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저항하고 맞서는 ‘창조’로 일군 결실...뮤지컬 ‘웨이스티드’
[주하영 365칼럼] 저항하고 맞서는 ‘창조’로 일군 결실...뮤지컬 ‘웨이스티드’
  • 주하영
  • 승인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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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브론테 남매(The Brontës) 전기 다룬 ‘록-다큐멘터리’ 뮤지컬, 2018년 세계 초연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사진=연극열전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사진=연극열전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은 힘겹다. 기술적인 변화이든, 사회·정치적인 변화이든, 변화는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급함을, 현상 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변화의 흐름은 인지하지만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삶은 벗어날 길 없는 답답함과 절망, 실망과 좌절로 느껴진다. 하지만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발버둥으로 인해 새로운 길이 열리고, 많은 다른 이들이 희망을 품는다. 길은 언제나 현재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끝없이 계속하는 이들의 간절하고 처절한 노력으로 만들어지곤 한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영국은 브론테 자매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와 행사들을 진행했다. 1816년에 태어난 ‘제인 에어’의 작가 샬롯 브론테를 비롯해 1818년에 태어난 ‘폭풍의 언덕’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 1820년에 태어난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의 작가 앤 브론테를 기념하는 과정들은 아버지인 패트릭 브론테와 유일한 남자 형제인 브랜웰 브론테를 빠뜨리지 않았다.

브론테 남매들은 목사인 아버지가 남자형제인 브랜웰을 위해 선물한 장난감 병정 세트를 가지고 상상의 세상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브론테 남매들은 목사인 아버지가 남자형제인 브랜웰을 위해 선물한 장난감 병정 세트를 가지고 상상의 세상을 구축하기 시작한다./사진=연극열전

2016년 3월, 저널리스트인 사라 휴스는 ‘옵저버’를 통해 “전복적인 브론테 자매들이 우리를 여전히 매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기성세대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청소년들로부터 사랑의 열병을 앓는 젊은이들,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진중함에 빠지거나 비판적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브론테 자매의 작품들이 상당히 “저항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결혼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매우 낯설고 뾰족한” 소설들은 억압된 욕구와 넘치는 열망, 존재를 향한 욕망을 분출하는 강렬한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황량한 황야와 거센 바람이 부는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Haworth)에서 자란 성공회 목사의 딸들이 펼쳐낸 이야기들은 “너무 필사적으로 글쓰기에 매진해서 단어들이 거의 종이 속으로 뛰어든 것 같은” 느낌을 담고 있었고, 자신에게 진실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었다.

브론테 자매들의 저항과 글을 쓰고픈 열망, 존재 추구의 욕망은 무대 위로 흩뿌려지는 종이들과 의자 위에 올라가 강렬하게 외치는 퍼포먼스를 통해 구현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브론테 자매들의 저항과 글을 쓰고픈 열망, 존재 추구의 욕망은 무대 위로 흩뿌려지는 종이들과 의자 위에 올라가 강렬하게 외치는 퍼포먼스를 통해 구현된다./사진=연극열전

극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서맨사 엘리스는 세상의 한계에 맞서고 저항하는 주인공을 담은 소설 가운데 구성을 더 잘 갖춘 작품들이 있음에도 브론테 자매들의 소설이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열린 결말” 때문임을 강조했다.

그녀는 샬롯과 에밀리, 앤의 소설들이 독자로 하여금 읽을 때마다 “새로운 어떤 것을 안고 떠날 수 있도록”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 주목했다. BBC의 저널리스트 마사 키어니는 아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연달아 죽음에 이른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의심할 바 없이 독자들에게 호소를 더했음을 주장했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학자들은 불륜으로 인한 사랑에 절망하고 술과 아편에 중독되어 섬망 상태, 환각증세를 보이는 브랜웰의 모습이 브론테 자매들의 소설 속 남성 인물 구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샬롯은 브랜웰을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학자들은 불륜으로 인한 사랑에 절망하고 술과 아편에 중독되어 섬망 상태, 환각증세를 보이는 브랜웰의 모습이 브론테 자매들의 소설 속 남성 인물 구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샬롯은 브랜웰을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태로 인식한다./사진=연극열전

로맨스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규제되지 않는 분노와 솟구치는 열망, 폭력과 학대, 중독과 광기, 자유와 의지를 매우 낯선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브론테 자매들의 소설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다. 또, 여성들이 글을 쓰던 일반적인 주제인 꽃과 바느질, 아름다움이 아닌 ‘저항적’이고 ‘주체적’인 선택, 세상과 맞서는 용기와 결단의 필요성과 같은 ‘급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분투, 생존을 위해 영혼이 무감각해지는 일을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하는 고난, 폭력적인 결혼 생활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 없는 고통, 상실로 인한 복수와 비인간적인 광기 같은 것들은 남성들만이 다룰 수 있었던, 당대에는 여성들이 다룰 수 없는 주제였다.

