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 비프 역 이상윤과 부딪치는 부자(父子)간 불화 장면 일품
- 관록의 손숙 배우, ‘순애의 어머니상’ 린다 역 맡아
- 70여 년 전 미국 작가 아서 밀러의 메시지를 현대 감각으로 전해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34년 평생 일했지만 해고당하는 인생, 소외와 외로움 속에서 ‘좋았던 날’로 가고 싶지만...
박근형 배우가 열연한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한 것은 필자에게 새해 멋진 선물이자 감동이었다.
예매할 때부터 기대가 컸던 아서 밀러의 현대 고전 ‘세일즈맨의 죽음’을 새해 12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클라이맥스에서 전율도 느꼈고 감탄의 눈물도 흘렸다.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과 연출(김재엽)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함께 만든 무대였지만, 팔순이 넘은 박근형 배우의 농익은 ‘윌리 로먼’의 ‘인생 연기’를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윌리 로만 역을 맡은 연극(영화는 국내에도 소개됨)을 보았다. 줄거리는 알지만, 대사를 다 알아듣지 못해 구경이 될까 염려했는데, 후반 죽음으로 치닫는 더스틴 호프만의 명연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많은 극단과 연출가들이 ‘세일즈맨의 죽음’을 무대에 올렸고,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윌리 로먼을 연기했다. 필자의 뇌리에는 작고한 김성옥 배우와 ‘늘푸른 연극제’에서 아들과 함께 공연한 전무송 배우의 윌리 이미지가 남아있다.
KBS 연기대상을 수상한 이순재 대배우도 올해 90세 기념작으로 ‘세일즈맨...’을 하려다가 건강이 안 좋아 접었다고 해서 아쉬움이 컸다. 다행하게도 이 작품이 연초 세종문화회관 레퍼토리로 올라 박근형 손숙 이상윤 출연 스케줄을 선택해 예매했다. 더블캐스팅이라 한 차례 더 보고 싶지만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아 망설여진다.
1940년생인 박근형 배우는 1970년대 필자가 선망하는 배우였다. 봄가을 시즌에만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몇 편의 연극에서 본 박근형의 신선한 연기는 연극에 갓 입문한 필자를 완전 매료시켰다. 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 전성기가 오면서 연극과 멀어져 아쉬웠는데, 몇 년 전 ‘아버지’에 이어 지난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신구 배우와 함께 최고령 고고와 디디로 멋진 케미를 보여주어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번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박근형 배우는 ‘윌리 로먼’으로 빙의(憑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역할에 완전 몰입된 신들린 경지를 보여주었다.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으면 최선을 다해 캐릭터를 구축하거나 빠져들지만 극 중 인물로 거듭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번 무대에서 박근형 배우는 3시간 동안 극 중 윌리가 되어 윌리로 말하고 행동했다. 나이는 무색했고 힘도 전혀 딸리지 않았다. 원작의 윌리는 60대 전후이지만 85세의 박근형은 포스터의 이미지처럼 인생에 지친 세일즈맨, 자식들 잘되기를 바라지만 불화만 더해지는 외로운 아버지를 소름 돋을 만큼 리얼하게 연기했다. 화술이 되고 연기가 몸에 익은 내공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현실 같은 연기’를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특히 죽음으로 치닫는 종반, 모든 희망이 좌절되어버린 윌리가 무대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장면에서 새처럼 너울너울 팔을 흔드는 모습은 신들린 연기 그 자체였다. 필자에게는 육체가 아니라 혼백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일즈맨으로 미국 전역을 누리며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큰아들 비프는 미식축구 선수로 장래가 밝았다. 그런데 수학 과목에서 낙제해 그는 인생 낙오자가 되고 마는데, 거기에는 부자간 비밀이 있었다. 이 장면이 이 연극의 백미인데, 아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박근형의 연기 또한 명품이었다.
이번 ‘세일즈맨의 죽음’은 그동안 본 공연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극단이 기획한 무대가 연극적이라면 기획사의 이 공연은 물 흐르듯 전개가 매끄러워 이해는 쉬운 반면 깊은 맛은 덜했다.
필자는 이 같은 기획사의 ‘웰메이드 연극’에 선입관(상업성)이 있었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그 부족함을 박근형 배우의 몰입 연기와 짜임새 있는 배우들의 앙상블로 채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연출의 표현 방식이 독특했고, 작품을 끌어가는 방향성이 명료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연극의 트렌드가 변하고 있는 것일까.
