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천경자 탄생 100주년 특별전...천 화백의 고향, 고흥을 가다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천경자 탄생 100주년 특별전...천 화백의 고향, 고흥을 가다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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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전 ‘찬란한 전설’, 올해까지 고흥분청문화박물관서 열려
- '길례언니2' 등 미공개 작과 관련 자료 전시
- 고흥군이 주최하고 둘째 딸 수미타 김이 총감독 맡아
- 특별전과 작가의 고향 둘러 본 고흥 현지 리포트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에서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 수미타 김 예술총감독과 함께한 필자./사진=정중헌 제공 

가보고 싶었던 그곳, 천경자 화백의 고향 고흥에 가다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전남 고흥) =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을 보기 위해 11월 24일 고흥을 찾았다.

화가인 둘째 따님 수미타 김(본명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이 예술 총감독을 맡아 기획한 이 특별전은 11월 11일 개막해 12월 31일까지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연극 '작은 할머니' 공연 준비로 바빴던 월초, TV를 켰더니 김정희 교수가 나왔다. 특별전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이었다.

김정희 교수와 화가 문범강 부부를 안 것은 천경자 화백 위작 사건 때였다. 당시 미국에서 나온 이 부부는 천경자 화백의 가짜그림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관계 요로에 호소하던 중에 기자인 필자를 만난 것이다.

위작 사건은 대법원 판결에서 진품 판정이 난 상태지만 이 부부는 외국의 감정전문가에게 의뢰해 요즘도 진실을 밝히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위작 사건으로 천경자 화백은 창작 의욕이 꺾였고 미국의 큰 딸 집에서 투병하다가 2015년 작고했다.

큰 따님은 2006년 갤러리 현대에서 어머니를 위한 대규모 회고전을 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과 함께 미완성 작품들, 귀중한 드로잉들, 의상과 여행 때 수집한 장신구들까지 공개되었고 도록도 발간했다.

큰 따님은 전시회 후 고흥군 등 몇 곳과 기념관 건립을 논의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천경자 화백 별세 한 달 후에야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아 작고 소식을 전했던 큰 따님은 요즘 활동이 뜸해 근황이 궁금하다.

'길례언니2' '제주도 풍경(섬의 인상)'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포스터

2024년은 천경자 화백이 전남 고흥군 고흥읍 서문리에서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둘째 따님 수미타 김 교수가 고흥군의 지원을 받아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개최했다.

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작품인데 천경자 화백은 생전 대표작을 비롯한 주요 작품 93점과 저작권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특별전에 협조를 받지 못해 개인 소장가나 미술관, 문화재단 등에 개별 대여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수미타 김 예술총감독은 이 일에 발 벗고 나서 미공개된 진귀한 몇 작품을 처음 애호가들과 만나게 했다. 또한 화가이자 교수의 특기를 살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흥 땅에서 태어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채색과 풍물로 독자적 화풍을 이루었으며, 붓 하나로 세계를 일주하여 스케치와 풍속화를 남긴 정열의 화가,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주옥같은 글을 남긴 천경자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7개의 주제로 펼쳐냈다.

TV에서 개회사를 하는 수미타 김 교수를 본 후 필자의 마음은 설레었다. 세인에게 잊혀져 가던 화가 천경자를 탄생 100주년, 사후 9년 만에 특별전으로 재조명, 애호가들과 만나게 해준 것도 기뻤지만 신문사 은퇴 후 출판과 공연으로 천경자 화백을 기리는 작업을 해왔던 당사자로서의 호기심과 희열이 밀려온 것이다.

필자는 2006년 갤러리 현대의 대규모 회고전에 맞춰 '천경자의 환상여행'이란 제목의 평전(評傳)을 출간했고, 몇 년 전에는 천경자 화가를 기리는 공연을 위해 희곡 형식의 '천경자-정과 한의 화가'도 냈다.

주호성 배우 겸 연출이 이 희곡에 영감을 받아 2021년 창작극 '천경자 천경자'(원작 정중헌, 각색 주호성 이은영, 연출 주호성)라는 제목으로 배우를 캐스팅해 연습까지 마쳤으나 유족 중 한 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일도 있다.

필자는 단막극 '내 슬픈 전설의 화가'(이광복 연출, 강경림 박준근 출연)라는 제목으로 2023년 제4회 영동생활연극축제 심천역(驛)단막극제에 참가했다. 또한 올해 11월 필자가 창단, 기념 공연을 한 극단 생활의 2025년 상반기 작품으로 정재은 창작의 천경자 연극을 원로의 연출로 공연할 계획이다.

