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필요성을 반증하는 '매우 이상한 공연'...연극 '임영준 햄릿'
예술의 필요성을 반증하는 '매우 이상한 공연'...연극 '임영준 햄릿'
  • 주하영
  • 승인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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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작 김정·하수민 연출 '임영준 햄릿'
연극 '임영준 햄릿'의 공연장면/사진=극단 즉각반응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원제는 “덴마크의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이다. 햄릿은 이미 한 나라의 왕위를 이어야 할 ‘왕자’라는 신분을 갖춘 상류층 인물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정의한 바대로 관객들로 하여금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할 만한 카타르시스를 품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대한민국 예술계에 종사하는 ‘배우’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데 있어 ‘햄릿‘이라는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떠올리는 진중하고 고뇌에 찬 고통 속의 인물 ‘햄릿’이 아니라 “가장 쓰잘데기 없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80분이라는 시간을 고군분투하는 ‘배우’를 햄릿이라 지칭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 '임영준 햄릿'의 공연장면. 조연출이자 배우인 박정호(왼쪽)와 배우 임영준(오른쪽)/사진=극단 즉각반응 

지난 8월 3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는 극단 ‘즉각반응 프로젝트 내친김에’와 두산아트센터가 공동 기획한 연극 ‘임영준 햄릿‘의 막이 올랐다.

2017년 ‘사계절 연극제-여름’을 통해 처음 관객들에게 소개되었고 서울문화재단의 ‘최초예술지원작’으로 선정된 ‘임영준 햄릿‘은 연출가 김정과 하수민의 공동연출 아래 조연출 박정호와 배우 임영준이 열연하는 총 4명의 제작진이 함께하는 연극이다.

“너희는 니들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데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너희를 먹여 살려야 하니?”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게 예술 따위는 사치다!”라며 차라리 “예술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제작진은 ‘예술의 쓸모없음’을 증명하는 것만이 대한민국 예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들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를 고민하며 연극계에 종사하는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햄릿‘이라는 엄청난 이름의 연극을 “뮤지컬, 신체극, 희극, 비극, 마임, 현대무용, 한국무용, 무속신앙, 힙합, 구걸, 먹방, 팬미팅”등의 방법을 통해 ‘매우 이상한 공연’으로 만드는 선택을 했다.

만약 그들의 의도가 ‘충격을 통한 관객들의 질문’을 겨냥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공연을 보고 난 관객이라면 누구나 ‘대한민국에서 배우로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가?’라는 질문이나 ‘예술이 정말 그렇게 쓸데없나?’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테니 말이다.

연극 ‘임영준 햄릿’(사진=극단 즉각반응).2
연극 '임영준 햄릿'의 공연장면/사진=극단 즉각반응 

연극을 의미하는 ‘드라마’(drama)란 단어는 “행위를 재현한다”는 의미의 동사 ‘act’를 품고 있다.

배우는 몸으로 ‘실연’(實演)하여 인물의 삶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대사와 몸짓, 분위기를 통해 이야기 속 인물의 성격과 행동, 생각, 그리고 의도들을 드러낸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연기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개인으로서의 ‘나’와 이야기 속 인물로서의 ‘나’를 분리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역할 학습’이라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자신에게 빗대어 이해하고 표현하는 연극(play)을 구현해왔다.

‘놀이’(play)의 방식으로 엄마가 되어보고 아빠가 되어보는 ‘소꿉장난’, 바닷가의 모래로 성을 쌓거나 두꺼비 집을 구현하는 ‘모래놀이’, 망토 하나를 두르고 ‘영웅’이 되어보거나 나무토막 하나로 ‘자동차’를 그려낼 수 있는 인간의 상상력은 애초에 인간을 “극화적 존재”(the dramatic being)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예술이라고 부르는 ‘연극’은 실제로 그러한 ‘놀이’로부터 시작되었고, 인간만이 지닌 상상력을 통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빗대어 보는 ‘감정이입’의 방식으로 상대에 대한 이해와 연민, 공감에 이르는 ‘소통의 도구’가 되어왔다.

