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90세 이순재 대배우의 연기 투혼...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90세 이순재 대배우의 연기 투혼...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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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재 배우, 시력 약화와 체중 감소 딛고 노련한 화술 연기 보여
- 미국 작가 데이브 핸슨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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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에서 배우 이순재./사진=파크컴퍼니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무대를 보면서 놀랐다.

구순(九旬)의 이순재 대배우가 평소보다 더 늙어 보이게 분장을 하고 체구도 왜소해 과연 연극을 이끌까 했는데, 80분 가까이 2인극 같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대사 한마디, 동작 하나 실수 없이 해냈다.

객석을 보면서 놀랐다.

파크컴퍼니가 제작, 12월 1일까지 대학로 예스스테이지 3관에서 롱런하는 이 작품은 젊은 층 대상의 기획사 연극인데, 이순재 대배우가 뮤지컬 배우 카이와 신인 박수연과 함께한 14일 낮 공연에 300석 가까운 객석이 꽉 찼다. 20~30대 여성 관객이 주류를 이룬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자 일제히 기립, 90세 이순재 대배우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70대 후반의 최고령 관객인 필자는 이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미국의 배우 겸 극작가 데이브 핸슨의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Waiting for waiting For Godot)'는 2013년 뉴욕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공연 이후 런던, 이스탄불, LA, 오클랜드 등에서 무대에 오른 화제작인데 국내는 초연이다.

신구 박근형 박정자 등이 출연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2023~2024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와 그 이전의 '라스트 세션' '러브레터'를 공연해 관객을 모은 박정미 프로듀서와 오경택 연출이 제작한 이번 작품은 현역 최고령인 이순재 대배우를 위한 무대로, 뮤지컬과 매체에서 활동 중인 카이, 박정복, 최민호, 곽동연, 정재원, 박수연 등 젊은 배우들과 케미를 이루게 한 상업극으로, 젊은 층을 타켓으로 했다.

고도를기다리며를기다리며_이순재(사진제공 파크컴퍼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에서 배우 이순재./사진=파크컴퍼니 

이순재 대배우를 보기 위해 이 작품을 관람한 필자는 리뷰의 초점 또한 이순재 대배우에게 맞추고 싶다.

상업극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내용과 캐릭터가 맞춤형 순수연극이라고 할 만큼 대배우 이순재에게 맞을뿐더러 노년의 기념비적인 역작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순재 배우의 외모나 움직임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지난해 상반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리어왕'을 원 캐스트로 장기 공연할 때만 해도 건강해 보였는데, 1년 사이에 변화가 있어 보였다.

공연을 본 후 지난주 조선일보 주말 섹션 ‘아무튼 주말’에 실린 이순재 대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다시 읽었다. 건강에 대한 근황이 실려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 6월 하순 '리어왕'을 끝낸 후 집에 있다가 목욕탕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늙은이가 죽는 게 이런 거구나 했죠. 진짜 죽는 줄 알았으니까.”

다행히 대사는 외울 수 있어 바로 드라마 '개소리' 촬영에 들어갔는데 그 이후 체중이 10kg 이상 빠졌다는 것이다.

무대에서의 모습이 더 왜소해 보인 이유가 이해되었다.

공연 후 분장실에서 이순재 대배우를 만나 건강 이야기를 꺼냈더니 더 충격적인 근황을 전했다.

“한쪽 눈은 녹내장이라 실명한거나 다름없고 다른 한쪽은 백내장 수술을 한 상태에서 주변만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예요.”

눈도 잘 안보이는 핸디캡을 딛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대를 이끈 노배우에게 외경심이 느껴졌다.

“무대는 내 생명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의미죠.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터전이 바로 무대예요.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조선일보 인터뷰 중)

이순재 대배우와 함께한 필자/사진=정중헌 제공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공연을 관람했는데 데이브 핸슨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노배우 이순재를 위한 희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의 연기에 대한 지론은 물론 배우의 정신과 삶의 철학이 녹아있었다.

인터넷에 ‘이순재’를 검색해보면 가천대 석좌교수, SG연기아카데미 원장 등의 직함이 나온다. 실제로 이순재 대배우는 이번 학기도 가천대에서 연기지도를 하고 있다. 평소에도 후배들에게 연기에 대해 이야기 해온 그에게 이번 연극은 연기 메소드를 소재로 하고 있어 적역 중 적역이 아닐 수 없다. 노배우의 회상을 그린 공연은 있었으나 그보다 더 생생한 배우의 초상과 연기론을 주제로 한 작품이 왜 이제야 무대에 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도 없이 실체도 없는 무언가를 기다림을 주제로 한 부조리극으로 1953년 프랑스에서 초연되었는데, 국내에서도 임영웅 연출에 의해 반세기 넘게 무대에 오르며 관객들에게 회자된 명작이다.

이호재 전무송 조명남 주호성 등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맡아 호연했고, 올해에도 신구 박근형 콤비의 원로 버전이 화제를 모았다.