역사 연구자인 이사벨 쇼는 브론테 자매들이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과 같은 성별이 모호한 필명으로 글을 써서 성공하고, 여성 작가임을 밝힘으로써 ‘평등 교육의 힘’을 입증하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고 피력한다.

샬롯과 에밀리, 앤은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이라는 필명으로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를 출간한다. 커러와 엘리스, 액턴이 모두 같은 인물이며 남성작가라는 헛소문에 대응하기 위해 샬롯과 앤은 런던으로 향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샬롯과 에밀리, 앤은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이라는 필명으로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를 출간한다. 커러와 엘리스, 액턴이 모두 같은 인물이며 남성작가라는 헛소문에 대응하기 위해 샬롯과 앤은 런던으로 향한다./사진=연극열전

브론테 자매들은 목사의 딸이라는 사회적 위치로 인해 기본적인 문맹 교육과 종교 교육 외에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던 상급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아일랜드의 소작농 출신으로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아버지 패트릭은 그러한 교육이 주는 이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2018년 런던의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에서 브론테 남매의 비극적 생애를 다큐멘터리 형식의 록 뮤지컬로 다룬 ‘웨이스티드’가 세계 초연을 선보였다. “록-다큐멘터리” 혹은 “록큐멘터리(rocumentary)”라는 명칭이 붙은 ‘웨이스티드’는 2016년 영국의 새로운 뮤지컬 개발을 위한 페스티벌 BEAM에서 처음 소개되어 “영국 뮤지컬의 미래”를 위한 도약으로 여겨졌던 작품이었다.

세계 초연은 많은 평론가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4명의 배우들이 밴드 라이브 연주에 맞춰 쏟아내는 에너지에 호평이 쏟아졌다. 3시간에 달하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형식과 예리하고 신랄한 대본, 생동감 있는 록음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웨이스티드’를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와 ‘헤드윅’에 비견 되도록 만들었다.

영국 언론 ‘가디언’의 아리파 아크바는 “기상천외한 위트”와 짓궂음이 가득한 칼 밀러의 대본과 가사가 인물의 내적 깊이를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관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고전을 다루는 “진부함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또, ‘왓츠온스테이지’의 알룬 후드는 기존 뮤지컬 장르에서 벗어난 ‘웨이스티드’가 반드시 봐야만 하는 “껄끄럽지만 아주 신나는, 야심찬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4명의 배우들이 열정을 다하는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핸드마이크를 글을 쓰는 펜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노래부를 때 마이크로 사용하기도 하는 유연성을 통해 콘서트와 연극을 오가는 흥미로움을 제공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4명의 배우들이 열정을 다하는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핸드마이크를 글을 쓰는 펜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노래부를 때 마이크로 사용하기도 하는 유연성을 통해 콘서트와 연극을 오가는 흥미로움을 제공한다./사진=연극열전

국내의 경우,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연극열전 9’의 네 번째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소개되었다. 작곡가인 크리스토퍼 애쉬와 작가인 칼 밀러는 연극열전 프로그램북을 통해 샬롯과 앤이 처음 런던이라는 대도시를 방문해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를 경험했던 것처럼, 머나먼 런던의 뮤지컬이 서울에 닿았다는 사실에 놀랍고 경이로운 마음을 드러냈다. 브론테 남매가 뮤지컬 ‘웨이스티드’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자문하는 애쉬와 밀러는 ‘웨이스티드’가 담아낸 “에너지와 열정, 환희”에 그들이 전율해주기를 희망했다.

뮤지컬 ‘웨이스티드’의 가장 큰 특징은 “폭발적인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국내 공연의 음악감독을 맡은 이나영은 ‘웨이스티드’의 음악 안에 “친근함과 익숙함, 낯설고 뒤틀린 것이 공존”할 뿐 아니라 브론테 남매의 “삶의 치열함과 고통, 소망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설명한다.

