여생군막문)
蟬聲萬樹趂斜陽(선성만수진사양)
바쁘게 지나간 예순한 해
사람들은 짧은 생애라고 말하지요
세월은 흘러 흰머리는 짧아졌지만
풍상도 이 붉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가난을 받아들이니 평범한 이로 바뀐 듯
병을 버려두니 묘방을 얻은 듯 알지만
유수 같이 남은 생을 그대여 묻지 마오
뭇 나무에 매미소리 지는 해를 따르리라
- 한용운, '회갑즉흥(回甲卽興)'
'님의 침묵' 100주년은 새로운 100년의 시작
전보삼 관장은 이번에 ''님의 침묵' 100년 100권 아카이브 특별전'을 여는 ‘특별한 의미’를 100줄로 정리했다.
“1. 여기, 한 인간의 60년 생애를 바쳐 길어 올린 만해(萬海)의 숨결이 있다”에서 시작해 “3.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는 망각의 시대를 살고 있다”와 “20. 만해 기념관의 담벼락마다 서린 땀방울은 역사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의 산물이다”를 거쳐 “25. '님의 침묵' 속에 숨겨진 저항의 미학은 실물 자료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와 “93. 이 책은 후세에게 전하는 가장 소중한 역사적 유언장이다”로 받은 뒤 “100. '님의 침묵' 100주년을 기리며, 우리는 새로운 100년의 시작을 선언한다”로 마무리한다.
님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회동서관(滙東書館)에서 태어난 지 100년 동안
그 악독한 일제의 한글말살 식민수탈의 굴레 속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침묵의 침묵으로
배달겨레가 나아갈 바를 알려주었습니다
님의 침묵은 천둥보다 우렁찬 북소리였습니다
강릉의 고등학생 전보삼(全寶三)의 가슴을 둥둥 울려
여기저기 흩어진 한용운의 침묵 조각을 모으고 모아
심우장(尋牛莊)을 살리고 만해기념관으로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님의 침묵은 모심의 힘찬 심장고동입니다
시어 하나, 하나와 만해의 진영(眞影)을
자수로 한땀 한땀 새긴 정성과
님의 침묵 100년의 100권 아카이브로
이불 끌어당기는 게으름에 벼락을 내립니다
- 홍찬선, '님의 침묵의 침묵' 전문.
''님의 침묵' 100년 100권 아카이브 특별전'을 보고 나오며 ‘만해기념관’ 입구에 서 있는 만해의 시비를 본다. 제목이 없다는 뜻의 ‘무제’라는 제목이 붙은 시조 '무제'다. 일제와 싸워 조국의 독립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만해의 굳센 뜻을 읽을 수 있다. 시조에 나오는 ‘파사검(破邪劍)’은 ‘삿된 무리를 쳐부수는 칼’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왜적(倭敵)과 싸울 때 썼던 칼이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破邪劍)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 하여 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
- 한용운, '무제' 전문
만해가 남긴 '님의 침묵'은 그저 침묵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배달 겨레 모두의 머리를 내리친 벼락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불굴의 항일투쟁 의지를 불태웠고, 광복 후 분단과 6.25전쟁 때는 민족상잔의 고통을 보듬는 시가 되었다. 『님의 침묵』은 이제, AI시대를 맞아 글로벌 리더로 부상하는 대한민국의 앞날을 밝히는 환한 등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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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 칼럼니스트
시인 겸 소설가. 충남 아산 출신으로 천안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다. 한국경제신문과 동아일보 머니투데이 기자를 하면서 서강대 경영학과 박사과정(재무관리전공)과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기업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칭화(淸華)대학교 경제관리학원 고급금융연수과정,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등을 수료했다. 머니투데이방송(MTN) 보도국장, 머니투데이 북경특파원과 편집국장 역임한 뒤, 100세 시대에 제2인생을 살기 위해 2017년 7월부터 시인과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2016년 가을호)한 뒤 시집 ‘틈’ ‘독도연가’ ‘서울특별詩 1, 2, 3, 4, 5’ ‘생명과 사랑’ 등 19권과 부부시화집 ‘그 섬에서 1박2일’ 등 2권을 출간했다. ‘연인’에서 소설 등단(2019)해 소설집 ‘그해 여름의 하얀 운동화’와 장편소설 ‘백석의 불시착’도 출간했다.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패치워크인문학’ ‘20대 대통령을 위한 경제학’ 등 경제분야 저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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