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를 유영하는 원색의 코뿔소들, 희망과 위안 안겨
- ‘무소의 행성 b’ 8월 2일 개막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세파를 헤쳐온 코뿔소 화가 김혜주(58).
그가 19번째 개인전 ‘무소의 행성 b’로 8월 2일부터 7일까지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애호가들과 만난다. 오프닝은 8월 3일 오후 4시.
필자는 김혜주 작가를 ‘배우화가’로 부른다. 생활연극협회가 공연한 ‘호텔특실’(2020), ‘퓨전 춘향’(2021)에 배우로 출연, 대학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는 자신의 그림만큼 진지하고 강렬했다. 뒤풀이에서 막걸리 한잔하면 신명이 넘쳐 춤도 추고 포옹도 서슴지 않는 화가 배우 김혜주는 생활연극인들의 마스코트이자 자랑이다.
미술기자를 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보아왔지만 김혜주의 작업, 특히 ‘코뿔소 그림’들은 한 작가의 아픈 인생이 녹아있어 스토리가 절절한데다, 동식물의 탄탄한 조형성과 화사한 색채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미술품 컬렉터가 아니더라도 ‘한 점 사고 싶은 그림’이고 ‘인생사 사연이 있는 분들은 소통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사가 있는 그림, 작가 인생의 일기장이자 우리 모두가 다다르고 싶은 이상향(파라다이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 출품작 30여 점을 감상하기 전에 화가 김혜주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고향은 경남 삼천포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도시로 가방 보따리 세 개 싸들고 가출했어요.”
서울로 올라온 그는 추계예술대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1994년부터 2년간 신비의 땅 인도에서 인생 공부를 해가며 경험의 폭을 넓혀 자신의 화두를 찾아냈다.
1991년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보았던 ‘코뿔소’였다.
“무소는 초식동물이지만 강인한 힘을 가졌어요. 저는 무소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아픔과 기쁨, 서로를 돕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언젠가 낙원에 닿을 수 있다는 꿈을 그리고 있어요.”
2005년 진흥아트홀에서 ‘천국의 사파리’로 첫 개인전을 가진데 이어 2006년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파라다이스의 아침’전시를 의욕적으로 열었다.
그간 18회의 개인전은 코뿔소의 행진이라고 할만큼 다양한 군상들이 선보였다.
‘달빛 코뿔소’, ‘검은 코뿔소’, ‘코뿔소, 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처럼 또 혼자서 가라’...
‘파라다이스의 텀블링’, ‘파라다이스를 훔치다’시리즈와 ‘살며 사랑하며 꽃피며’ 주제의 개인전도 가졌다.
화가의 길 30년. 그림을 안 그리면 죽을 것 같아 고향을 등지고 단신 상경, 학업을 마치고 청춘의 피 끓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려 했지만 험난한 세상에서 인생의 쓰라림을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했다.
“운명적으로 미친 듯 끌려서” 한 남자와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았지만 행복은 잠깐... 불행의 늪에서 헤매다가 남매를 키우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독립했다. 생활을 꾸려가며 아이들 키우느라 육신은 고되었지만, 자신의 열정을 오롯이 화폭에 쏟을 수 있어 안정을 찾았고 힘들지만 ‘전업작가’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작가로서, 생활인으로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결혼생활의 후유증이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아 자신을 괴롭혔고, 일상의 무게보다 더 큰 짐은 그림을 못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몇 년간 작가로서의 긴 터널을 지나오며 다시 그림이 안 그려질까 봐 불안에 시달렸어요. 작업이 되는 기쁨은 찰나같이 짧았고, 하루에도 좌절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어요.”
화가 김혜주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고통과 절규와의 씨름이었다.
“새벽에 작업하다 아이처럼 꺼이꺼이 울었지요. 왜 이리 못났는지, 왜 이것밖에 안 되는지, 왜 이리 가혹한지...”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동력은 삼천포에서 짐가방 들고 그림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 때 자신에게 했던 다짐이었다.
“욕망에 배반하지 않고 싶다고... 내 청춘의 피 끓는 욕망에 나만이라도 응답하자고...”
이번 개인전은 화가 김혜주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제 수렁에서 헤집고 나와 당당히 세상에 설 수 있고, 이것이 제 그림이라고 보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슬럼프로 마음고생이 많았으나 잘 이겨낸 것 같아요. 몰입할 때가 가장 나답고 살았다는 느낌을 받는답니다.”
작업이 잘되지 않을 때는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었다. 어쩌다 대학로에 나가 연극 한 편 보는 것도 돌파구가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이번 개인전 작품들은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음악이 제게 엄청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답니다.”
