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 곳곳에 펼쳐진 수천 년 전 유적의 위용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2000년도에 처음 큘테페에 갔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4천 년 된 유적지라고 이야기했다. 2022년에 가니 발굴 조사 결과 7천 년 된 유물이 나와 3천 살을 더 먹은 유적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신석기 시대를 돌도끼 들고 수렵이나 채취로 동굴 속에서 생활할 것이라고 배웠다. 큘테페를 가보면 그동안 우리의 조상들을 얼마나 얕보았던 것인지 깊은 반성이 생긴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넓은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몸과 마음이 크디 컸던 그야말로 초인들의 시대를 살았음을 유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핸드폰같은 손바닥만한 기계 나부랭이에 스물네 시간 덜미 잡혀 사는 21세기 현대인들, 심신이 종잇장처럼 허약해진 우울한 후손들을 보면 그들은 과연 뭐라고 할까. 이육사의 시처럼 광야의 초인들이 살았던 시절, 튀르키예 카이세리 근교 큘테페로 신석기 초인들을 만나러 떠나 보자.
일포스티노 경비소장의 안내
우리가 간이 쉼터에서 쉬다가 허술한 유적 울타리를 헤치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경비소장이 우리를 찾아왔다. 마침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면 벌금형에 처한다는 경고판을 읽는 중이었다. 나는 20년 전에 여기는 마음대로 다니던 곳이라 몰랐다고 억지를 부리며 터키어 까막눈이라고 할 참인데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말 없이 눈감아 주었다.
그와 함께 내려오며 흔해 빠져서인지 굴러다니는 돌로 만든 네모난 구유 같은 유물들과 동그란 바퀴 같은 유물들이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유적지임을 나타내려고 갖다 놓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큘테페 카니쉬 왕의 도시는 산천만 의구한 채 가끔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두며 숨바꼭질을 하거나 들꽃들이 피었다 지고 유물 담는 수레가 녹이 슬어가는 정중동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함께 걷던 경비소장은 예전에 몰랐던 아랫마을 상인의 유적지 카룸을 앞장서 안내하기 시작하였다.
7천 년 전 흙벽돌의 위용
나는 늘 이곳 큘테페의 흙벽돌이 그리웠다. 흙으로 만든 벽돌이 이렇게 오랜 세월 점점 더 견고해지고 단단해져 결속력 있게 파편이나마 남아 유적을 유적답게 만들고 있다니... 이로 인해 이곳이 비로소 궁성이고 성벽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곳은 형체가 사라졌을지라도 흙벽돌로 지은 곳만은 카니쉬 사라이임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큘테페 아랫마을 Kaum(카룸) 상인의 도시, 세계 최초 무역센터 Caravan Sarai(카라반 사라이)
최소 4천 년 전 흙벽돌의 위용을 뒤로하고 왕의 사라이를 내려와 상인의 유적지 카룸으로 갔다. 윗마을이 들꽃 천지에 나무는 전무했다면 아랫마을은 올리브 나무와 이름 모를 덩굴들이 얽히고설켜 좀 더 마을 같은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천천히 둘러보다 먼저 답사를 다녀온 코냐 근처 1만 년 전 신석기 도시 차탈회익같은 집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카룸 히타이트 무역센터와 쐐기문자 점토판의 기록
평지에 제법 집들도 복원해 놓고 카니쉬 사라이와는 또 다른 유적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그 너른 평지를 천천히 거닐며 둘러보았다. 규모는 카니쉬보다 작아 보이는데 평지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차탈회익처럼 지붕이 평평하고 사다리로 집에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마구간도 있고 지금 농가의 주거 구조와 별 다를 바 없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의식주를 영위하고 생계를 유지할 일을 하는 점에서 최소한의 방식이 같은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여러 점토판의 기록은 상업과 결혼, 이혼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사와 공통점이 많아 더 흥미진진함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당시 소매로 물건을 사고팔 때는 은을 화폐로 사용하고 도매를 할 때는 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금은동청의 가격
금은 은보다 여덟 배가 비쌌고 구리 70㎏이 은1㎏과 거래되었다. 철은 은보다 40배가 비쌌다고 한다. 철이 그렇게 귀한 광물이어서 철기시대라 불렀던 모양이다. ‘금은동철’이 아니라 ‘철금은동’의 시대였다.
앗시리아인들이 거주하던 카룸에 이들의 사무실과 신전들이 세워졌다. 당나귀를 타고 들어온 이들은 아나톨리아에서 값싼 구리를 사가고 대신 주석이나 옷감 천을 팔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앗시리아 상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1천 년 이상 사용한 쐐기문자를 들여와 아나톨리아에서 기록의 역사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큘테페에서는 앗시리아인들이 남긴 쐐기문자 점토판뿐만 아니라 진흙, 돌, 금, 은, 납, 청동으로 만들어진 유물도 많이 나왔다. 유물 중에는 황소, 독수리, 토끼 등 동물의 모습이 담긴 컵과 주전자 형태가 많은데 이것들은 대부분 제의 행사 때 사용된 것들이다.