작품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서사를 펼쳐내기보다는 4명의 인물들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작품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서사를 펼쳐내기보다는 4명의 인물들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사진=연극열전

그녀는 작곡가인 애쉬가 서사나 감정, 목적에 맞춰 각기 다른 록 장르를 넘버에 접목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색깔이 두드러지는 캐릭터인 ‘에밀리’와 같은 경우, “일렉트릭한 소리”를 더 많이 사용했다고 덧붙인다.

애쉬의 음악은 브론테 남매가 저항의 의지, 반항의 열기를 드러낼 때, 용솟음치는 억압된 감정을 분출할 때, 가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한 목마름에 괴로워할 때, 각기 다른 장르로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애쉬는 다크 포크 록, 개러지 펑크, 하드 메탈, 싸이키델릭 펑크, 컨트리 록, 블루스 록, 가스펠 록, 팝 펑크를 비롯해 ‘세비야의 이발사’의 음악을 편곡한 클래식 음악까지 활용한다.

‘더 리뷰스 허브’의 스테판 베이츠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쇼팽의 선율이 잘 어울린다면, 브론테 자매의 소설에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라고 질문한다. 그는 하워스라는 거친 자연과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기 위해 벌이는 삶의 투쟁, 시대의 한계에 발목이 잡혀 극도의 답답함을 느끼는 절망과 분노가 ‘록 음악’과 연계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서사를 펼쳐내기보다는 4명의 인물들을 그려내고, 그들의 삶 속에 자리했던 소망과 욕망, 고민과 좌절, 고립된 열정과 속박 등의 감정을 관객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는 일에 집중한다. 이 때문에 작품은 남매들의 전체 생애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빠르게 다루면서도 중요한 맥락들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을 발휘한다.

4명의 배우는 브론테 남매 외에 각 인물의 삶의 에피소드를 전달하는 데 필요한 다른 인물들, 가령 무슈 에제, 로빈슨 부인, 에밀리와 친밀했던 개 키퍼, 샬롯에게 상처가 되는 편지를 보냈던 계관시인 로버트 사우디, 출판업자 등을 연기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4명의 배우는 브론테 남매 외에 각 인물의 삶의 에피소드를 전달하는 데 필요한 다른 인물들, 가령 무슈 에제, 로빈슨 부인, 에밀리와 친밀했던 개 키퍼, 샬롯에게 상처가 되는 편지를 보냈던 계관시인 로버트 사우디, 출판업자 등을 연기한다./사진=연극열전

밀러의 대본은 네 인물의 삶의 아주 많은 부분을 보다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시적 응축성에 집중하면서도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브론테 남매에 관한 배경지식을 많이 갖출수록 숨겨진 재미를 발견하게 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브론테 남매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들도 흥미를 잃지 않고 작품에 몰입할 수 있으며, 현재와의 연관성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웨이스티드’는 남매들 가운데 가장 오래 생존했던 ‘샬롯’이 앞서 세상을 떠난 브랜웰과 에밀리, 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촬영하기 위해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9세기 중반, 소설 ‘제인 에어’의 작가로 유명해진 샬롯은 교구 목사의 아내 ‘아서 니콜스 부인’으로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구성의 뮤지컬은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질문을 던지는 주체, 혹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시청자의 입장에 놓이도록 만든다.

샬롯, 브랜웰, 에밀리, 앤의 전체 삶을 에피소드들을 통해 빠르게 회고하는 '웨이스티드'는 4명의 배우가 각 인물의 삶에 필요한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연극성'을 확보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샬롯, 브랜웰, 에밀리, 앤의 전체 삶을 에피소드들을 통해 빠르게 회고하는 '웨이스티드'는 4명의 배우가 각 인물의 삶에 필요한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연극성'을 확보한다./사진=연극열전

무대에 등장한 샬롯은 관객들을 향해 “시작할까요?”라고 말을 건네며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아서 니콜스 부인입니다. 샬롯 브론테로 태어났고, 글을 쓰던 시절에는 커러 벨이었죠”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샬롯의 죽은 동생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그녀의 이름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샬롯 브론테, 커러 벨, 아서 니콜스 부인!”

이름은 정체성을 의미하고, 샬롯을 포함한 브론테 남매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인터뷰 과정은 그들의 정체성을 밝혀내는 여정이자 기록, 삶의 증언이 된다.