고흥에 가기 전, 수미타 김 총감독에게 조심스럽게 문자를 넣었다. 뜻밖에도 환영의 답이 왔고, 11월 24일로 날을 잡아 특별전을 보러 가게 되었다.

KTX로 순천역에 내리자 출구에서 수미타 김 총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역시 예상 못 한 일이었는데, 택시를 대절해 순천에서 고흥 전시장까지 동행해 주고 전시해설까지 직접 해주어 진심으로 고마웠다.

전시장 입구는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탱고가 흐르는 황혼'과 화실의 천경자 화가의 사진이 대형 화면으로 세워져 관람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관계자에 의하면 개막 이후 평일에는 수백 명, 주말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1천여 명의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찾아 성황을 이룬다고 했다.

7개 주제로 펼쳐낸 천경자의 생애와 작품세계 

특별전서 만난 미공개작...'길례언니 2'를 만날 줄이야!

'길례언니2' '제주도 풍경(섬의 인상)'
천경자 작 '길례언니2' /부국문화재단 소장

7개 주제로 구성된 특별전의 첫 주제는 '길례언니'여서 반가웠다.

소록도 간호사인 길례언니가 운동회에 온 모습을 떠올려 그렸다는 '길례언니'는 천경자의 대표작 중에도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특별전에서 '길례언니 2'를 만날 줄이야!

부국문화재단 소장품이라는데, 오리지널보다 아우라는 좀 덜한 것 같지만 단아하면서도 정감이 깃든 인물의 구도가 돋보였다.

이로써 길례언니 1과 2를 쌍둥이처럼 비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길례언니2' '제주도 풍경(섬의 인상)'
천경자 작 '제주도 풍경(섬의 인상)'/뮤지엄 SAN 소장 

두 번째 주제인 '청춘의 문'에서도 미공개작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하나는 비교적 대작인 '제주도 풍경(섬의 인상)'이다. 종이에 채색이고, 120x150㎝로 뮤지엄 SAN 소장품이다.

제작 연도가 1956년이니 둘째 딸과 함께한 가족여행 시기로 추측된다. 구도가 시원하고 색감이 은은하면서도 제주도의 풍광이 빛을 뿜어내는 걸작이었다.

또 한 점은 '정(靜)'. 대한 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도록에서만 보던 원화를 처음 접해 반가웠다.

천 화백은 이 작품에 대해 “시든 해바라기 밭에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녀를 울면서 그렸다”고 회고록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 언급했다.

제3주제인 ‘꿈과 바람’도 이번 특별전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천경자 화가가 누하동을 떠나 옥인동으로 이사해 3평 정도 되는 화실을 처음 마련한 1960년대 중후반 안정된 시기로, 화선지를 올린 화판에 동양화 안료로 실험한 초현실주의풍 대담한 이미지의 대작 3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언젠가 그날'(종이에 채색, 195x135㎝, 뮤지엄 SAN 소장)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독창적 작품이다.

제4주제는 ‘파리 시절’.

1969년 뉴욕을 거쳐 파리에 정착한 화가 천경자는 약 반년간 아카데미 고에주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린 유화 다섯 점이 기록으로만 전해왔는데 이번에 유화 '누드'(캔버스에 오일, 99x71.5㎝, 천호준 소장)가 처음으로 선을 보여 관람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제5주제인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에는 천경자 화가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던 '붕어'와 '개구리' 채색화를 볼 수 있다. 부국문화재단이 소장한 드로잉 '유리상자 속의 꽃뱀'도 섬세한 선의 묘사가 눈길을 끌고 있다.

생전의 천경자 화백은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는데 특히 같은 연배였던 박경리 작가와 돈독한 사이였다. 박경리 작가가 원고지에 써 보낸 편지와 딸 정희에게 보낸 엽서가 눈길을 끌었다.

제6주제는 ‘자유로운 여자’다.

세계 스케치 여행 중 그린 '아이누 여인'과 '뉴델리' 등 개인소장 두 작품이 인상적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소장의 드로잉 작품들과 프리마 컬렉션의 채색화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제 천경자와의 환상여행은 막바지 ‘찬란한 전설’에 다다른다.

순천역 대합실부터 눈길을 끌었던 포스터의 그 명화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종이에 채색, 46x34.5㎝, 개인소장)을 만나는 순간이다. 원화가 주는 감동이 이런 것일까. 판화를 볼 때와는 다른 천 화백의 호흡과 손길이 느껴지는 것처럼 감동이 생생했다.

