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딴지 단원들의 집단 연기와 앙상블이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는 올해의 수작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연극다운 연극!”, “재밌고 감동적인 연극!”
문삼화 연출이 공상집단 뚱딴지와 함께 무대에 올린 김은성 작가의 ‘로풍찬 유랑극장’(8월 29일~9월 8일, 연우소극장)은 이 같은 찬사를 받으며 전회 매진의 ‘관객이 찾는 연극’으로 떠올라 가을 극단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첫공을 본 소감은 답답했던 여름의 체증을 시원하게 가시게 한 청량한 놀이판이었을 뿐 아니라 연극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에 대한 존재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연극은 행위이자 놀이이며 ‘환각과 현실’을 매개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이다. 소극장의 작은 공간도 우주처럼 넓게 팽창시킬 수 있고, 시공을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다.
문삼화 연출은 ‘로풍찬 유랑극단’을 선보이면서 연극을 정의하는 이 같은 멘트를 서두에 반복했다.
만석 관객과 배우들이 뿜어대는 열기로 달아오른 무대에 나각(螺角)과 풍물을 울리는 유랑극단이 동족상잔의 살육 현장에 들어서면서 극장 안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기대감이다.
세르비아의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원작으로 ‘로풍찬 유랑극장’을 썼다는 김은성 작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날인 1950년 6월 24일의 전남 보성 새재마을로 유랑극단이 흘러들게 설정했다.
당시 이 지역 일대는 공비(共匪) 토벌 작전으로 한 집 건너 초상이 날 정도로 살벌했고, 이념의 대립으로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비극의 현장에 로풍찬이 이끄는 유랑극단이 들어갔으니 어땠을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풍물을 쳐대고 분칠한 배우들이 장터에 뜨자 경찰은 이들을 경계했고, 마을 사람들은 기가 차 의심의 눈길로 그들을 주시했다.
전쟁과 연극!
대포소리 울리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마을로 흘러온 유랑극단 단원 한 명이 “연극이 뭐예요?”라고 단장에게 묻는다. 살벌한 극한의 상황 속에 연극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마을 사람들 역시 이 와중에 연극이 뭔 배부른 수작이냐며 부아를 터뜨리는데 유랑극단은 어떻게 이 난관을 뚫을 수 있을까.
김은성 작가는 “이 비극이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고 그들의 마음을 보듬고 위로하며 인간적으로 파고들었다. 현대사를 보면 전쟁터에서도 교향악이 연주됐고,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도 공연이 올려졌다면 새재마을에서도 유랑극단의 연극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여지를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문삼화 연출은 이 화두를 ‘인간다움’으로 풀었다. 전쟁이란 비극 속에 숨어있는 인간다움을...
문 연출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다움은 전쟁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며 연극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무대에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유랑극단의 공연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한 ‘노민호와 주인애’였다. 신파 같은 연극이었지만 거기에는 사랑과 눈물이 있고, 시골구석에서 보지 못한 신세계가 펼쳐졌다. 시답지 않게 여기던 마을 사람들이 넋 나간 사람처럼 연극에 빠져들어 눈물 콧물을 쏙 빼는 관극 장면, 배우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변화한 모습, 관객들 역시 극 중 극에 동참하여 함께 즐기다 보면 어느새 전쟁은 잊게 되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이 지닌 예술의 힘이고 재미가 아닐까.
필자는 문삼화 연출의 작품을 많이 보았고,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나 ‘지상 최후의 농담’ 등에서 보여준 개성 넘치는 연출에 매료되었지만 이번 ‘로풍찬 유랑극장’에서 보여준 마을주민들의 집단 관극 연기와 미장셴을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
유랑극단 배우들의 연기는 무대 밖에서 하고 무대에는 마을주민들이 단체 관람하는 장면이 펼쳐지는데 그 표정과 연기, 영상처럼 바뀌는 다각도의 미장셴에 관객들은 매료되고 마는 것이다. 필자 역시 문삼화 연출의 마술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전쟁은 없었고, 비극의 현장에서도 연극이 왜 필요한지를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00분 동안 극장 안은 시골 장터처럼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 배우와 관객이 일체가 되어 놀이를 함께 하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면, 이 연극의 핵심은 관객들이 공연 속에서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극심한 상황에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어땠을까, 느낌은 다르겠지만 각자 극의 일원이 된듯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문삼화 연출의 강점은 배우들의 집단 연기를 매끄럽게 조율하면서 배우 각각의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려낸다는 것이다. 13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이 배우들이 아니면 안 되는, 대체불가의 공연”이라고 할 만큼 배우들의 개인기와 앙상블이 단단하다.