1855년, 마흔을 앞둔 샬롯이 임신으로 인한 심한 입덧과 극심한 구토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에 근거해 보자면, 뮤지컬이 설정한 시점은 1854년, 샬롯이 그녀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부목사 니콜스와 결혼한 지 6개월이 되었을 즈음이다. 샬롯은 “곧 행복한 일이 생길 것 같아요. 몇 달 후에요. 많이 행복해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진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브론테 가문의 남매들인 샬롯, 브랜웰, 에밀리, 앤은 거친 바람이 부는 황야와 전염병, 죽음, 굶주림이 가득한 하워스에서 갑갑함을 느낀다./사진=연극열전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브론테 가문의 남매들인 샬롯, 브랜웰, 에밀리, 앤은 거친 바람이 부는 황야와 전염병, 죽음, 굶주림이 가득한 하워스에서 갑갑함을 느낀다./사진=연극열전

글에 마침표나 쉼표가 거의 없고 펜 끝으로 종이를 파내듯 글을 썼던 ‘에밀리’, 신실하고 순종적인 성격이지만 글을 통해 저항심을 드러냈던 ‘앤’, 그리고 자신감이 지나친 탓에 성취하지 못한 삶에 내적 절망이 컸던 ‘브랜웰’에 대해 언급하는 샬롯은 교회의 벨소리와 함께 어린 시절 남매들의 장면을 불러온다.

침실 4개와 야외 변소 하나를 갖춘 2층집 목사관에 브론테 부부와 여섯 남매, 두 명의 하인, 이렇게 총 10명의 사람들이 기거하던 하워스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인 마리아가 7개월간의 암 투병 후 사망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첫째인 마리아와 둘째인 엘리자베스는 열악한 환경의 학교에서 폐결핵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1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원래는 셋째였던 샬롯이 맏이가 되고, 그녀는 13살 무렵부터 남매들과 가로 5㎝, 세로 3.8㎝ 정도의 작은 사이즈의 잡지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남동생인 브랜웰이 12살, 에밀리는 11살, 앤은 9살 때의 일이었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사진=연극열전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당시 영국에서 유행했던 ‘블랙우드 에든버러 매거진’을 본떠 만든 100권에 달하는 미니 잡지들부터, 종이가 너무 비싼 탓에 책의 여백 공간에 글을 쓰고, 양념 포장지를 이용해 잡지 표지를 만들어야 했던 일 등을 언급하며 시간을 빠르게 회고한다.

제대로 된 하수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던 하워스는 묘지 안장 건수가 한 해에 4만 4천에 이를 정도였고, 목사관 옆 교회 마당에는 끔찍할 정도로 많은 비석들이 들어차 있었다.

장례식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와 묘석을 깎는 석공의 작업 소리, 애도와 슬픔이 드리워진 공기는 하워스의 일상이었다. 그 속에서 브론테 남매들은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함께 상상의 세상을 창조해 나갔다.

에밀리는 책을 출간하고 싶어하는 샬롯에게 저항하지만,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어하는 샬롯의 설득에 의해 아무도 자신이 썼다는 것을 모르게 필명으로 출간하는 일에 동의한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에밀리는 책을 출간하고 싶어하는 샬롯에게 저항하지만,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어하는 샬롯의 설득에 의해 아무도 자신이 썼다는 것을 모르게 필명으로 출간하는 일에 동의한다./사진=연극열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지만 돈을 벌기 위해 가정교사 혹은 학교 선생 일을 해야 했고, 경험과 모험을 통해 글을 쓰고 싶지만 혼자 여행을 하거나 걷는 일이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는 자매들을 옭아맸다.

펜보다 바늘을 들고 있는 시간이 많아질 때의 분노, 시력이 나빠져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교구를 잃기 전에 목사관을 학교로 만들고픈 포부가 좌절될 때의 절망, 달라질 것이 없는 현재로 인해 기록할 필요조차 없어 보이지만 미래를 위해 일기를 쓰는 희망, 반복되는 실패에도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확신하며 계속 다른 일을 시도하는 가운데 느끼는 불안과 초조...

‘웨이스티드’는 운명이 전갈 한 마리를 손 위에 올려놓으면, 오히려 손을 꽉 쥐어 독침이 파고드는 것을 인내하고, 마침내 전갈을 짓눌러 죽여 고통을 극복하고 저항하는 샬롯의 자세를 브론테 남매들의 삶 속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드러낸다.

“방황하는 헛된 존재”, 창조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하는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불안감! 그들의 방황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가진다.