점토판은 주로 상업과 관련된 것이 많으나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것도 있다. 점토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상업계약서, 채무, 채권 관계 서류, 각종 기록 문서, 법정 판결문, 집 농지 노예 매매서 결혼과 이혼 관계 서류 등이 있다.
쐐기문자에 쓰인 인간의 희로애락, 결혼과 이혼 그리고 채무
채무 관계 점토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10주 안에 갚아야 하는 은세공품에 관한 부채 계약서인데 은 세공품 대금을 기한 내 갚지 못하면 매월 일정액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돈을 갚아야 하는 사람은 앗시리아인이고 보증인 세 명은 모두 아나톨리아인이었다.
결혼 문서를 보자. 앗시리아인 이디아다드와 아나톨리아 여인 아와나와의 결혼 약속에 관한 것으로 앗시리아 남자가 아나톨리아에서는 두 번 결혼하지 못하는데 만약 결혼한 여자와 이혼하거나 다른 여자와 결혼 한다면 은으로 배상하여야 한다.
이혼에 관한 서류는 어떤가. 아나톨리아 여성 사크리우스와 앗시리아 상인 아쑤르타 크라쿠라는 사람 간의 이혼 합의서인데 두 사람이 이혼에 합의하였기 때문에 위자료 지급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범죄 혐의자가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강물의 신에게 물어보는 물 심판도 있다. 범죄 혐의자를 강물에 던져 살아나면 죄가 없다고 한다. 강물의 신이 이 사람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영화 ‘바그다드 카페’와 같은 한낮 2시의 카룸을 소요하고 있을 때 한 가족이 소풍을 왔다. 터키는 가족 중심의 나라이다. 이 또한 내가 좋아하는 터키의 가족 문화인데 어른은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고 남자들은 가부장적이지만 가족적이다. 여성들은 우리네 옛날 헌신적이고 가정적 여성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렇게 가족 단위 소풍을 하는 모습이 흔하다. 대가족이 줄을 이어 들어와 한적하게 거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큘테페 고고학연구소
그렇게 답사를 마치고 경비안내소로 돌아오니 맞은편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나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한류의 힘인가. 난 놀랍고 반가워 한국어를 아느냐고 하니 나도 잘 아는 고려대 고고학 전공 이홍종 교수 제자 중 최지연 연구원이 이 연구소에서 함께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참 좁다.
내친김에 그곳을 구경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연구원들 있는 내부는 못 들어가지만 그 건물들은 안내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것만도 감지덕지하면서 그 막사 같기도 하고 관사 같기도 한 건물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연구소 안을 구경하고 나왔다.
터키인 연구원은 자신의 이름이 ‘지한’이라고 하면서 한국과 관계있는 이름 아니냐고 묻는다. 아마도 한국을 아는 ‘지한파’의 이름으로 설명을 해주었나 보다. 경비소장과도 친하게 지내는 이웃사촌들이라 갑자기 터키 친척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을 이렇게 진심으로 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국적을 물을라치면 이어지는 대화가 ‘카르데심kardeşim’이다. ‘나의 형제여’라는 의미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부터 합종연횡을 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우리가 형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너무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우리는 망각의 강을 건넌지 오래이다. 오직 만주벌판에서 서진을 거듭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지금 터키 땅에 이른 우리의 튀르크, 돌궐 형제들만이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마치 고목나무처럼 메마르고 갈라져 죽은 듯이 보이는 저 고목나무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잎을 틔워 살아있음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예전 동구 밖을 지키는 나무였을 법한 오래된 나무가 그 사실을 귀띔해주듯이 서 있었다.
큘테페를 떠나며
큘테페... 나에게 큘테페란 20여 년 동안 바람불고 흐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간간이 생각나던 전생의 추억 같던 장소였다. 이번 답사를 통해 앗시리아 상인들에 대하여, 그 시절 삶이 히타이트 문자로 쓰여졌다는 내용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DNA랄까 선조의 지문이랄까, 현재 튀르키예와 대한민국이 돌궐과 고조선, 고구려, 발해였을 때 어쩌면 삼신할미의 손바닥 자국으로 서로가 한 족속임을 알아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쌍둥이가 서로 헤어져도 피가 당겨 서로를 찾고 알아보듯이 일찍이 튀르키예 형제애를 경험한 나는 뒤늦게나마 큘테페를 찾아 나서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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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원 칼럼니스트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교수,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튀르키예(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와 헝가리 ELTE대학교에서 한국학과 교수, 서울대 규장각과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여 년간 해외 한국학 학회 발표와 특강, 외국 학생들과 한국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로 홍익대 문학박사를 받은 국어학자이자 동국대에서 삼국유사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다. 현재 월인석보와 삼국유사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국내와 유럽을 중심으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대장경의 길을 열다>,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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