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박제된 시간 속의 사랑...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박제된 시간 속의 사랑...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 주하영
  • 승인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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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첫 희곡 작품, 2018 프랑스 도빌 ‘책과 음악상’ 수상작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콘셉트 컷. 19세기 미국 뉴욕주 제네시오에 살고 있는 사제 '시미언 피즈 체니(정동환)'는 자신의 정원에 날아온 모든 새들과 자연의 소리를 악보에 기록해 '야생 숲의 노트'라는 책을 남긴다./사진=세종문화회관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길가에 뒹구는 낙엽에도, 길모퉁이에 솟아오른 잡풀에도, 뜨거운 햇살 아래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도 이름이 있을 수 있음을 돌아보는 ‘섬세함’이 있다. 섬세함은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것, 한 때 존재했으나 그 흔적을 잃은 것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주의를 기울여 유심히 바라보는 노력만으로도, 주변을 채우고 있는 자연의 소리에 한 동안 귀를 기울이는 인내만으로도, 세상의 많은 것들은 새롭게 태어나고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섬세함’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보다 평화로운 곳으로 만든다.

완전히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도, 겨울바람이 들이치는 복도의 옷걸이에 걸려있는 코트나 케이프의 움직임에도, 뜨개질 하는 여인의 바늘 끝부분이 반복적으로 부딪쳐 만들어내는 소리에도 ‘음악’이 있음을 알아 본 한 사제가 있었다.

19세기 미국 뉴욕주 핑거레이크스 근처의 사제관에서 살고 있던 ‘시미언 피즈 체니’는 자신의 정원을 찾아 온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자연이 담고 있는 모든 소리를 악보에 기록한 ‘야생 숲의 노트’라는 책을 남겼다.

261페이지에 달하는 ‘야생 숲의 노트’에는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도 나름의 음악이 있다. 수도꼭지에서 반쯤 찬 양동이 속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라”는 시미언 피즈 체니의 말이 담겨 있었다.

사제관으로 날아든 다친 새를 새장에 넣고 먹이를 주는 사제 '시미언(정동환)'. 악보에 기록된 새들의 모든 울음소리는 훗날 안토닌 드보르자크, 모리스 라벨, 올리비에 메시앙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부여하게 된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공연 장면. 사제관으로 날아든 다친 새를 새장에 넣고 먹이를 주는 사제 '시미언(정동환)'. 악보에 기록된 새들의 모든 울음소리는 훗날 안토닌 드보르자크, 모리스 라벨, 올리비에 메시앙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부여하게 된다./사진=세종문화회관

하지만 자연 속에서 음악을 발견한 시미언 피즈 체니의 섬세함은 음악학자들에게는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를 기록한 비웃음거리에 해당했고, 생태학자들에게는 새들을 가두어두고 고문하는 학대자로 보였으며, 자연주의를 예찬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 그대로의 멜로디를 인간 음계에 임의적으로 편입시키려는 어리석은 시도로 읽혔다.

누군가의 행복과 평화, 아름다움은 다른 누군가에게 지루함과 괴상함, 추함으로 여겨지며 혹독한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아름다운 기원의 소리에 인간의 귀를 약간 기울였을 뿐”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세상의 공격과 퇴출의 시도, 그리고 냉담함이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변론했다고 한다.

“새들의 노래에는 천국이 있다. 하느님은 에덴에서 새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셨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포스터 컷. 파스칼 키냐르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음악, 위로가 되는 음악, 새들의 노랫소리가 담긴 생생한 자연의 소리와 같은 음악"이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포스터 컷. 파스칼 키냐르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음악, 위로가 되는 음악, 새들의 노랫소리가 담긴 생생한 자연의 소리와 같은 음악"이다./사진=세종문화회관

최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는 ‘시미언 피즈 체니’의 삶에 상상력을 발휘해 탄생시킨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가 공연됐다.  

