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홀관장 된 <손오공>의 그때 그 프로듀서 고학찬
아트홀관장 된 <손오공>의 그때 그 프로듀서 고학찬
  • 김두호
  • 승인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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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市長 설득시켜 뉴욕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방송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미술관과 뮤지컬 공연장이 있는 8층 빌딩의 윤당아트홀은 서울 압구정동에서 신사동으로 넘어가는 큰길가에 있다. 극장을 비롯한 공연장과 미술관 등 문화시설물이 늘어나고 있는 강남 문화권에서 대표적인 대형 복합 문화공간으로 등장한 윤당아트홀의 고학찬 관장(63)은 라디오시대 인기 프로 <손오공>의 프로듀서 출신이다.


방송 프로듀서에서 작가, 제작자, 연극 연출가, 대학겸임 교수에서 아트홀 경영자까지 다채로운 직업경력을 가진 그의 삶은 젊은 때부터 재치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맨의 성공담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실험정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도전정신으로 활동무대를 달리할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성과를 남긴 기록들이 라디오시대를 이끌었던 프로듀서 시절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라디오 어린이 히트 프로인 <손오공>으로 시작해 TV시대로 옮겨 <장수만세> <좋았군 좋았어> <엄마의 일기> 등 TBC-TV(현재 KBS-2TV)의 교양 및 코미디 프로 연출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한 때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가수출신 이장희 씨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방송을 시작했을 때 뉴욕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다. 의욕만 가지고 무턱대고 찾아간 뉴욕시장이 그의 협력자가 되고 빈털터리로 뉴욕에서 방송국을 창립했던 이야기는 소설 같은 일화들이다. 어느 해 15년간 살던 미국에서 소리 없이 돌아와 케이블 TV 제작운영에 참여했고 지금은 서울 강남지역 예술문화권의 주역으로 새로운 꿈을 펴고 있는 그 옛날의 명 프로듀서를 만났다.



귀국한 것은 언제인가?

1994년 9월이니 오래전이다. 뉴욕에 있는 KABS-TV 편성제작국장으로 있다가 돌아와 제일기획의 Q채널 국장을 하고 이어서 케이블 TV <캐치원>을 운영한 삼성영상사업단 방송본부 제작기술국장으로 일했다.


케이블 TV지만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국내 방송사로 복귀하면서 새롭게 겪고 느낀 일이 많을 것 같다.

한창 뉴미디어 분야가 관심을 모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케이블 TV는 기대와 달리 도입 초기부터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대다수 창립주체가 바뀌거나 운영에 실패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지상파 채널의 운영방식이나 제작시스템과 차별화하지 못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미국의 제작 방식을 고집하다가 반발도 겪는 등 설득에 고충이 많았다.


미국의 제작 방식은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 보도성 다큐 프로그램 하나 제작하는데 지상파는 최소한 PD가 보조(AD) 포함해 2명, 촬영기사 2명에 작가까지 5명이 매달린다. 광고 매출이 10분의 1도 안 되는 케이블에서 똑같은 제작인력을 활용할 수 없다. 미국은 1인 PD 시스템으로 제작에서 송출까지 이어진다. 혼자 원고 준비해서 촬영하고 편집하고 바로 위성방송으로 시청자를 연결한다. 뉴스채널의 기자들은 차안에 그런 장비를 갖추고 혼자 움직인다. 케이블 방송국에 100명이 넘는 인력이 종사한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나의 고집이 1년쯤 지나면서 인정을 받게 됐다. 지금은 지상파 방송에서도 활용하는 비디오저널리스트(VJ)란 호칭이 나온 것도 나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등장한 것으로 기억된다.


일선 PD시절부터 매우 엉뚱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행동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히트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선배들이 찾아내고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내 나름의 새 길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 많았다. 새로운 시도를 해서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나타나 희열을 맛볼 때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라디오시대 어린이들의 최고 인기 프로였던 <손오공>을 연출할 때도 효과음 담당자와 수없이 대립하고 설득해가며 기본 효과음의 틀을 벗어난 기발한 효과음을 선보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손오공이 하늘을 날고 여의봉을 휘두르는 소리, 호리병으로 들어가는 소리는 모두 상상력이 미치지 않은 특이한 소리를 만들어 사용했다. 전자오르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악단에 부탁해 신기한 소리를 많이 만들어냈다. 인기 프로의 음악과 효과음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다가 소속부장의 경고까지 받았지만 라디오는 소리의 문화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을 소리를 통해 느끼게 하므로 효과음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썼다.