그러한 연극이 ‘살아남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업적 예술로 바뀐 것은 사실상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도 늘 연극은 ‘후원자’의 도움 없이 흥행하기 어려운 예술이었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가 이름을 날렸던 16세기~17세기의 영국에서만큼은 여왕과 왕이 지원하는 국가산업이었다. 연극이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며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관객들과 비평가들의 호응이 필요했고, 수익성을 따지는 투자자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연극 '임영준 햄릿' 포스터

연극 ‘임영준 햄릿‘은 아직 유명세를 타지 못한 배우, 연출, 혹은 극작가가 그러한 연극계에서 경험하게 될 소외와 아픔, 상처, 그리고 서글픔과 같은 감정들을 매우 당황스러운 장면들의 연속을 통해 ‘웃음’으로 관객들에게 표출한다.

극장 안의 공간은 마치 ‘임영준’이라는 한 배우의 팬미팅 장소처럼 꾸며져 있다. 배우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는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는가하면 스크린에는 데뷔할 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배우의 일대기를 담은 사진들이 그 때의 심경을 담은 짧은 글들과 함께 슬라이드로 상영된다.

90년대 여름을 강타했던 대중가요들이 흥겹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대를 바라보면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조연출과 무대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마련된 객석 의자에 붙어있는 수많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의 정상들과 스타들의 사진에서부터 만화 캐릭터 사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왜 거기에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객석을 채우고 있다. 극이 시작되면 구석에 앉아있던 조연출이자 배우인 박정호가 앞으로 나와 오늘의 주인공이자 배우인 ‘임영준’을 소개한다. 배우를 아는 지인들이 더 많이 객석을 메우고 있다는 연극 ‘임영준 햄릿‘은 그렇게 팬들의 환호 속에 시작된다.

종이로 만든 왕관을 쓰고 나온 배우는 마치 ‘덴마크의 왕자’라는 자신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기라도 하듯 왕관을 벗어 맨 앞줄에 앉은 관객의 머리 위에 씌워준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해야 할 연극의 주인공인 ‘햄릿’을 내려놓고 실제 삶 속의 주인공인 ‘임영준’으로 돌아간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도 꿋꿋이 ‘배우’라는 길을 걸어온 인고의 과정을 웃음으로 설명하고, 선왕의 유령과 거트루드 왕비 대신 자신의 실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스크린 영상으로 불러내 감성을 자극한다.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영상편지와 십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된 사연까지 ‘배우 임영준’의 ‘인생극장’을 보고 있노라면 그 어디에서도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를 향한 배신감에 시달리는 햄릿이나 복수심에 불타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번뇌에 쌓인 햄릿을 찾아볼 수 없다.

단, 죽음을 부르는 복수를 앞에 놓고 죽음의 실체와 존재의 의미 사이에서 고민하던 햄릿의 ‘사유’가 담겨있을 뿐이다.

연극 '임영준 햄릿'의 공연장면. 스크린에는 배우 임영준의 실제 어머니의 영상이 펼쳐지고 있다./사진=극단 즉각반응 

배우의 수많은 오디션 과정을 통해 되풀이되는 햄릿의 대사 ‘사느냐 죽느냐’는 매번 다른 감정과 해석을 담은 연기로 반복되며 2016년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청년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청년의 소지품 가방 속에 남겨져 있던 ‘컵라면’과 지하철 역내 방송 소리, 외롭게 불어터진 라면을 먹는 배우의 모습, 그리고 비정규직이라는 보호받지 못하는 직업군으로 힘든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햄릿‘의 대사를 통해 하나로 연결될 때야 비로소 관객들은 햄릿이 ‘평범한 소시민’임을 깨닫게 된다.