대한민국 예술원이 소장한 '여인상'의 모델은 예술총감독인 둘째 따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두 점의 오리지널을 보는 것만으로도 애호가들은 벅찰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라니... 아쉬움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한 기증 작품 몇 점만이라도 더 만나게 해주면 더 멋진 특별전이 되었을텐데...

그러나 최선을 다한 전시회 임을 모르지 않는다. 어머니를 알고 자신 역시 화가였기에 수미타 김은 이 어려운 전시 기획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한 점 한 점 천신만고 끝에 수집한 작품들로 정감 있게 공간을 꾸민 수미타 김 감독에게 존경이 마음이 들었다.

특별전에는 이번 고흥 미술여행에서 필자가 스친 드로잉 작품들과 귀중한 자료들이 많았다. 작가의 고흥 시절 사진, 보통학교 통지서 등 문서들, 1960~70년대 전시 도록과 작가 사진, 교류했던 문인들과의 편지, 필력이 남달랐던 천경자가 펴낸 대표적 수필집과 잡지, 단행본 표지, 50년대 수필이 실린 문예지, 해외여행 스케치 전시도록과 작가 사진 등등...

그리고 이이남 작가의 천경자 작품을 소재로 한 미디어 아트 전시도 작가의 또 다른 이미지를 안겨주었는데 오롯이 감상하지 못해 아쉬웠다.

고흥에는 ‘천경자 예술길’이 있다

녹동항 앞에서. 뒤에 보이는 산이 소록도이다.
녹동항 앞에서. 뒤에 보이는 산이 소록도이다./사진=정중헌 제공 

수미타 감독이 정해준 녹동항의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매스컴으로만 접했던 소록도로 향했다. 배를 타고 멀리 가는 줄 알았는데 다리가 놓여 택시로 5분도 안 돼 도착했다. 6.25 전쟁 후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했던 소록도는 지금 국립병원이 들어서 환자를 돌보고 있지만, 곳곳에 아픈 상흔들이 남아있었다.

다시 차를 돌려 고흥읍 구시가지로 향했다. 천경자 화백의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와 생가, 특히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첫 장에 실렸던 유년의 추억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산의 계곡에서 내린 물줄기는 또랑을 이뤄 서문리 동촌 마을에 흐르고 있고, 그 또랑은 또 작은 강이 되어 읍내 복판을 흐르고 있다...”

고흥읍 서문리 일대 천경자예술길 표지판 고흥읍"
고흥읍 서문리 일대/사진=정중헌 

서문리에 다다르니 돌로 쌓은 읍성이 보이고 아늑한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택시 기사께서 또랑은 지금 복개되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읍내 복판의 개천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옥하리 쪽으로 가던 택시 기사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네거리 위쪽을 가리켰다. 내려서 보니 ‘천경자 예술길’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고흥군이 올해 10월 말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천경자 예술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하고, 봉황길과 옥상길을 거쳐 천 화백의 생가가 있는 옥상마을 일대까지 약 851m 구간에 표지판을 달았다. 고흥군은 ‘천경자예술거리’도 조성해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

또한 고흥군은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천경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만들어 천경자 화백을 기릴 예정이다.

천경자예술길 표지판/사진=정중헌 

수미타 김 감독과 저녁을 함께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 메릴랜드주에 거주하는 수미타 김-문범강 부부는 최근 천경자문화재단을 설립해 천경자 화백을 기리는 사업에 나섰다고 했다. 그 하나로 ‘천경자 미술상’을 제정, 역량 있는 작가를 선정해 연말에 시상식을 갖는다고 했다.

둘째 따님을 통해 큰 따님이 어머니 천경자 화백의 유해를 허드슨강에 뿌렸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도 만인에게 사랑받아온 공인인데 허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에 가면 언니를 찾아 근황을 알아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고흥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느꼈다.

작가의 고향인 고흥군이 둘째 따님 수미타 김을 예술총감독으로 초빙해 탄생 100주년에 맞춰 특별전을 열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념비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현대 미술사에 독창적 자취를 남긴 천경자 화백은 가짜그림 사건으로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 그 진실은 밝히는 작업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사후 별다른 조명이 없어 잊혀져 가던 화가를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되살린 것은 고흥군과 둘째 따님이지만 이 또한 천경자 화백의 복이라고 본다.

필자는 평전에 “천경자 화백은 인생을 축제처럼 살다 간 행복한 화가”라고 썼는데, 이번 특별전과 고흥읍을 돌아보며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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