일에서만 독창성을 즐긴 것이 아니라 인생도 그처럼 새롭고 모험적인 시도를 즐긴 것은 아닌가?

난 사실 대학(한양대)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막상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할지 어디에 취직할 지 막연했다. 영화감독의 조감독으로 가는 길이 최상인데 처음부터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게 싫어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학생 때 한번 구경 갔던 천안 근교의 성불사라는 절에 살고 싶어서 그곳으로 갔다. 출가할 생각보다 수도나 수양을 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혼자 적막강산의 산속 절에서 새벽 예불하고 참선하며 보내는 동안 노스님은 “자네는 절에서 살아야한다”며 하산을 말리셨지만 어느 날 누님이 일본으로 먼 길을 떠난다는 연락이 와 그길로 하산했다. 그때 길에서 구입한 신문광고를 보고 동양방송(TBC/현 KBS 2TV) 프로듀서 공채에 원서를 냈다. 1970년도였다.


자칫 스님이 될 뻔 하셨는데 진로가 달라진 것 아닌가? 그래도 전공과 무관하지 않아 제대로 된 선택 같다.

내가 제주도 출신인데 제주도 출신 PD로는 1호였다. 4명의 합격자 중에 사방을 둘러보아도 학연이나 지연이 없었던 나는 점심식사도 혼자 다니며 외톨이 취급을 받았다. 그때 분위기는 ‘왕따’라는 말이 맞다. 방송국 동네 식당이 싫어서 버스 타고 다른 동네 가서 혼자 밥 먹고 올 정도로 서먹하게 방송국 생활을 했지만 오히려 덕분에 일에 열중할 수 있었다. <손오공>은 나의 첫 작품이다.


연출활동을 라디오시대에서 TV시대로 옮긴 것은 언제인가?

라디오 PD 3년만에 였다. <서수남 하청일의 유쾌한 샐러리맨>이 최초 뮤지컬 형식의 드라마인데 그게 라디오 때 나의 마지막 작품이다. TV 연출을 시작하면서 코미디 <좋았군 좋았어>의 프로그램 제작파트에서 활동했다. 최초로 개를 의인화 시킨 코미디를 연출해 화제가 됐지만 새로운 것을 버릇처럼 고집하고 또 라디오 출신이라 것 등으로 인해 눈총을 받다가 <장수만세> <여고생 퀴즈> 같은 교양프로 옮겼다.


견공이 등장해 멍멍거리면 사람이 대신 말을 하는 코미디 프로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개가 짖으면 성우가 대신 개의 입놀림에 맞추어 말을 하는 것인데 강아지를 통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는 <좋았군 좋았어>의 코미디 코너였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진행한 <장수만세> 때도 장롱에서 살아가는 서울 신림동의 별난 할머니 사연을 소개해 한동안 세상이 그 할머니 화제로 시끄러웠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고 왜 미국으로 떠났는지?

1980년 5공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 통폐합과 해직 언론인시대가 개시됐다. 그 무렵 내가 일하던 방송사도 흔들렸지만 개인적으로도 좀 튀는 인물로 분류될 수 있었다. 내가 미국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인데 아내로부터 그런 변화의 소식을 접하고 그냥 그곳에서 내 일을 찾아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5년 쯤 미국에 살며 활동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우선 먹고 살기 위해 벼룩시장의 장돌뱅이가 됐다. 당시 히트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해리슨 포드가 쓴 모자를 팔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그 모자 장사를 했는데 예상대로 성공적이었다. 모자는 흑인들이 주로 애용하는 물건이지만 나는 백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영화 덕분에 재미를 봤다. 뉴욕 맨하탄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다수 내가 판 모자를 쓰고 지나다녔다. 하하하.