이순재 대배우는 원로들의 연습과 공연을 보며 아쉬움을 보이다가, 베케트의 원작을 오마주(원작에 대한 존경과 애정)하고 패러디(원작의 테마를 풍자)한 미국 현대작가 핸슨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만난 것이다.

원작이 무대 위 공연이라면 이 작품은 무대가 아닌 분장실에서 진행된다. 왜냐하면 출연 배우들이 메인이 아닌 언더스터디(대역배우)이기 때문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사진=파크컴퍼니 

에스트라공은 에스터로 바뀌어 이순재 대배우가 맡고, 블라디미르는 밸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배우들이, 그리고 원작에 나오는 소년 대신 로라라는 무대 조감독(ASM) 등 3인이 등장한다.

뉴욕 초연이나 런던 공연에서는 캐스팅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한데, 한국에선 기획사가 연륜 있는 꼰대 에스터와 햇병아리 신입 밸의 조합으로 캐스팅해 젊은 관객 취향에 맞게 연출했다.

노련한 최고령 배우와 생기발랄한 매체 배우들의 이색 조합은 관객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건강의 어려움을 뛰어넘어 무대에서 열정을 불사르는 이순재 대배우, 무엇보다 마이크를 쓰지 않고 육성으로 하는 모처럼의 무대에 연극배우 조합도 한 케이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패기 넘치는 40~50대, 또는 연륜이 있는 60~70대 연기파 배우 한두 명을 캐스팅해 이순재 대배우와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을 벌이는 조합을 두었다면, 순수연극으로서의 대배우의 명예를 높이고 연극, 특히 배우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것이다.

필자는 이순재 대배우와 콤비를 이루는 여러 조합 중 그래도 무대 경험이 많은 카이(43)를 택했는데, 10여 년 전 '레드' 때보다 무대 연기가 물이 올라 연기가 발랄하면서도 자연스러웠고 노배우와 호흡도 잘 맞았다. 로라 역 박수연은 신인인데도 극에 파격을 주는 상큼한 연기로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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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사진=파크컴퍼니 

놀라운 것은 이순재 대배우의 진지한 사실 연기다. 특히 화술에서 그만의 장점과 노하우를 최대로 살려냈으며, 운신이 쉽지 않을 움직임에서도 거의 허점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외국 매체의 리뷰를 보면 이 작품은 희극의 향연 또는 배우들의 코미디 연기로 인기를 모은 것 같다.

그런데 오경택 연출의 한국 버전은 간간 웃음이 터지는 재미를 주기는 했지만 희극이라기보다 정극에 가까웠다. 문화가 다른데 영미의 희극을 쫓았다면 이상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이를 한국 관객이 좋아할 수 있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순재 대배우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특기를 살리도록 배려했다는 것은 오경택 연출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의상, 분장, 조명 등의 스태프들이 이순재 배우를 평상시보다 더 늙게 노출시킨 점도 필자에게는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원작의 주제를 패러디해 더 가볍게 풀어냈지만 이 작품의 주제 역시 기다림이다. 대역 배우인 에스터와 밸은 무대에 설 날을 기다리며 분장실에서 죽치고 앉아 소식을 기다리지만 연출은 끝내 오지 않는다.

기다림의 운명을 타고난 배우들이라고 하지만, 기다림은 어려운 일이고 배우를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 작가나 연출은 우리 인생도 그런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관객들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들도 재미를 느끼도록 작품 곳곳에 여러 장치가 숨어있다. 그것을 찾아내 즐기는 것 또한 이 공연의 매력이다.

이순재 배우가 맡은 에스터의 상징은 벗기 힘든 구두이며, 카이가 맡은 밸의 상징은 모자다. 소품으로 나오는 악성 베토벤의 작은 흉상은 에스터의 예술혼을 상징한다.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면 베토벤처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계에 알려진 ‘맥베스의 저주’와 손톤 와일더의 '우리읍내'의 명대사가 인용되기도 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사진=파크컴퍼니 

특히 밸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에스터는 ‘마이즈너’나 데이비드 마멧의 ‘마멧’뿐 아니라 스타니슬랍스키의 순간 집중, 즉흥 연기 등 초급연기에서 중급, 고급 과정까지 언급해 배우 지망생이나 연극 애호가들에게 배우 연기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배우는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고, 기다림은 숙명입니다. 주어진 역할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죠.”

인터뷰 당시 ‘지금 뭘 기다리고 있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우리 나이야 당연히 라스트 댄스(last dance)를 기다리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 날이요, 하하.”(조선일보 인터뷰)

내년에 배우 데뷔 70년을 맞는 노배우가 건강 악화를 무릅쓰고 번역 초연작에서 열연하는 모습은 필자에게 가슴 뭉클했고 경외스러웠다.

만원 관객들이 대배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숨죽이며 몰입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어느 사회나 비판은 있게 마련이나 필자는 이순재 대배우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 최고의 배우이며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나 리처드 버튼보다 더 오래 무대에 선 현역임을 '고도를 기다라며를 기다리며'에서 당당하게 보여주었다.

병약해진 그가 건강을 추슬러 데뷔 70년을 맞는 2025년에 더 멋진 작품과 연기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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