1991년 ‘세상의 모든 아침’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2002년 ‘떠도는 그림자들’로 공쿠르 상을 받은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2017년 희곡 형식의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을 출간하자마자 2018년 도빌 시로부터 ‘책과 음악상’을 수상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을 번역한 송의경에 따르면, 키냐르는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받았을 때보다 “문학과 음악을 분리하지 않는 상”을 받게 된 것을 훨씬 더 기뻐했다고 한다. 송의경은 ‘옮긴이의 말’에서 키냐르의 수상소감을 이렇게 전한다.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찬가입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음악, 위로가 되는 음악, 새들의 노랫소리에 담긴 생생한 자연의 소리 같은 그런 음악 말입니다.”

영원히 멈춰버린 시간, 유리로 된 온실 속에 아름답게 가꾸어진 화초를 바라보듯 자신의 행복했던 짧은 과거를 박제된 시간 속에 가둔 남자,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고통을 고독 속에 감내하며 아내가 머물렀던 정원의 소리를 모두 기록한 한 사제의 이야기는 키냐르의 상상력을 타고 고통과 기억, 사랑과 시간, 그리고 애도의 메시지를 무대 위 ‘정원’에 새롭게 펼쳐낸다.

희곡의 형태를 띠고 있는 키냐르의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실제 무대로 구현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내레이터가 작가의 환영인 듯 인물의 내면인 듯 시종일관 무대 위에 존재하며, 시미언과 그의 딸 로즈먼드라는 단 두 명의 인물조차 서로가 대화하는 장면보다 독백에 가까운 대사들이 더 많고, 시미언의 죽은 아내 에바와 딸 로즈먼드는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콘셉트 컷.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희곡에서 시미언의 죽은 아내 '에바(이경미)'와 딸 '로즈먼드(이경미)'를 1인 2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콘셉트 컷.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희곡에서 시미언의 죽은 아내 '에바(이경미)'와 딸 '로즈먼드(이경미)'를 1인 2역으로 설정하고 있다./사진=세종문화회관

게다가 가장 중요한 정원의 소리, 피아노와 첼로의 능숙한 연주, 자연과 음악이 하나가 되는 공간을 구현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된다. 또 키냐르는 희곡에서 빛이 대각선으로 비추며 사제의 정원과 거실을 둘로 나누는 상당히 어두운 무대, 그 경계에는 양철로 된 물뿌리개 하나가 놓여있는 그런 공간을 지시하고 있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키냐르의 희곡에 각색을 더하고, 나름의 해석을 더한 탓에 무대 장치며, 음악이 이루어지는 방식, 대본의 구성에 차이를 보이는 조금 다른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를 만들어냈다.

각색을 맡은 황정은은 프로그램북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이라는 제목이 말하는 ‘우리’란 누구일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면서 “처음에는 시미언과 에바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정원은 “시미언과 에바, 로즈먼드와 내레이터 모두의 것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공연 장면. 파스칼 키냐르의 희곡에는 시미언의 피아노와 로즈의 첼로 연주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에서는 '내레이터(김소진)'의 피아노 연주와 피아노(김인애), 플룻(양미현), 첼로(이현정), 바이올린(명다솜)으로 구성된 연주자들의 음악으로 대체된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공연 장면. 파스칼 키냐르의 희곡에는 시미언의 피아노와 로즈의 첼로 연주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에서는 '내레이터(김소진)'의 피아노 연주와 피아노(김인애), 플룻(양미현), 첼로(이현정), 바이올린(명다솜)으로 구성된 연주자들의 음악으로 대체된다./사진=세종문화회관

키냐르는 희곡의 서문에서 계절성 우울증에 시달리던 11월 초, 감당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시미언의 “죽은 아내를 향한 사랑이 끊임없이 서성이는 정원”을 통해 비로소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미국 제네시오에 위치한 한 사제관이 품고 있던 정원, 그 정원은 무엇이기에 자연의 소리를 가득 품은 기이한 악보를 세상에 내놓도록 만들고, 그 소리에 영감을 받은 드보르자크, 라벨, 메시앙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새로운 곡을 창작할 수 있도록 인도했던 것일까? 또, 기나긴 겨울밤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한 작가의 영혼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일까?

