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시사만화계 전설' 김성환 화백, 전두환도 못막은 '고바우 영감'
[그때 그 인터뷰] '시사만화계 전설' 김성환 화백, 전두환도 못막은 '고바우 영감'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9.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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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최초 필화사건을 겪는 등 우여곡절 많아”

[편집자주] 우리나라 최장수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의 작가이자, 시사만화계의 '대부' 김성환 화백이 8일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32년 개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9년 18세의 나이로 '연합신문'에 시사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면서 신문만화가로 데뷔했다.

고인이 1955년 동아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4컷 만화 '고바우 영감'은 일간지 시사 만화의 상징으로 불린다. 6.25전쟁 중 다락방에서 탄생된 이 캐릭터는 50여년간 우리 현대사를 풍자하고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며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1955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1만4139회가 연재된 '고바우 영감'은 우리나라 최장수 시사만화로 2001년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고바우의 유식한 잡학 왜?’(2013), ’고바우 김성환 화백의 일본 거상기담’(2016) 등의 집필 활동을 이어왔다.

2013년 분당 자택 작업실에서 <인터뷰365>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던 김성환 화백을 추억하며 그와의 생전 인터뷰를 소개한다.


 ◆ “만화로 최초 필화사건을 겪는 등 우여곡절 많아” 

분당 작업 자택실에서 김성환 화백

‘고바우 영감’으로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김성환(80) 화백을 만났다.

‘고바우 영감’는 요즘 세대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기록에만 존재하는 만화다. 무려 1만4139회를 게재했고 고바우 탄생 50주년 기념우표도 발간됐으며 올해 초 1만743매에 달하는 원화가 기록문화재로 등재됐다.

이승만 정권 시절 등장한 고바우 영감은 50년 동안 우리 현대사를 풍자해 왔고 국민 특히 서민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1955년 동아일보에서 시작된 고바우의 여정은 1980년대 조선일보를 거쳐 1990년대 문화일보에서 계속되어 2000년 마무리됐다. 특히 동아일보 연재 시절, 지금 중장년 세대들은 신문을 받아들면 제일 먼저 4컷짜리 만화 ‘고바우 영감’부터 펼쳐보면서 그날 뉴스의 큰 흐름을 인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고바우 영감이 기록 속으로 사라졌어도 김성환 화백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이다. 2010년 ‘그 시절 그 모습’이라는 주제로 7년에 걸쳐 준비한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최근 저서 ‘고바우의 유식한 잡학 왜?’(아라출판사 펴냄)도 펴냈으며 지금도 개인전을 준비하는 중이다.

전설을 처음 만나는 기분으로, 인터뷰 하기 싫어한다고 처음에는 미루던 김 화백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자택으로 찾아가던 날은 난데없는 장대비까지 쏟아져 긴장감이 더했다. 김 화백은 그 긴장을 풀어줄 만큼 온화한 웃음으로 기자 일행을 맞았다.

곧바로 지하에 있는 널찍한 작업실에 그와 마주 앉았다. 요즘 작업중인 십장생도의 초벌 그림들을 등 뒤로 하고 앉은 김 화백은 여든이라는 연세가 무색할 만큼 곱고 활기찼다. 웃으면 악간 내려앉는 눈꼬리하며 언뜻언뜻 고바우 영감의 얼굴선이 김 화백에게서 보였다.

분당 작업 자택실에서 김성환 화백

-최근 출판한 책을 봤습니다. 그 많은 소재들을 어디서 다 구하셨습니까.

한 10년 동안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썼어요.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면서 모은 상식과 연재물 등을 모아 엮었고 책을 쓰면서 다시 300여 권의 서적을 참고하고 인용했어요.

-책에 고바우 커리커처 인지를 붙인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 인지 붙이는 책이 거의 없거든요. 서점에서 선생님 책에 인지가 있는 걸 보고 놀라 혹시 다른 책들도 있나 하고 찾아보니 조정래 선생의 최신작 ‘정글만리’에만 인지가 붙여진 걸 봤습니다.

요즘 인지들을 안 붙이나요? 난 죽 붙여왔는데. 옛날에 천경자 선생 책도 출판사에서 인지를 붙이지 않고 서점에 내보내 문제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책을 내면 꼭 인지를 붙입니다.

-현재 작업중인 다른 책이 또 있습니까.

일본 4대 재벌의 생성 과정을 담은 책을 준비중입니다. 국방일보에 연재됐던 거예요.