연기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극단만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13명 중 여관집 주인 역을 맡은 정선철 배우만이 작은 신화 소속이고 12명은 모두 공상집단 뚱딴지의 단원들이다.
오랫동안 고락을 같이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최고의 호흡을 이룬 극단에다, 그들의 개성을 파악하여 개인의 캐릭터를 살려내면서 앙상블을 이루는 연출의 역량이 있어야 가능한 집단적 놀이판을 펼쳐낸 것이다.
공상집단 뚱딴지의 배우 12명은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극단원은 극단장 로풍찬 역의 김태완을 비롯해 남장 배우 고봉자 역의 해수, 연극에 미친놈 하가람 역의 조형일, 극단 막내 옥단미 역의 염서현 등 4명이다.
유랑극단이 머무는 여관집 멤버는 주인 김삼랑 역의 정선철, 안주인 조귀엽 역의 김지원, 귀엽의 남동생 처 양정숙 역의 김설 등 3명이다.
개성 있는 캐스트 3인방은 피칠갑 별명을 지닌 피창갑 역의 박영민, 학교 교사이자 좌익인 여청숙 역의 송설, 양조장집 딸이지만 정신이 나간 끝심이 역 박지은이다.
경찰과 마을 청년 3인방은 통행증 갖고 장난치는 순경 기회철 역의 채지성, 부하 순경 국상태 역의 서윤환, 동네 청년단원 송만년 역의 한기윤 등이다.
이들 한명 한명이 자기 역할을 살뜰히 해내면서 특히 스피디한 집단 연기에서 탄탄한 앙상블을 보였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개인기를 보는 재미가 어느 공연보다 쏠쏠했고 가슴에 와닿았다. 그냥 웃기는 게 아니라 소박하게 울린 것이다.
특히 여관집 주인 김삼랑 역을 맡은 정선철 배우는 이번 무대에서 신명과 끼가 넘치는 엿장수 한량 연기를 구성지게 펼쳐 관객을 웃고 울렸다. 연기파 김지원 배우도 빨갱이 아들을 둔 조귀엽 역을 맡아 가슴이 뭉그러지는 어미의 아픔을 절절하게 연기해냈다. 여기에 경찰관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된 양정숙 역 김설 배우는 유랑극단을 받아들이는 소통연기로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로풍찬 역 김태완 배우는 악조건 속에서 유랑극단 배우를 이끌어 비극의 현장에서 공연을 하는 단장 역을 몸 연기와 함께 뚝심 있게 해냈다.
극단원 하가람 역의 조형일 배우는 연극에 미친 연기를 진정성 있게 해내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남장 배우 고봉자 역의 해수 배우도 어려운 배역을 실감나게 연기했으며 상대 역인 옥단미와도 호흡이 잘 맞는 듀엣 연기를 보였다.
피창갑 역 박영민 배우와 옥단미 역 염서현 배우의 러브스토리도 가슴을 서늘하게 했고, 정신이 나간 끝심이 역 박지은의 연기도 연민을 느끼게 했다. 교사 역 송설 배우도 신념에 찬 운동원 역할을 야무지게 해냈다.
경찰 역을 맡은 채지성 서윤환, 청년 역 한기윤 배우도 놀이판의 추임새를 맞추면서 감초 같은 캐릭터 연기를 해냈다.
엄청난 연습으로 이루어낸 이들의 앙상블은 집단 연기상 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슬프고 아픈 비극의 주제를 ‘씻김굿’처럼 피비린내가 아닌 인간 냄새 물씬한 놀이판으로 풀어내, 극한의 상황에서도 한줄기 샘물 같은 청량함을 주는 연극의 본질을 살려냈기 때문이다.
‘로풍찬 유랑극단’은 6.25 전쟁으로 이어진 좌우의 대립에 쑥대밭이 된 비극의 현장을 무대로 하면서도 이념의 문제를 정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연극으로 아픔을 어루만지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연극의 역할을 보여주었다.
2012년 연우소극장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 “역사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 어떤 거울보다 역사의 아픔과 정면으로 대응하는 작품이다”라고 했던 평은 이번 공연에도 유효하다고 본다.
-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