올드한 세대인 필자는 한 작품을 리뷰할 때 어느 극단이 어떤 연출에 의해 공연되느냐에 역점을 두었고, 어떤 배우들이 출연하는지 캐스팅에 주목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최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관람한 ‘붉은 낙엽’이나 세종M씨어터의 ‘세일즈맨의 죽음’에는 연출 이름을 하단의 스태프 명단에서 찾을 수 있었다. 유명 배우를 앞세우는 스타시스템이 전에도 있었지만 요즘 제작자나 연출의 위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김재엽 연출가를 잘 모르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면서 연출이 돋보였다. 우선 원작 그대로 무대에 올리되 전개가 빨라 3시간(인터미션 15분)에 관객이 전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암전이나 휴지(休止)가 거의 없어 어느 곳 하나 막힘없이 유연하게 극을 펼쳐냈다.
화술도 꼭 집어내진 못하겠지만 기존의 사실주의 연극과 좀 달랐다. 번역극의 화술이 문어체나 또는 이상한 투가 있어 자연스럽지 못했는데, 이 공연에서는 모든 배우들이 일상의 대화를 하듯 자연스러워 듣기가 편했다.
연출은 아서 밀러가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쓴 희곡을 원작 그대로 올리되 디테일한 부분들은 현대 감각에 맞게 연출했다.
34년간 세일즈맨으로 일하다가 해고 당하고, 모든 것을 걸었던 자식에게 실망하는 아버지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있을 수 있고, 좋았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동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로 살려낸 점이 특히 좋았다.
많은 이야기, 절절한 메시지들이 있지만 김재엽 연출은 아버지 윌리와 큰아들 비프(이상윤)의 갈등과 충돌에 역점을 두어 극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 같은 부자(父子)의 속살을 보여준 것이 한국 관객들의 기호에도 맞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큰아들 비프 역을 맡은 이상윤 배우의 연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연기파 명배우 박근형도 자신의 캐릭터를 오롯이 살려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상윤 하면 TV드라마로 익숙한 탤런트를 떠올리는데, 이번 작품을 보면서 무대 연기자로 거듭났다고 할 만큼 자신의 캐릭터를 성실히 형상화하면서 박근형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과 호흡을 잘 맞춰나갔다. 신구 배우와 함께한 ‘라스트 세션’에서 가능성을 보이더니, 이번 무대에서 괄목할 성장을 보여준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가족극이다.
아버지 윌리와 어머니 린다, 큰아들 비프와 작은아들 해피가 극의 흐름을 주도하기에 어느 배역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날 공연에서 어머니 린다 역을 80대의 명품 배우 손숙이 맡았다. 재작년 ‘토카타’ 공연 때보다 더 젊어 보였고 대사와 연기에서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손숙 배우는 여러 작품에서 ‘한국의 어머니상’을 보여주었지만 아서 밀러의 이 작품에서는 평생 남편만을 사랑하는 '순애의 여인상'을 연륜에서 우러나는 아우라로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남편 박근형과 큰아들 이상윤의 큰 키 사이에 선 손숙의 아담한 미장센은 연기 그 이상의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작은 아들 해피 역은 김보현 배우가 맡았는데 가족 간의 대화를 이어주는 윤활유 같은 에너제틱한 연기를 해내면서 바람둥이 캐릭터도 살려냈다.
이날 캐스팅은 로먼 가족 외에 이웃이며 윌리의 절친인 찰리에 이남희, 윌리가 좌절할 때마다 나타나 용기를 북돋는 형 벤 로먼 역 박민관, 비프의 친구 버나드 역 도지한, 윌리의 여인 역 고은민, 윌리를 해고한 하워드 사장 역 박승재, 해피와 어울린 여성 역 한솔과 이예원 등 이었다.
등장인물 모두가 적재적소에 등장해 맡은 캐릭터를 군더더기 없이 소화하고 사라지면서도 전체적인 앙상블을 이루어 관람이 편했다. 특히 전반부에 희극적이던 찰리 역 이남희 배우가 후반부에서 펼친 진솔한 우정 연기가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박근형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노배우의 원숙한 경지에서 뿜어내는 연기의 아우라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70여 년 전 미국의 현실을 다룬 내용을 지금 한국에서도 공감할 수 있게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다.
그런데 왜 현실은 그대나 지금이나 더 암울하고 답답해지는가.
요즘 어수선한 세태 속에서 관람한 박근형의 ‘세일즈맨의 죽음’ 저 한편에서 “어떻게 하면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죠?”하는 극 중 대사가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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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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