“단칼에 끝장을 내고 싶은 무겁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채찍과 모욕, 폭군의 횡포, 가진 자의 오만, 실연의 아픔, 법의 더딤, 관리의 교만, 덕 있는 자가 오히려 무지한 자들에게 당해야 하는 수모”를 견디며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의 자리를 의심해야 하는 것은 햄릿 뿐 아니라 모든 소시민이 공유하는 고뇌이기 때문이다.

임영준 햄릿은 말한다. “한 사람이 죽는데 걸린 시간 10초...그가 죽은 자리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가고, 비행기가 지나가고, 공연이 지나가고, 10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느냐 죽느냐,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사람들, 나름의 목표와 꿈을 간직하고도 그 길을 향해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빛이 보이지 않아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는 사람들, 지금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어야 했나 의심하면서도 보이는 길이 없어 또 다시 좌절하게 되는 사람들, 사는 일이 살아내는 일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린 지금의 세상,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사라지지 않으려 발버둥 침에도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음을 끊임없이 인식하도록 만드는 슬프고 잔인한 세상...

“죽는 것은 곧 잠드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꾸겠지!”라 외치면서도 그 꿈속에 도사리고 있을 무언가가 두려워 쉽게 복수를 감행하지 못했던 햄릿의 고민은 사실상 ‘존재’에 대한 고민이었다.

제 아무리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이라도 죽어 땅에 묻히고 나면 살점은 벌레에게 뜯기고 텅 빈 해골만 남아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리는 것이 ‘인간’인 것을, 무슨 미련이 그토록 남아 고통스러운 삶을 ‘미친 척’ 해서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햄릿의 고민은 사실상 ‘살고 싶은 마음’에 대한 고민이었다.

연극 '임영준 햄릿'의 공연장면/사진=극단 즉각반응 

또한, 죽음에 대해 그토록 유별했던 이유는 “몸짓이나 표정, 눈물과 같이 연기할 수 있는 행동으로는 절대 드러낼 수 없는 진실한 심경”, 즉 겉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어떤 것이 내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비둘기 간에 쓸개도 없어서 맥없이 굴욕이나 당하는 못난이”라 부르며 과감히 행동하지 못함을 비난하던 햄릿,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가증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밀물과 같은 역경에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던 햄릿은 현대를 살아가며 수없이 스스로에게 같은 비난과 질문을 되풀이해 온 ‘소시민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연극은 퍼포먼스가 실행되는 순간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와 인물, 그리고 관객이 한꺼번에 소통하며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게 되는 ‘체험’이다. 모두가 그 사람이 될 수 있고 내가 될 수 있고 인간이 되는 삶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로젠크랜츠의 대사처럼, 연극에 흥미가 없다는 말은 곧 “인간에게 흥미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인간에게 흥미가 없다는 말은 곧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의 고통, 불행에 대해 아픔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을 ‘인간애’로 정의했다.

레싱은 “그 불행이 우리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불안으로 인해 두려움이 첨가되어야만 비로소 동정심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은 “관객과 동질감·일체감·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는 현재의 우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어쩌면 그것이 연극 ‘임영준 햄릿‘의 관객들 중에 배우 혹은 연극인들이 많았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함부르크 연극론‘에서 레싱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모습은 보지 못하더라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성장해있음을 보게 된다. 가장 속도가 느린 자라도 목표를 눈에서 잃지 않기만 하면 목표 없이 방황하는 자보다는 항상 빠르기 마련이다.”

연극 '임영준 햄릿'의 공연장면. 배우 임영준(왼쪽)과 조연출 겸 배우 박정호(오른쪽)/사진=극단 즉각반응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배우 1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처럼 구현된 연극 ‘임영준 햄릿‘이 ‘예술의 쓸모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필요성’을 반증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대사처럼, “연극의 목적이 세상을 거울에 비추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의 세상이 그 ‘거울’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에는 선의 생김새를, 악에는 악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 시대의 진정한 모습과 정세를 여실히 드러낼 수 있는 연극”이라는 예술이 없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끔찍해질 테니 말이다. 8월 1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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