김성환 화백 ‘고바우 영감’ 기록들

-이제는 기록 속에 남아있지만 ‘고바우 영감’은 전설적인 만화 주인공입니다. 고바우 캐릭터는 6.25전쟁 시절 다락방에서 탄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성에서 태어나 아버지 따라 만주로 갔다가 중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되어 서울로 왔어요.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해방이 되니까 한 자리 할 줄 알고 귀국해서 사직동에 자리를 잡았죠. 그런데 현실은 영 달라서 한 달 후 집을 비워줘야 되는 처지가 돼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아버지 따로, 계모이신 어머니(생모는 소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와 여동생 따로, 난 만주에서 아버지와 같이 독립운동 했던 사람 집에 얹혀 살았죠. 그러다가 친지 중 한 분이 정릉에 집을 마련해줘서 비로소 가족이 모여 살게 됐는데 그러자마자 곧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고바우 캐릭터는 그 집 다락방에 숨어서 만든 200여 개 만화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락방에 숨으셨어요.

6월 28일에 북한군이 들어왔는데 그때는 북한군이 그대로 부산까지 갈 줄 알았어요. T-34 소련 탱크를 몰고 들어왔는데 당시 북한군 복장은 소련군과 똑같았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북한군이 길거리에서 젊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의용군으로 잡아가서 다락방에 숨었죠. 

-워낙 만화를 잘 그리셨나 봅니다.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이후 귀국해서 경복중(현 경복고) 다닐 때 미술반장도 했습니다. 만화는 1949년 초에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를 실은 게 출발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연합신문에 14회 연재를 해서 받은 돈을 생계에 보탰습니다.

-그때가 십대 후반일 땐데 왜 하필 40, 50대 중년 가장을 고바우 캐릭터로 잡으셨어요.

당시는 아동만화만 있을 뿐 성인을 위한 만화는 없었어요. 그래서 나이든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면 아이 어른 모두 다 볼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적인 만화들이 주를 이루던 때인데, 고바우는 머리카락도 한 올이고 표정도 없습니다.

다른 만화 주인공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 처음부터 고바우 표정을 없앴어요. 표정 대신 머리카락 한 올로 표현했죠. 보통 때는 앞으로 구부러져 있다가 화가 났을 대는 똑바로 서고 놀라면 구불구불해지고.

정릉 다락방에서 탄생한 ‘고바우 영감’은 1950년 ‘사병만화’ ‘만화신문’에 실리다가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처음에는 직사각형 얼굴에 각진 코, 작은 안경, 콧수염에 중절모를 쓰고 등장했다. 이후 각진 얼굴이 둥글게 변하고 모자 대신 머리카락 한 올이 등장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얼굴 형태는 훨씬 둥글어지고 뭉특하고 큰 코에 보일락말락한 콧수염을 기르고 입은 아예 없는 캐릭터로 변화됐다.

가장 유명한 필화사건을 초래했던 ‘경무대 청소부사건’과 서민들의 물가 걱정을 풍자한 만화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시사만화로 인기가 높아졌고 필화사건도 겪었습니다.

당시(이승만 대통령 시절)는 독재라지만 그래도 언론자유는 있었어요. 중앙정보부가 없던 시절이니 시경 사찰과에서 지능적으로 간섭을 하긴 했습니다. 당시 필화사건을 두 번 겪었는데 한번은 ‘만화춘추’에 그린 한 컷짜리 야당의원 데모를 풍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일보에서 경무대를 풍자한 4컷짜리 만화입니다.

-경무대 풍자만화가 유명합니다. 1958년 1월 23일자 경무대 청소부 만화인데요, 그 만화는 필화사건을 작정하고 그리셨다면서요.

당시 대통령을 무슨 왕 대하듯 하는 것이 우스워서 실험삼아 그려봤습니다. 한 달여를 준비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 권력실세이다 보니까 전국에 가짜 이강석이 판을 쳤고 가짜 이강석인 줄 모르고 시장이며 도지사들이 아부를 하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면서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풍자한 겁니다. 만화가 게재된 후 시경 사찰과에 끌려가 4일 동안 곤혹을 치렀지만 그것도 예상한 일이었습니다. 잡혀가서 왜 그런 만화를 그렸느냐고 묻길래 ‘유명해지기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무슨 민주지사 같은 답을 기대했던 모양인데 그런 답을 들으니 오히려 당황하더군요. 결국 판사가 경범죄로 벌금형을 내려 생각보다는 싱겁게 끝났습니다. 하하.

-목표는 성공하셨습니까.

성공했습니다. 다른 신문에서도 내가 잡혀간 일을 사설로 쓰는 등 큰 화제가 됐죠. 인지도가 아마 100배는 높아졌을 겁니다. 그 만화가 실렸던 다음해 이승만 정권 쪽에서 사람이 왔어요. 경무대 총경이라고 밝히면서 내게 이기붕 당시 부통령에 대한 만화를 그려달라더군요. ‘고바우가 본 이기붕’이라는 제목으로 20페이지 정도의 만화를 그려주면 그걸 전국에 뿌려 선거운동을 하겠다는 거죠. 원고료로 300~400만원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빌딩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에요. 하지만 거절했습니다.