모자 장사로 돈을 번 동기와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돈을 좀 버니까, 내가 하던 일,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생각나더라. 나는 어느 날 에드워드 카치 뉴욕시장실로 면담을 신청했다. 미국이란 나라의 매력적인 점은 민주주의가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과 면담 약속을 한 날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뉴욕시청으로 들어가 곧장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내 옆에서 소변을 보던 사람이 동양인인 나를 보고 당신 누구 아니냐고 묻더라.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가 곧 나와 만나게 될 뉴욕시장 에드워드 카치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는 기관장쯤 되면 화장실을 따로 사용하는데 그곳은 시장도 시민과 같은 화장실을 사용했다.


시장 면담을 신청한 이유는?

한국어 방송을 하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첫마디에 오케이를 했다. 일본어 방송, 중국어 방송은 있는데 누구도 한국어 방송을 신청하지 않았으나 이제 당신이 한다니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뉴욕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방송을 생각한 용기도 대단하다.

FM 한국어 방송을 시작할 무렵의 나는 사람도 장비도 없었다. 중고품 시장에서 마이크와 녹음기재를 구입해 아내와 함께 녹음을 하고 서울로 지원을 요청해 지구레코드 등에서 음악테이프를 전달받아 방송을 했다. 그때는 불법 체류자가 많아 신청곡을 내보내면서 불법체류를 하는 동포와 함께 노래를 듣고 싶다는 멘트도 내보내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당시 우리 동포사회는 세탁소와 봉제공장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 광고를 얻기가 힘들었지만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해 운영이 가능했다.


큰 보람을 남긴 이력이다.

그때 내가 몰고 다닌 차가 델타88 고물차였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방송테이프를 가지고 뉴욕 블룩크린에 있는 송신소로 가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난 일이 있다. 방송시간이 급해 차를 버리고 아내와 테이프를 들고 미친 듯이 달렸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8층까지 죽을힘을 다해 올라가 간신히 펑크를 안 내고 방송을 내보낸 적도 있다.


애환을 함께 한 부인은 어떤 분인가?

내가 <손오공>을 연출할 때 아내(안정희 씨/ 61)는 같은 방송국에 근무하는 아나운서였다. 군산 앞바다에 있는 선유도에 함께 놀러간 게 인연이 되었다. <손오공>으로 내가 좀 유명해 덕분에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자녀분은?

딸만 3형제를 두었다. 맏이 고아라(35)는 교사, 둘째 아미(32)는 물리치료사, 막내 우리(31)는 미국의 모건스탠리에 근무하고 있다.


귀국 후 방송에 복귀하면서 기업의 사회기여(공헌)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제작방식인데 꾸준히 발전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다. MBC-TV가 1997년부터 이듬해까지 58회 방송한 <그대 그리고 나>는 좋은 프로그램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제작된 삼성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이었다. 일각에서 프로그램 제작을 통한 재벌의 방송 장악 음모라는 오해도 했으나 실제는 뜻이 순수했다. IMF 때 사라졌지만.


윤당아트홀 운영은 개인 재산으로 시작한 것인가?

샐러리맨 출신이 마련할 수 없는 재산이다. 건물주인은 문화사업에 애정이 많은 대구의 기업인(이재섭 조일 알미늄 회장)이다. 미술관과 공연시설의 경영에 대한 공부를 2년간 하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임무처럼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 기업인에게 예술혼을 심어주기 위한 시도에서 16주 과정의 CEO예술문화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대학과 각종 문화행사에도 이름이 빈번하게 오르내리고 있는 것 같다.

서울예대, 추계예대, 세명대 등에서 극작부문 겸임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상명대 방송예술대학원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동양방송 퇴사 후 한동안 작가활동도 하고 연극 연출도 한 적이 있다.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단체는 제주세계델픽대회, 국제자유도시포럼, 제주영상위원회, 경인방송시청자위원회 등이다.


델픽대회는 어떤 행사인가?

올림픽경기가 스포츠제전이라면 델픽(Delphic)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시대에서 유래된 문화올림픽이다. 2008년 제주에서 제3회 세계델픽대회가 개최됐다.


꿈이 있다면?

제주도에는 화산이 만들어 낸 오름이 많다. 그 가운데 북제주군 구좌읍에 있는 다랑쉬 오름은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공간이다. 그곳을 자연 그대로의 노천 공연장으로 만들어 세계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열고 싶다. 약 1천여 명이 참가하는 세계합창단음악제 도 꿈꾸고 있다. 다랑쉬 오름은 달이 뜨는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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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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