1842년과 1843년, 사랑하던 아내가 딸 로즈(로즈먼드)를 낳다가 죽음을 이른 비극의 순간까지 시미언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1년, 그리고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딸 로즈의 성장을 지켜보며 고통과 상실을 홀로 고독 속에 품어온 28년의 시간...

시미언은 24살의 젊은 아내가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끊임없이 서성이던 정원, 봄철 내내 커다란 스웨터에 밀짚모자를 쓰고 작은 숲과 연못을 갖춘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꽃삽과 물뿌리개를 들고 손수레를 끌던 아내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시미언(정동환)'은 2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그림자가 어려있는 정원의 모든 소리들을 악보에 기록하지만 출판사로부터 끊임없는 거절을 당한다. 딸 '로즈(이경미)'는 아버지에게 출판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면서 좋아하는 일을 한 것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두 인물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레이터(김소진)'는 바닥에 앉아 시미언의 책을 거절한 출판사의 편지들을 늘어놓는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공연 장면. '시미언(정동환)'은 2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그림자가 어려있는 정원의 모든 소리들을 악보에 기록하지만 출판사로부터 끊임없는 거절을 당한다. 딸 '로즈(이경미)'는 아버지에게 출판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면서 좋아하는 일을 한 것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두 인물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레이터(김소진)'는 바닥에 앉아 시미언의 책을 거절한 출판사의 편지들을 늘어놓는다./사진=세종문화회관

그에게 아내는 24살 젊은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고, 흘러간 28년의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푸르러지고 풍성해지는 ‘정원’의 향기로 존재한다.

시미언은 아내보다 4살이나 나이가 든, 이제는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버린 딸 로즈에게 떠날 것을 권한다. 갑작스러운 이별의 제스처, 아버지의 차가운 제안에 분노하는 로즈가 외친다.

“내가 왜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 왜 갑자기 여기를 떠나라고 하는 건데? 내가 싫어? 아빠는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시미언이 말한다.

“정말 이유를 알고 싶어? ... 넌 죽은 엄마보다 나이를 더 먹었어. 그게 이유야.”

[세종] 컨템포러리S_우리가사랑했던정원에서_시미언 내레이터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연습현장./사진=세종문화회관

시미언은 딸 로즈가 아내와 똑같이 닮은 얼굴로 죽은 아내 에바가 살았던 24년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은 하나도 두렵지 않지만 로즈가 나이 드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로즈가 외친다.

“살아있는 딸을 보는 게 견딜 수 없이 괴롭다는 거네. ...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네. 내 존재 자체가 비극이네!”

시미언이 말한다.

“나는 네 엄마라는 미로에 갇혀 있어. 정원에 갇혀 있어. 나한테는 아름다운 정원이지만 너한테는 아니야. 너한테는 감옥이야. 그러니까 너는 벗어나야 해. ... 이 정원은 에바의 얼굴이고, 난 이곳에서 행복해. 이 정원은 늙지 않아. 심지어 더 젊어지고 있어. 내가 갇힌 곳은 그런 곳이야.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곳, 그래서 내가 이곳에 있는 모든 소리를 악보에 담은 거야. ... 나는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아. 한 번도 필요했던 적이 없어. 그러니까 떠나!”

시미언은 왜 로즈에게 떠날 것을 강요하는 걸까? 정말로 그의 삶에 딸이 필요치 않기 때문일까? 딸의 존재가 평생 견뎌야 할 고통이기만 했던 걸까? 무엇 때문에 그토록 모질게 딸을 정원에서, 그의 삶에서 밀어내고자 한 것일까?

