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극화에 쏟은 11년의 집념이 이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탄이 16일 대학로 TOM 2관에서 개막해 26일까지 공연된다. 극단 피악의 나진환 연출은 이번 무대에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라는 부제를 달아 이복형제의 사상과 심리를 집중 조명했다.
2016년 7시간의 공연으로 대서사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선보였던 나진환(대본, 연출)은 두 번째 공연에 1부와 2부 3시간씩 총 6시간, 그리고 이번에 3시간으로 압축하면서 ‘나진환 버전 카라마조프’를 완성했고, 내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 ‘결정판’을 올릴 계획이다.
작품의 성장과 더불어 배우의 연기가 만개했다. 나진환 연출과 8년을 함께 작업해온 정동환은 절정의 경지를 펼쳤으며, 한윤춘은 ‘이반’역을 자신의 캐릭터로 탄탄하게 구축했다. 스메르자코프 역 이기돈은 이반의 영악한 분신을 온몸으로 연기, 극에 역동성을 불어넣으며 주목할만한 배우로 부각되었다.
앞선 두 번의 공연보다 캐스팅이 고르고 앙상블 또한 베스트인데다 정동환 한윤춘 이기돈 세 배우의 불꽃 튀는 연기는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강렬했고 독보적이었다. 놓치면 아까운 연기 대결이다.
초절정(超絶頂) 연기 펼친 정동환 배우
정동환 배우는 세 번째 공연에서 작가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표도르, 단독 공연으로 연기했던 대심문관, 식객(食客) 등 4가지 배역을 거의 경이롭게(필자의 소견) 해냈다. 음악에서 말하는 ‘초절정 기교’에 독창적 원숙미까지 분출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막이 오르자 광대처럼 분장한 표도르 정동환은 호색한이자 방탕한 캐릭터를 코냑잔을 기울이며 신들리듯 연기, 최근 그 어느 공연에서 보다 활력 넘치고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자신의 기질을 이어받은 큰아들 드미트리(유건우)에게 호되게 당하고, 둘째 이반에게도 동의를 얻지 못하는 처절한 소외감, 셋째 알로샤(주인서)에게 위로를 받긴 하지만 복병인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니 사면초가지만 탐욕은 극에 달한다. 여기에 드미트리의 연인인 카체리나(리다해)까지 4명을 상대하면서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방탕한 기질 사이의 복잡다기한 성격을 표출해냈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는 운율을 타고 관객들의 가슴에 꽂혔는데, 마치 K팝의 랩을 연상케했다.
분장을 지운 정동환은 작가 도스토옙스키로 나와 작품의 내용과 전개 과정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여기서의 관건은 설득력인데 방대한 소설을 읽지 못한 관객들에게도 복잡한 가계도와 사건의 구조를 자상하게 해설해준다. 이 같은 역할은 정동환의 트레이드 마크라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관록의 명품 연기를 보였다.
다음은 대심문관 역. 나진환 연출은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를 별도로 공연했는데 여기서 대심문관 역을 했던 정동환은 이번 무대에서도 벌거벗은 ‘금관의 예수’(안성채)에게 진흙과 물감을 퍼부어 조롱하며 ‘신이 인간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다는 교리’를 맹렬하게 공격한다. 인간 영혼의 실체를 꿰뚫어 보는 대심문관 역을 정동환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와 유려한 화술로 온전히 자신의 캐릭터로 체화해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식객’ 역은 앞의 배역과는 또 다른 반전 희극 캐릭터이다. 다시 광대 분장으로 긴 탁자를 오르내리며 이반에게 일침을 가하는 정동환의 물오른 피에로 연기 또한 이 공연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나이를 거론하는 것은 실례지만 70대 중반의 노배우가 3시간 공연에서 4개의 배역을 팔색조처럼 각각의 강렬한 캐릭터로 소화해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장문의 대사, 몸을 사리지 않는 혼신의 연기는 독보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연기파 한윤춘·이기돈 배우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명연(名演)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라는 부제를 붙인 3탄에서 두 인물의 비중이 컸고 관객의 주목도도 높았다. 앞선 두 번의 공연에서는 사생아 스메르자코프가 이반의 사상을 추종하여 아버지 표도르를 죽였을 것이라는 암시만 했다. 따라서 배우의 역할과 연기가 좋아도 부각이 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한 막을 두 캐릭터에 할애해 집중 조명했다.
