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에 담긴 활자들이 천지수의 몸과 기억과 희망을 만나 씨앗으로 응결되면, 화가는 그 작은 것을 캔버스에 심고 붓과 물감으로 키워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한다.
독서를 통해 창조적 영감을 얻는 실험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책 읽는 천지수 화가의 ‘페인팅 북리뷰'는 그 대답 중 하나다. 두 번째 책은 '사람을 남기는 사람'(정지우 지음/마름모)이다.
인터뷰365 천지수 칼럼니스트(화가·서평가)= 변호사이며 문화평론가인 정지우 작가의 책이다. ‘사람을 남기는 사람’은 삶을 재구성하는 관계의 법칙을 알려준다. 관계에 대해 느낀 정지우 작가의 통찰이 담겨있는 에세이다. 관계의 기초, 시작, 원리, 깊이, 관계에서 나를 지키기, 관계의 목적 등 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심도 있는 사례들은 우리가 인간관계를 이해하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줄 때 자기 자신이 된다’라는 문장에 나는 단숨에 끌렸다. 나를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통찰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메커니즘이 이루어지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이어지는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가 능력이나 실력이 있고 일을 잘한다는 건 그만큼 타인을 만족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 타인이 행복하거나 기쁘고 만족하면 그는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주는‘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타인과의 관계이다. 약육강식의 이기적 세상으로만 이해한다면 정지우의 말을 한없이 이상하거나 실없는 이상론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지우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무형이나 유형 상관없이 내가 ’주는‘ 것들로 관계가 형성되고 나 자신은 그에 따라 성장하고 변해가는 삶을 이어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정지우 작가의 이런 생각에서 깊은 통찰을 얻었다. 한편 삶의 본질은 결국 끝없이 주고받는 ’순환‘에 있다는 그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나를 끊임없이, 계속하여 내어줌으로써 삶을 얻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삶의 모든 의미 있는 역할이나 가치 있는 일들이 하나같이 ‘줌’이라는 것을 핵심에 두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주지 않는 삶은 움직이지 않고,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순환으로 삶은 생동한다’라는 정지우 작가의 문장은 뇌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말을 할 때 때론 상대방의 표정을 통해 내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타인의 얼굴이 나의 거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주는‘ 것을 상대방이 받고,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것. 이런 경험을 이해하면 ’관계‘에 대한 이해가 차원이 달리지기도 한다.
정지우 작가의 ‘사람을 남기는 사람’을 읽으며 내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나는 ’관계의 연결성‘을 직관적으로 화폭에 표현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즈 붕대를 소재로 쓰기로 했다. 상처를 감싸주고, 묶어주는 회복과 연결의 상징으로 나는 붕대라는 이 소재를 무척 사랑한다. 이리저리 자연스럽게 그물처럼 연결하며 엮어 본다. 이렇게 손으로 무의식적으로 엮다 보면 어떤 형태가 나오는데, 그 모습을 바꾸고 싶으면 다른 부분을 잡아당긴다. 어떤 곳을 잡아당기느냐에 따라 연결 형태가 달라진다.
또, 붕대의 엮인 부분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붕대의 다른 곳들은 위치에 따라 크고 작게 영향을 받는다. 서로 엮인 붕대들은 모두 연결되어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진실을 나는 붕대를 엮는 행위로 온전히 느낀다. 내가 붕대라는 소재를 다루며 회복과 연결의 상징성을 부여해서겠지만, 붕대로 작품을 만들다 보면 아주 희한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용서하거나. 화해하거나 혹은 치유가 되는 그런 온화한 느낌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관계 맺기’에 관한 몇 편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최인아책방‘ 대표의 ’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마음‘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기 마련이고, 자신의 일 속에 들어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을 했다’라는 그는, 책방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책방을 하는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타인의 표정을 통해 자신이 하는 일과 삶의 의미를 모두 발견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나는 나 자신을 보고 있다고 쉽게 여겼다. 하지만 ‘사람을 남기는 사람’을 읽는 동안 나는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 하나를 더 얻었다. 화가인 나는 내 그림을 보여주고,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을 열심히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행위를 통해 나의 존재의 의미가 생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이 관계를 맺는다는 그 사실 자체로 우리는 삶을 창조한다.”라는 정지우의 말을 나는 이제 전적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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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 칼럼니스트
화가이자 서평가. 대학에서 회화과를 졸업한 후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 '지오반니 뻬리꼬네' 이탈리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2008년에는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건너가 세랭게티 국립공원 내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했다.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주이탈리아 로마 한인성당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책읽는 아틀리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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