기억은 편집된 시간이다. 꺼내 볼 때마다 아름답게 채색되는 행복한 시간은 영원 속에 머무를 수 있다. 어쩌면 시미언이 사랑한 것은 죽은 아내가 아니라 “한없이 행복하다”고 느꼈던 그 때의 감정, 그 때의 냄새, 그 때의 추억인지도 모른다.

작은 숲과 연못을 갖춘 시미언의 정원과 사제관은 무대 위에 '박제된 시간 속에 갇힌 추억'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또한 60개의 스피커를 통해 자연의 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무대. 작은 숲과 연못을 갖춘 시미언의 정원과 사제관은 무대 위에 '박제된 시간 속에 갇힌 추억'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또한 60개의 스피커를 통해 자연의 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

봄의 정원, 모든 것이 생동하던 그 시간에 아내는 죽음의 강을 건넜다. 핏덩이 아이만 그의 곁에 남겨놓은 채... 시미언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행복의 시간을 영원히 가져가버린 아이가 원망스럽다. 아이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아닌 아이를 살려달라고 의사에게 외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단지 아내를 잃어야 했던 삶이 억울하고, 안타깝고, 고통스럽고, 슬플 뿐이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더 아내를 닮아간다. 심지어 아내가 살아있었다면 그런 모습으로 나이가 들어가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도록 만든다. 아내의 ‘나이듦’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했던 아내와의 행복했던 1년이 아니라 죽음으로 상실된 28년의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고통과 외로움,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견뎌 온 긴 세월을 말이다.

기억은 공간이다. 사라진 것의 자리를 보존하려면, 그것을 담고 있는 기억이 유지되어야 한다.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딸로 인해 상실된 삶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딸을 볼 때마다 상실된 행복을 깨닫는 일이 슬픔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딸을 보내야 할 시점이다. 딸은 딸의 인생을 펼칠 수 있는 미래가, 아버지는 딸로 인해 끝없이 환기되던 상실이 아닌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 속으로 회귀할 수 있는 미래가 필요하다.

힘들게 간직해 온 아내에 대한 기억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간직할 수 있는 시간, 딸의 존재가 그의 삶에 발을 딛기 이전의 시간, 딸이 아내의 몸속에 둥지를 틀기 이전의 시간, 그 짧은 행복 속에 영원히 박제되어 갇히고픈 마음, 시미언은 아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원에서의 ‘고독’을 갈망한다.

세종 컨템포러리S_우리가사랑했던정원에서_시미언 정동환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연습현장. 배우 정동환/사진=세종문화회관

키냐르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사랑은 “혼자가 아닌 고독의 형태”로 등장한다.

샹탈 라페르데메종은 ‘파스탈 키냐르의 말’에서 키냐르의 인물들은 “매 순간 고독을 갈망”하고, “사랑은 혼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연인들은 “영혼 대 영혼으로 마주한다”고 말한다.

딸 로즈가 떠나고 ‘고독’ 속에 혼자 남겨진 시미언은 죽음으로 육체를 잃었지만 남편 앞에 ‘꿈’처럼 모습을 드러낸 에바의 환영과 “영혼 대 영혼”의 만남을 이룬다.

아내가 떠나던 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수의를 입히고 아내의 유해를 정원의 연못에 뿌리던 순간의 고통, 죽은 아내의 유해가 연못 밑바닥에 다 가라앉기도 전에 죽음을 잊은 듯 로즈의 탄생에 주의를 기울이던 사람들의 모습, 위로와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장례식장에 몰려든 사람들의 말들, 이 모든 것들이 소란스럽고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속에서 홀로 ‘고통’을 감내하던 시미언의 내면은 내레이터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 리듬을 만들어낸다.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다는 거지? 위로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난 역겨워. 차라리 고통스러운 게 낫지. 나만의 고통을 나누는 건 배신이야! ...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게 되면 오히려 나는 더 기뻐. 당신과 단 둘이 대화할 수 있으니까.”

