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일 감독의 데뷔작 '반도의 봄'
▶[내 가슴에 남아있는 한국고전영화와 그 배우들(2)] '미몽'(1936)과 배우 문예봉 이어서
인터뷰365 백학기 칼럼니스트 = 이병일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반도의 봄'은 일제시대 제작환경이 열악했던 촬영현장에 대한 감독 자신의 자기성찰적 영화다.
이 영화는 일본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의 당선 소설인 김성민의 '반도의 예술가들'(1936)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한동안 필름이 전해지지 않다가 지난 2005년 베이징 중국전영자료관(中國電影資料館)에서 발굴된 것을 계기로 한국영상원이 복원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이병일 감독은 1910년 함흥에서 태어나 1932년 도쿄로 가 미사키 영어전문학교에서 공부한다. 이후 코리아레코드사를 만들어 이화자, 김정구 등의 조선 가요 레코드를 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한 것은 1936년 닛카쓰 영화사의 감독부에 입사하면서다.
이때 할리우드를 경험하고 돌아온 아베 유타카 감독 밑에서 연출을 배운다. 1940년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직접 명보영화사를 설립하고 첫 연출작으로 '반도의 봄'을 만든다. 그래서일까.
'반도의 봄'은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 세련된 편집, 탄탄한 이야기 전개로 일제강점기 영화 중 단연코 빼어난 영화다.
영화 속 영화인 액자 구성으로 '춘향전' 영화 현장을 세련되게 넘나들며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도 특별하다.
당시 조선의 유성영화들처럼 한국어와 일본어가 병행해 사용됐으며, 한국어 대사에는 일본어 자막이 붙어 있다. 20세기 초반에 사용되던 서울 방언과, 조선인 배우들의 일본어 발음을 원음으로 들을 수 있는 것도 특징이다.
당시 매일신보 1941년 11월 9일 자에 소개된 내용을 보자.
미모와 음악의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여주인공 김정희(김소영 분)는 영화계를 동경한다. 그러던 그의 오빠 김창수(모리 다쓰조 분,森達三)가 경성에 머물러 친구인 청년 작가 이영일(김일해 분)에게 누이동생 정희를 소개한다.
영일은 문학에 정진하는 한편 모 레코드 회사 문예부에 근무하고 있다. 영일은 정희를 회사의 문예부장이며 자본주인 한계수(김한 분)에게 소개한다. 정희의 청순한 용모에 한계수의 마음이 쏠린다. 한계수는 자신이 주관하는 영화촬영소 직원들을 데리고 허훈(서월영 분)감독을 중심으로 영화 '춘향전'을 제작 중이다.
'춘향전'의 주연 여배우 안나(백란 분)는 이 같은 한계수의 사랑을 뒷배경으로 오만에 사로잡혀 촬영장도 제멋대로 나오지 않거나 스케줄을 빼먹는다. 이에 '춘향전'은 촬영에 차질을 빚게 되고 '춘향전' 감독은 안나를 정희로 교체하기에 이른다.
'반도의 봄'은 춘향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장면을 바스트숏(BS)으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곧이어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몽룡과 방자가 나타나고 곧이어 전체 풀샷으로 감독과 촬영스태프들이 영화를 찍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장면이 바뀌면 부감으로 촬영장인 춘향의 방으로 감독이 들어와 춘향에게 연기 디렉팅을 한다. 감독이 다시 촬영장을 나가면 카메라는 부감에서 다시 정면 풀샷으로 나오는데 촬영 스태프들이 레디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반도의 봄'은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이 영화가 촬영과 제작과 배우와 스태프에 관한 영화임을 암시한다. 이어 경성역이 나오고 홍콩 양조위 같은 배우 영일이 친구와 여동생 정희를 만나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 워킹은 곳곳에서 탁월한 미장센을 자랑한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장면 중 제작진들이 촬영이 없는 날 머무르는 한옥에서 집주인이 찾아와 밀린 방세로 방을 비워달라고 말하는 장면의 부감 숏은 몇 번을 다시 봐도 매우 의미 있다. 마당이 있는 한옥을 부감으로 카메라가 잡고 트래킹하듯 배우를 따라 움직인다.
배우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작은 문을 지나 마루가 있는 집으로 걸어간다. 배우의 손에는 두 개의 국거리 무가 들려있다. 무를 들고 온 배우는 다른 여배우에게 무를 건네주며 대화하는데, 이때 한 번 이들을 바스트숏으로 각각 보여준 뒤 카메라는 이내 부감으로 이전 카메라 워킹의 역순으로 트래킹한다.
다시 처음 장면으로 되돌아오면 집주인이 들어오는데 다시 한번 카메라는 부감으로 집주인을 트래킹 해간다. 집주인이 툇마루에 앉고 방에서 감독이 나와 앉으며 집세 문제로 언쟁하는 장면까지 연출하는 카메라 워킹 미장센은 참 탁월하다.
또 주인공 영일과 안나가 데이트하는 다리 위 장면 신을 비롯해 북악산이 내려다보이는 경성 시내 광화문을 교행하는 두 개의 전차 교차 장면의 브릿지 신들도 인상적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 남산 팔각정에서 '춘향전' 촬영을 앞두고 춘향역의 안나가 끝내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자 촬영 기자재를 들고 남산을 내려가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쓸쓸한 뒷모습도 매우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 촬영도 수평 트래킹 숏으로 촬영팀들이 앉아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적 경과를 잘 보여준다.
'반도의 봄'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주인공 영일(김일해)을 동시에 사랑하는 안나(백란)와 정희 모두 당찬 여성들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문예부장(김한)의 연인이었던 안나는 그가 횡령죄로 영일을 고소하자 직접 해결에 나서고, 돈을 구하기 위해 문예부장을 만난 정희는 그가 돈을 줄 테니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말하자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또 극 중 영화 제작비를 대는 회사 직원 경숙(복혜숙)이 10개월 할부로 산 라디오를 듣는 장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방송이 경음악에서 일본 전통음악 장르로 바뀌자 라디오를 꺼버리는 인상적인 장면인데 식민지 사회의 조선인들의 심경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주연배우 정희(김소영)가 무대에서 영화 주제가 ‘망향초 사랑’을 부르는 장면에서도 주제곡인 만큼 곡 전체를 다 부르게 되는 데 이때 김소영이 부르는 ‘망향초 사랑’은 사실 백난아의 목소리다.
-
백학기 칼럼니스트
시인 겸 영화감독. 전북 고창 출생으로 <삼류극장에서 2046>등 여러 권의 시집을 냈으며, 영화 <공중의자><이화중선><선미촌>등을 감독했다. 현재 서울디지털대학(SDU) 교수로 재직 중으로, 섬진강영화제 위원장을 맡고 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