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짜면’같은 정치를 원한다
‘짬짜면’같은 정치를 원한다
  • 김세원
  • 승인 200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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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품 테스트 마켓이 필요한 한국정치 /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 4계절 가운데 여름을 가장 좋아하지만 여름이 반갑잖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본의 아니게, 우람한 몸매를 남 앞에 드러내야 할 뿐 아니라 여름이면 까다로운 식성의 소유자임이 들통 나기 때문이다. 복날이면 같은 사무실 직원들끼리 삼계탕집이나 추어탕, 보신탕집을 찾아 나서는데 ‘개성과 냄새가 강한’ 음식을 파는 식당은 메뉴가 한두 가지로 고정돼 있어 반쪽이 베지테리언인 나로서는 따라나서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첫인상에 대한 호오(好惡)만큼이나 좀처럼 변하기 힘든 게 식성인 것 같다. 생각은 386, 주민등록번호로 따져도 분명 40대인데 식성은 아직도 10대 중고생 시절에 머물러 있다. 대학4학년 때 비로소 비빔국수와 비빔냉면 먹는 법을, 신문사에 입사한 뒤 회먹는 법을 배운 것을 빼놓고는 식성은 옛날그대로다. 파리에 있을 때 가장 그리웠던 음식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나오는 한정식도, 간장게장도 아니고 김밥, 만두, 떡볶이, 고구마탕 같은 분식 단골 메뉴들이었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길거리에서 파는 계피 듬뿍 넣은 호떡과 붕어빵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른들의 말을 빌자면 '입이 짧은 탓'에 이것저것 조금씩 골라 먹는 뷔페식 식사를 선호한다. 가격 부담 없이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는 분식집이나 스낵코너 패스트푸드점에 주로 발길이 가고 편의점 한 귀퉁이에 선 채로 삼각김밥을 컵라면 국물에 찍어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문제는 ‘세월의 흐름을 초월한’ 이 식성으로는 다른 40대와는 어울리기 힘들다는 거다. 남자 동창들은 물론이고 처녀 때 만해도 경양식집에 앉아 조그맣게 고기를 썰어 포크로 찍어먹던 여자 동창들도 이제는 퍼질러 앉아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숟갈로 떠먹는 한식당을 고집한다.



퓨전의 지혜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란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식당이다.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장소를 잡을 때를 생각해 보면 쉽다. 먼저 한식이냐 중식이냐 양식이냐 일식이냐를 선택해야 하고 한식 중에서도 찌개집이냐 고깃집이냐 쌈밥집이냐를 다시 골라야 한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짬뽕이냐 자장면이냐의 갈등은 시작된다. 국수집에서는 시원한 콩국수냐, 얼큰한 칼국수냐의 기로에 서고 일반 한식당에서는 순두부백반이냐 비빔밥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분식집과 스낵 코너의 주요 고객인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이같은 고민을 무색하게 하는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떡볶이를, 누군가는 어묵을, 또 다른 누군가는 김밥을 시켜 가운데 놓고 사이좋게 나눠먹는 것이다. 화합과 상생을 실천하는 산 현장인 셈이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는 퓨전식당들은 여러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세트 메뉴로 고객들의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다. 단지 값이 좀 비싼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요즘은 일반 식당에서도 손님들의 선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아예 그릇의 가운데를 칸막이로 나눠 한 켠에는 짬뽕, 다른 한 켠에는 자장면을 담은 ‘짬짜면’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길거리의 이동 음식점들은 떡볶이냐 오뎅(어묵)이냐 라면이냐로 갈등을 겪는 고객들을 위해 떡볶이에 오뎅(어묵)과 라면 사리를 넣은 ‘떡오사’, 떡볶이와 순대를 반씩 섞은 ‘떡순이’등 신제품개발에 기동성을 발휘하고 있다.



정치에도 신제품 테스트 마켓이 필요하다
한국 시장이 다국적 기업들의 신제품 테스트 마켓(test market)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한국 소비자들의 구미가 워낙 까다롭고 유행에 민감해 신상품의 인기나 문제점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란다. 한국 소비자들의 눈이 워낙 높아 까다로운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면 세계 어디서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거다. 예전 같으면 구박받았을 까다로운 입맛덕분에 한국시장이 글로벌 마케팅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니 흥미롭다.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를 결합한 디카폰, 휴대전화와 MP3플레이어를 결합한 MP3폰, 휴대전화와 비디오를 결합한 비디오폰, DVD플레이어와 비디오 카세트 레코더(VCR)를 한데 묶은 콤보 등 디지털 강국답게 특히 IT나 가전분야에 여러 가지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제품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글로벌 마켓에서는 알아주는 한국인들의 까다로운 취향이 왜 정치권에서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다. 식당업계나 디지털 업계에서는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맛과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짬짜면’과 ‘콤보’를 내놓는 마당에 정치권은 친박과 친이, 실용주의와 민족주의 등으로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고 오히려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소비자인 국민들이 정치에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 이를 충족시키는 서비스를 신속하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정치권 내부에서는 이념과 노선의 선명성이 문제가 되겠지만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일제강점기의 계몽되어야 할 백성도, 독재정권 시절의 의식화되어야 할 민중이 아니다. 지금은 동서양과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글로벌 퓨전시대, 짬뽕이냐, 자장면이냐 정통성을 따지는 자체가 우습다. 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불황을 타개할 수만 있다면 정치노선과 이데올로기가 무슨 상관이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짬짜면’ ‘MP3폰’같은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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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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