이제 화가 김혜주의 작품세계에 접근해 보자.
“슬픔에도 빛이 있고, 슬픔도 찬란할 수 있다.”
삶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 말이 김혜주 그림의 요체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슈베르트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고, 화가 천경자는 지독한 한(恨)에서 채색과 풍물의 독창적 화풍을 이루었듯이 김혜주의 그림은 슬픔의 심연에서 길어낸 영혼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다.
김혜주의 슬픔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이 아니라 다시 우뚝 설 수 있는 에너지며, 더 나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희망이자 이웃과 나누는 위로이다.
“삶의 낯설움, 적응되지 않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당신들과 함께 나누는 위안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번 전시는 세상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동지 의식이에요.”
화가 김혜주가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코뿔소 화가’ 김혜주의 이번 개인전 주제 역시 코뿔소다.
작가가 줄기차게 그려온 코뿔소 시리즈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필자는 김혜주의 작품을 보며 코뿔소는 작가 자신이며 자화상(自畵像)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코뿔소란 무엇일까?
“세상의 어려움을 견디는 사람들의 내면을 코뿔소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형상화했어요. 세상의 풍파를 묵묵히 견디면서 뚜벅뚜벅 걸어서 파라다이스로 향하는 인간들의 여정이기도 하고요.”
“안녕~!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이번 개인전의 주제는 ‘행성 b’이다.
초식동물인 육지의 코뿔소가 거대한 우주를 유영(遊泳)하는 행성이 되어 관객과 만나는 것이다.
“외계의 행성 위에서 코뿔소가 자기만의 빛과 어둠을 품고 걷고 있거나 바람에 날려 공중을 떠돌아요. 대기는 안개 속처럼 몽환적이고요. 여기에 수묵과 여백이 더해져 또 다른 아우라를 연출하는데, 그 아련함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작가의 내면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어요.”
‘코뿔소’ 시리즈는 3개의 버전으로 되어있다.
초창기 작품들은 ‘파라다이스’연작이다.
분홍색과 노랑색 기린들이 큰 키와 자유로운 평화로움을 과시하며 어울린다. 꽃들이 가득한 꽃밭에서 날고 있는 작은 코뿔소들은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혹은 가서 살고 싶은 이상향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다음 버전은 ‘꽃을 새긴 코뿔소’연작.
온몸을 꽃으로 장식하고 걸어가는 거대한 코뿔소들이 화면을 압도한다. 새들이 등에 앉아 있기도 하고 몸 전체에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거대한 코뿔소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싶은 모든 사람들의 꿈을 담았다.
이번에 선보일 ‘행성 b’ 연작은 색채가 한층 화려해지고 구도가 다양하다.
멀리에 또 다른 행성이 달처럼 떠 있는 것이 보이는 ‘행성 b’는 김혜주 작가 특유의 개성 넘치는 색감의 조화가 특징이다.
화사하면서도 회색빛 그늘이 깃든 행성의 코뿔소들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안정감과 외로움, 쓸쓸함과 희망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체험을 안겨준다.
김 작가는 “세상에 대한 낯설움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동질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화폭의 코뿔소들은 다음의 메시지를 합창하는 듯하다.
“아 행복해! 서로 아껴주고 믿어주고 공감하면 우리 사이에 파라다이스가 만들어질 거예요.”
초창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던 코뿔소는 이제 우주를 날아다닐만큼 자유로워졌고, 색채는 밝아졌으며 무엇보다 슬픔의 강을 넘어선 행복한 이야기들로 화면이 출렁인다.
이번 개인전은 화가 김혜주가 온갖 시련을 넘어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묵묵히 내 갈 길을 간다”
김혜주 작가는 “이번 작업 기간은 고통과 절규와의 씨름이었다”“죽을똥 살똥 신음하듯 이번 작업을 마쳤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별에 던져진 순간부터 아 괴로운 팔자! 세상의 거대한 강을 거슬러 올라 아슬아슬하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괴감이 좌절감으로 날 조롱했었다. 노인이 바다에 사투를 벌였듯, 나는 작업실에서 사투를 벌였다.”
김혜주 작가와 ‘페친’인 필자는 지난 수년간 페북에 올린 그의 글에서 작가의 길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칼 위에서 춤을 춘다. 붓을 들고 색색물감을 호령하며... 신기가 떨어지면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서 외마디 비명을 질러가며 몸에 채워져 있던 수분들이 끝없이 눈구멍을 통해 솟구친다. 눈물에 밥을 말아먹고 눈물에 물감을 개어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다 붓 들고 죽어버리자! 나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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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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