-만화 이후 개인적으로 감시나 사찰을 당하진 않으셨습니까.

이승만 정권이 물러간 후에 그랬습니다. 집 주변에 하숙 치는 집이 몇 군데 있었는데 하숙생을 가장해 괴한들이 들어가서는 난동을 부리고 짚차에 군인들이 타고 와서 소란 피우고... 지능적으로 나를 골탕 먹이고 기를 죽이려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비슷한 일들을 겪으셨죠.

검찰, 중앙정보부에 각각 두 번씩 끌려갔습니다. 중정 때는 라이온스 호텔에 4일간 잡혀 있었는데 협박만 했지 구타나 고문 같은 건 없었어요. 풀려난 후 미국 시사위크 기자가 취재를 왔는데 내가 지하감옥에 잡혀가 얻어맞은 걸로 알고 왔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런 일 없다, 잠도 잘 자고 있었다고 하자 그럼 기사가 안된다고 그냥 갔어요. 이후 워싱턴포스트 기자도 왔는데 같은 대답을 하니까 그냥 돌아갔습니다.

필화사건 등을 얘기하는 김 화백. 웃는 모습이 자신이 그린 만화 주인공 고바우와 똑 닮았다./사진=인터뷰365

-‘고바우 영감’이 인기를 끌면서 대우도 달라졌겠습니다.

해마다 다른 곳에서 오라는 스카웃 제의가 있었는데 안 갔습니다. 대신 동아일보 측에 국장대우를 달아달라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촉탁’이었습니다. 30대 후반에 국장대우를 다니 편집국 내 기자들 분위기가 안 좋았습니다. 당시 차장급이 40대였거든요.

-그럼 편집국 내에서 좀 불편한 점도 있으셨겠네요.

처음엔 기자들 사이에서 말이 있더니 오히려 국장대우를 다니까 말들이 없어졌어요. 그전에는 기자들이 자신들은 하루종일 취재하는라 고생하는데 나는 1시간 만에 슥슥 그리는 것 같으니까 흰눈으로 보기도 했어요. 그리는 시간이 짧을 뿐 하루종일 얼마나 소재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줄 몰랐으니까요. 국장대우를 달고 현실적으로 직위를 가지니까 차차 무시를 못하더군요, 그때, 겸손은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한 시간 만에 슥삭슥삭 그리신다는데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십니까.

모든 신문을 다 보고 거기서 소재를 찾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하는데 오래 걸리지 그리는 시간은 얼마 안 걸렸어요.

-그 아이디어 중에 기자들이 별로 반겨 하지 않는 소재도 있었습니까.

기억나네요, 동아일보 시절인데, 난 술을 많이 안 마시고 가끔 가다 맥주 한 병 먹는 것이 고작인데, 가만 보니 경제난에 맥주 소주값 오른다는 기사는 전혀 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만화로 무자비하게 깠죠. 그랬더니 경제부장은 물론 사회부장까지 얼굴이 뻘개져서 달려왔어요. 술도 잘 안 먹는 양반이 그런 건 어떻게 알았냐며. 맥주 티켓을 12장 주고 갔는데 뇌물 같아서 안 먹었어요.

-고바우 영감 만화 중 가장 빨리 그린 것은 무엇입니까.

김대중씨 가택연금 해제 사건을 그린 겁니다. 기자들이 조만간 해금된다고 귀띔을 해서 미리 구상을 다 해놓았다가 발표되자마자 15분 만에 그려 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인기가 높을 시절 4단 만화 밑에 광고가 달릴 정도였지요.

하루는 회사 측에서 나한테 와 회사 경영이 어렵다며 만화 밑에 한 컷 크기 광고를 넣으려는데 어떻겠냐고 묻더군요. 5단 광고를 내는 업체의 광고를 만화 밑에 한 번 더 넣어준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신문 받아들면 고바우 영감부터 보던 때였으니 인기 최고, 광고가도 최고였죠. 당시 부장급 9명 월급이 그 광고에서 나왔을 정도입니다.

-광고 얘길 하시니 1974년 동아일보 기자 해직사태, 광고중단 사태가 동아일보 재직시절 단연 큰 일이었겠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 주시죠.

