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렬 감독은 13년 전 늙은 소 키우는 시골 할배와 그 늙은 소가 서로 교감하며 생의 끝자락으로 동행하는 다큐 영화 '워낭소리'를 선보였습니다. 그가 13년 만에 통산 2번째 작품인 '매미소리'를 지난 24일 스크린에 올렸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합니다. 바이러스에 속수무책 무장해제된 것을 포함해 돈과 시간, 모두 스텝이 꼬였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개봉한 이 감독의 속이 까맣게 탔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이 영화를 봤습니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한 가족 구성원들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와 강박이 자아내는 희노애락을 무겁게 읽었습니다. 오래전 'TV문학관'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매미소리만 들으면 자지러지게 혼절해버리는 딸 수남. 아버지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제 전수자인 스승과 사랑방에서 사랑을 나눌 때, 같은 집 다른 골방에서 농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친엄마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성인이 돼 ‘자살중독자’가 됐습니다. 아들의 비즈니스와 아들의 아들(손자)을 얻기 위해 ‘사랑방 거사’에 적극 조력해야 했던 친할머니는 며느리(수남의 엄마)와 손녀(수남)를 골방에 가뒀습니다.
수남은 새파랗게 질려 속을 죄다 게워내며 죽어가던 엄마의 끔찍한 마지막에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절정에 이른 매미소리가 지천의 소음을 모두 흡수해버렸습니다. 7년을 땅속에 묻혀 지내다가 불과 2~3주 짝짓기를 위해 지상으로 올라와 있는 힘껏 포효하는 매미의 ‘삶의 절정’이 엄마의 ‘죽음’을 삼켜버렸습니다. 짝짓기의 성적 쾌감이 자아내는 매미의 탄성이 죽음으로 향하는 엄마와 자신의 비명을 압도합니다. 정신적 외상으로 남을만합니다.
수남은 그렇게 엄마를 보낸 뒤 중학교엘 다니다가 가출합니다. 도회지에서 가수로 활동하다가 이 드라마에 등장할 가치도 없는 한 남자와 짝짓기를 해서 딸을 낳았습니다. 딸을 데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둔 아버지의 공연장을 찾습니다.
공연장은 다름 아닌 초상집. 아버지가 아들 못 낳는 부인을 버리고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여자 스승과 사랑을 나눠 아들도 낳고, 보유자 지위도 물려받은 무형문화재는 다름 아닌 ‘다시래기 굿’ 입니다. 장례식 전날 밤 광대와 상여꾼, 마을 사람들이 상가에 모여서 노래와 춤을 추며 상주를 위로하는 장례문화. 전남 진도를 포함한 한반도 서남해안 섬마을에서 전해 내려옵니다.
이충렬 감독은 이 낯설고 생소한, 사뭇 역설적인 문화재를 자신의 두 번째 작품 소재로 골랐습니다. 작품에서 삶과 죽음이 시공을 넘나들며 교차합니다. 관객에 던진 울림이 사뭇 묵직합니다. ‘죽음’의 여러 측면을 여러 각도에서 톺아보게 합니다.
‘다시래기’는 한자로 ‘많을 다(多)’에 ‘모실 시(侍)’, ‘즐거울 락(樂)’을 쓰는 ‘다시락(多侍樂)’이 어원이라고 합니다. ‘여럿을 모시고 즐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망자를 배웅하려 모인 여럿이 새 생명을 잉태하는 성적 쾌감의 즐거움을 공유하는 격이지요.
수남의 아버지는 ‘다시래기 굿’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공인전수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살한 부인과 자살중독자가 된 딸을 잊고 매진해왔습니다. 이충렬 감독은 이 아버지의 삶을 딱 ‘다시래기’적 프레임으로 구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수남은 딸과 함께 20년 만에 아버지와 마주합니다. 딸과 손녀를 본 아버지는 잠재의식 속 죄책감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영욕보다 소중한 혈육의 가치를 새삼 발견한 걸까요. 그렇게 딸 수남의 매미소리 트라우마를 치유하려 애씁니다. 그러다가 진도 바다 밀물 속으로 경운기와 함께 사라집니다. 평생을 바친 무형문화재 전수자 지위 따위는 잊은 채.
뜻 모를 ‘엄숙주의’에 길든 기자가 ‘다시래기’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인류 문명을 어떻게 요리해 섭취, 소화 시켜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시래기 굿’의 본고장인 전남 진도 지역의 지정학(Geopolitics)을 발견합니다. 고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맞서 3년을 버틴 곳. 조선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조류(潮流) 변화를 이용해 12척의 배로 왜군의 배 300척을 물리친 울돌목(명량)이 바로 진도입니다.
요컨대 군사적 요충지이다 보니 사람이 무진장 죽었던 지역입니다. 명나라로, 청나라로 중국 국호가 바뀔 때마다 ‘신하의 나라’임을 입증하고도 별반 외교·안보적 평화를 누리지 못했던 역대 한반도의 정치권력. 전시 소집된 병사들에게 군복과 무기를 직접 만들어 입대하라고 했던 지질한 국가권력. 전투발발 직전 100%였던 인원·장비가 반나절 행군한 뒤 50%로 줄어드는 오합지졸. 그런 국가를 딱하게 바라보다 못해 오롯이 낫과 쟁기로 외적에 맞섰던 가련한 한반도의 선배 민중들.
삶의 터전이 전쟁터가 된 지역의 민중들은 죽음이 일상다반사입니다. 다음날 전투에서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상중(喪中)에도 마지막(일지 모르는) 성교를 합니다. 몇 시간 사이에 ‘죽음’과 ‘새 생명’, 다시 ‘죽음’이 소환되는 독특한 알고리즘이 생성됩니다.
무릇 ‘죽음’이 꼭 슬픔으로만 수렴하지 않습니다. 숱한 ‘죽음’은 숱한 ‘삶’과 중첩돼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깊은 죽음의 슬픔에 잠겨있는 순간에도 절정의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음이 흔할수록, 이 억지스러운 역설은 하나의 뚜렷한 문명 현상으로 재현됩니다.
오래전 연쇄살인범의 뇌 구조를 분석한 책을 읽었습니다.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풍부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전사(戰士) 유전자’와 ‘유년기의 학대받은 경험’, 태생적 ‘전두엽 발달결핍’ 등 3가지 요인이 모두 충족되면, 여지없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 된다는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인류의 상당수는 이 3가지 중 2가지 정도가 얼추 들어맞습니다.
누구도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 자신의 전두엽 발달결핍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것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사 유전자’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과거 조상의 전사 유전자가 절대 우성이라도, 이성과 논리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서 전쟁을 부추길 수 있는 정치인을 ‘잘하면’ 공동체에서 도려낼 수 있습니다. ‘잘하면’ 말입니다.
이상현 기자/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사 서울 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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