파스칼 키냐르는 '내레이터(김소진)'를 통해 극 속에 작가인 자신의 목소리를 부여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인물들의 내면, 환영을 대신하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존재처럼 무대 주변을 배회하는 신비로움을 창조한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콘셉트 컷. 파스칼 키냐르는 '내레이터(김소진)'를 통해 극 속에 작가인 자신의 목소리를 부여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인물들의 내면, 환영을 대신하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존재처럼 무대 주변을 배회하는 신비로움을 창조한다.

고통의 순간에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고통은 오롯이 혼자 겪어내야 하는 것이고, 힘든 과정 속에 솟구치는 모든 내면의 대화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침묵’이다. 사실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부재’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부재의 고통도 없을 테니까.

따라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사랑을 지속한다는 의미일 수 있고, 그렇기에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여정, 아주 바람직한 여정, 생각보다 괜찮은 여정”일 수 있다. 시미언이 죽은 아내를 품은 ‘정원’ 속에서 끊임없이 애도를 이어나가고 ‘박제된 시간 속의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선택을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미언은 말한다.

“당신이 사랑했던 정원에 있으면 마치 내가 당신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살아있는 당신의 내면에 살아있는 나! ... 당신은 거의 여기에 있어. 그래서 나도 거의 행복해!”

‘정원’은 그 곳에 속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남겨진 공간이고, 추억이 숨 쉬는 시간이다.

정원은 자연 속의 공간 그대로지만 시미언에게, 에바에게, 그리고 로즈에게 각기 다른 의미의 ‘기억’으로 자리한다.

시미언에게 정원이 사랑의 공간이었다면, 에바에게 정원은 자유의 공간이다.

에바는 결혼으로 인해 혼자만의 시간을 잃은 답답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정원을 찾는다.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오롯한 고독의 공간을 갖기 위해 그녀는 정원으로 탈출한다.

로즈에게 정원은 추모의 공간이다. 정원은 ‘아버지’이다.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의 흔적을 끝없이 담고 있는 공간이자 그녀가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채 행복을 느꼈던 향기가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피아노는 로즈의 귓가에서 음악을 잃고 모든 음이 산산이 깨지며 흩어지는 ‘상처’로 존재하지만, 정원은 어린 시절 꽃에 물을 주는 방법을 알려주던 낮은 음성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품고 있다.

나이 든 아버지의 병상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딸 '로즈(이경미)'. 정원을 향한 사랑과 애도의 마음은 아내를 그리워하던 남편 시미언에게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 로즈에게로 이어진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공연장면. 나이 든 아버지의 병상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딸 '로즈(이경미)'. 정원을 향한 사랑과 애도의 마음은 아내를 그리워하던 남편 시미언에게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 로즈에게로 이어진다./사진=세종문화회관

시미언은 에바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정원을 놓지 못하고, 에바는 자신의 곁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정원에 머무르며, 로즈는 아버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정원에서 아버지와의 화해를 꿈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로즈는 끝없이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던 아버지의 정원의 소리를 담은 악보를 자신이 모은 돈으로 출판한다.

50대가 된 로즈가 사제관에 아버지를 기리는 현판을 부착하는 날, 천둥과 함께 요란스럽게 소나기가 쏟아진다. 어느새 빗줄기가 잦아들고 물방울만 똑똑 떨어지며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는 정원을 바라보며 로즈가 말한다.

“아빠는 엄마에게서 정원에 대한 사랑을 이어받은 거야. 아빠는 평생 그 일을 했고 이제는 내가 해야 해!”

시미언의 아내를 향한 애도는 로즈의 아버지를 향한 애도로 이어진다. 정원은 모든 기억을 품는다. 사랑과 슬픔, 고통과 고독, 애도로 이어지는 모든 추억의 시간들은 정원에서 그 푸르름을 지속하며 향기를 남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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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y0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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