당시 기자가 180명쯤이었는데 그 가운데 40여 명이 정부 비판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해직됐습니다. 나도 포함됐죠. 그 작업을 한 사람이 보안사 언론 담당 강모 대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 중에 어떻게 기자 수십 명을 해직할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전 대통령이 부정부패에 연루됐거나 정부 비판 기사를 썼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렇다면 만화가는 왜 해고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것이 고바우 영감 이야기라는 것을 안 전 대통령이 뒤로 넘어지며 누가 그랬냐, 없던 일로 하고 만화 연재는 계속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안사 강모 대령이 문공부 장관에게 나를 복직시키라고 말했고 이는 다시 공보국장에게, 공보국장은 개인적으로 친한 동아일보 부국장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회사 내부 사정으로 일이 좀 꼬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조선일보로 옮기게 됐습니다. 정부 쪽은 어느 신문이든 고바우 영감이 다시 연재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조선일보 때는 어땠습니까.

조선일보로 옮기면서도 연재회수는 동아일보 연재에 이어졌습니다. 내가 1962년도에 고바우 저작권 등록도 해놓았거든요. 내가 조선으로 옮기자 동아일보 판매 쪽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지방 쪽 지국장 항의가 빗발쳤죠.
처음에는 조선일보도 고약했습니다. 정치에 욕심을 내는 간부가 있어서 자꾸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간섭을 했습니다. 그가 고치라 한 만화 다섯 개를 모아 방상훈 사장에게 가져갔습니다. 방상훈 사장은 내 중학교 후배입니다. 고치라 한 것을 보여주면서 그 간부더러 직접 그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방 사장이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다시 문화일보로 옮기면서 고바우 영감 탄생 50주년을 맞았습니다.

50년간 1만4139회를 연재했습니다. 개인이 이렇게 오래 연재한 것은 아마 세계 기록일 겁니다. 미국 만화가 딕 영 같은 경우도 3대를 이어 했지 개인적으로는 내가 했던 만큼 못했습니다. 문화일보에서 2000년 9월 마감했습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문화일보는 정동 쪽에 가깝지만)는 모두 광화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도 있는데, 특별한 추억도 많으셨겠습니다.

별로 없어요. 기자들과는 물과 기름 같아서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위장병을 얻은 이후 가끔 하던 술도 끊어서.

기자에게 슥삭슥삭 고바우 영감을 그려주는 김 화백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1962년 서른 살에 했습니다. 친구 약혼자 소개로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다니던 집사람을 만나게 됐습니다. 마음에 들어 매일 만나 40일 만에 결혼했어요.(작업실로 내려오기 전 잠깐 인사드린 부인은 작은 체구에 고운 모습이었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딸 둘은 벌써 스무살 된 손자를 뒀고 아들은 미국에서 전기공학 박사를 하고 현재 강사로 있습니다. 애들한테 만화가를 권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슥슥 그리는 것 같지만 힘들고 돈도 못 벌고.

-요즘은 신문 만화 대신 웹툰이 젊은이들 사이 인기입니다.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컴퓨터 못해서 본 적 없어요. 얼마전 모 대통령에 대해 그린 만화를 우연히 봤는데 그건 만화가 아니라 악담이더군요. 만화는 은유와 풍자가 묘미이지 직접 대놓고 하는 게 아닙니다.

-연세에 비해 굉장히 고우십니다. 실례지만 혹시 보톡스 같은 거라도...

하하하. 그게 뭔지 알긴 합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왕년의 대스타 여배우(이름을 직시했지만 시술 여부를 직접 확인치 못해 이름은 가린다)도 한 것 같아 보이던데... 잘못 맞으면 안된다면서요?

-그럼 건강을 챙기시는 비법이라도 있으십니까.

맨손체조 정도. 그나마도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7월 말에 대장에 있는 물혹을 수술하기로 해서. 병원에서 당분간 운동을 하지 말라더군요. 하루 정도 입원하면 되는 간단한 수술입니다.

-지금 하시는 작업이 저겁니까.(김 화백이 앉아있는 뒷벽에는 초안인 듯한 그림이 잔뜩 붙여져 있었다.)

작업 중인 장생도입니다. 동양화 물감으로 그리고 있는 중인데 후년쯤 개인전을 열 생각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업실을 잠깐 돌아보니 벽에 기록문화재 등록증서, 예전에 찍은 사진, 고바우 커리커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특히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고양이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그 얘기를 하자 “고양이를 좋아하느냐”며 반색을 한 김 화백은 오래 된 화첩을 꺼내 다른 고양이 그림들도 보여줬다. 그리고 화첩에 슥슥삭삭 고바우 영감이 고양이를 데리고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후 사인도 해줬다. 선으로 그려진 고바우 영감 눈은 웃는 듯 작은 반달 모습이었고 머리카락 한 올은 평소처럼 앞으로 굽어있었다. 볼수록 김 화백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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