"방황하는 헛된 존재", 창조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하는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불안감, 방황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다를 바 없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방황하는 헛된 존재", 창조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하는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불안감, 방황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다를 바 없다./사진=연극열전

마음을 담아내는 기술의 매체가 발전하고 달라졌을 뿐 기록하고, 창작하고, 시도하고, 노력하는 분투의 과정은 200년 전이나 현재가 다르지 않다. 전 재산을 들여 출간한 시집이 딱 2권 팔려도 “태어나길 기다리는 모든 말들”을 뱉어내기 위해 소설을 써내려가는 브론테 자매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추구한다.

‘웨이스티드’의 초연 연출을 맡았던 아담 렌슨은 영국 잡지 ‘빅이슈’를 통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웨이스티드’가 역경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며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이들에 관한 것”임을 강조한다.

'웨이스티드'는 브랜웰이 그린 브론테 자매들의 초상화의 구도를 무대 위에 그대로 구현한다. 2015년 브랜웰이 자신의 모습 위에 기둥을 덧칠해 지워버린 사실이 입증되었고, 그로 인해 비록 지워지긴 했지만 브론테 남매가 한 그림에 담긴 유일한 초상화가 되었다. 현재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웨이스티드'는 브랜웰이 그린 브론테 자매들의 초상화의 구도를 무대 위에 그대로 구현한다. 2015년 브랜웰이 자신의 모습 위에 기둥을 덧칠해 지워버린 사실이 입증되었고, 그로 인해 비록 지워지긴 했지만 브론테 남매가 한 그림에 담긴 유일한 초상화가 되었다. 현재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사진=연극열전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거나 전기적 인물의 소개가 아닌, 현재의 젊은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는 렌슨은 ‘낭비되다, 헛되다’라는 의미의 단어인 ‘Wasted(웨이스티드)’를 작품명으로 사용한 것은 ‘반어적’인 것임을 설명한다. 자신들의 삶이 헛되고 낭비된 것이었으며, 아무도 자신들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죽음에 이른 브론테 남매들의 생각과 다르게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낭비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잊혀지는 허망한 존재에 대한 ‘불안’은 우리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기에 품고 있는 감정이다.

화가와 작가, 플루티스트 가운데 어떤 것에도 성취를 이루지 못한 31세의 브랜웰이 불륜의 사랑의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술과 아편 중독에 시달리다 결핵으로 사망한 일은 때 이른 죽음의 시작이 된다. 몇 달 뒤 30세의 에밀리 또한 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이듬해에 앤 역시 결핵으로 인해 2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0세의 에밀리는 오빠 브랜웰이 사망한 지 몇달 지나지 않아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영국 소설에 센세이션을 불러온 '폭풍의 언덕'을 출간한지 1년 남짓 되었을 무렵이었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30세의 에밀리는 오빠 브랜웰이 사망한 지 몇달 지나지 않아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영국 소설에 센세이션을 불러온 '폭풍의 언덕'을 출간한지 1년 남짓 되었을 무렵이었다./사진=연극열전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높은 기준을 설정했으나 재능의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 브랜웰은 좌절감을 반영한 듯 자신의 모습에 기둥을 덧칠했지만, 브론테 남매가 그려진 유일한 초상화를 남겼다.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을 펴낸 지 1년 남짓 된 시점에 죽음에 이르러 자신의 성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의 소설이 남긴 인물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또, 자매들 중 가장 덜 알려진 앤의 두 번째 소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은 그녀가 죽은 지 1년 뒤에 출간되었지만, 21세기에 재평가의 필요성이 강조되며 새로운 인기를 얻고 있다.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샬롯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브론테 남매의 삶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낭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은 모든 인간이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장면.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샬롯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브론테 남매의 삶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낭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은 모든 인간이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사진=연극열전

산업혁명과 철도의 등장, 새롭게 형성된 계층과 기존의 질서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기 위해 발버둥을 계속해야 했던 브론테 남매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투쟁했다. 그들이 세운 길은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더 많은 젊은이들이 존재의 의미를 찾아 분투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지금도 하워스의 바람이 부는 언덕을 찾는 수많은 브론테 순례자들이 황야를 바라보며 깨닫게 되는 것은 꿈틀대는 욕망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던 열망, 새로운 시도를 통해 현재를 벗어나려는 의지, 창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용기가 그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 아닐까? 변화는 끝없이 시도하는 이들의 노력을 통해 ‘길’로 형성된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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