이반 역을 맡은 한윤춘은 국립극단 출신으로 믿고 보는 연기파 배우이다. 그는 수도승 같은 인내가 필요한 극단 피악의 인문학 시리즈에 수년간 전력투구해 왔으며, 마침내 이번 무대에서 연기의 꽃을 피워냈다.
작품 분석을 통해 이반의 캐릭터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대사는 명료했고, 확신에 찬 연기로 위선과 교만과 냉소적인 이반의 다의적인 성격을 에너제틱하게 변화무쌍한 연기로 뿜어냈다.
나진환 연출은 이번 작품에 대해 “신의 정의에 반기를 들고, 인간 정의를 통하여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이반의 고뇌와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며 “따라서 이반과 그의 분신이자 사상의 실체적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다.
그 그림자 같은 스메르자코프 역할을 연기파 이기돈 배우가 해냈는데 연민을 일으킬만큼 매력을 발산했다. 멸시받고 소외된 하인에서 영악하고 무서운 지략으로 이반의 의중을 완벽하게 실행해 반전을 일으키는 힘든 캐릭터를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해석해냈다.
둘은 서로에게 흙칠과 물감 이벤트를 펼치면서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미장셴을 보였으며 밀착 호흡으로 이란성 쌍둥이처럼 브로맨스의 조합을 이루어냈다.
다시 나진환 연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다. 나진환 연출은 총 3권 약 17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7시간으로 극화한 초연(2016년)에서, 인간 본성을 분석한 대서사극을 선보였다. 이해랑예술극장에서의 두 번째 공연은 1, 2부 3시간씩 6시간에 나진환표 충격 이벤트로 충격을 안겼다.
이번에는 인터미션 15분 빼고 3시간에 카라마조프가의 갈등과 사건을 티오엠 무대에 응집시켰다.
가로가 긴 무대의 한계를 거울과 영상을 활용한 임일진의 무대미술로 커버했으며, 김은영의 의상, 여국군의 조명, 박근형의 영상, 백지연의 분장으로 전작보다 업그레이드된 무대를 구현해냈다.
이 지난한 작업을 10년 넘게 연구하고 공연한 극단 피악과 나진환 연출의 끈기와 집념도 대단하지만, 아침내 그 진정성을 인정받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 창작주체’로 선정되고 3년간 지원받아 한층 완성도를 끌어올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또한 공연계의 경사라고 생각한다.
나진환 연출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결정판을 내년에 선보이겠다니 기대가 크다. 이 같은 진지함과 성실성은 타 극단에도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끄러운 연기 앙상블
리뷰 앞부분에서 필자의 주관에 따라 비중이 큰 배우를 집중 조명했지만 이번 공연의 강점은 소수정예의 앙상블이라고 본다. 카체리나 역을 맡은 리다해 배우는 '햄릿, 걷는 인간', '세자매 죽음의 파티'에서 개성 넘치는 기량을 펼친 연기파로 정평을 얻었는데 이번 무대에서도 연기와 노래와 춤으로 시선을 모았다.
드미트리 역 유건우도 선 굵은 연기로 폭력성을 드러냈고, 알료사 역 주인서는 강성 작품에 선한 캐릭터로 연성연기를 포근하게 해내 앞으로의 가능성을 엿보였다.
이 공연에서 가장 힘든 역할은 안성재 배우가 맡았는데 그는 초반에는 집사, 중반에는 대심문관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는 ‘금관의 예수’ 그리고 후반에는 재판장 역을 맡아 조역이지만 진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집시와 식객 역 등 멀티 연기를 펼친 하다율 권수빈 배우의 앙상블 연기와 막간 활약도 돋보였다.
이번 3탄의 특징은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했는데도 배우들의 대사가 잘 들려 장시간 관극의 불편을 덜어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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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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