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권태와 사랑, 그리고 망각...티모페이 쿨랴빈 '오네긴'
[앨리스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권태와 사랑, 그리고 망각...티모페이 쿨랴빈 '오네긴'
  • 주하영
  • 승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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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러시아 골든 마스크상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2014년 레드 토치 극장 실황 영상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인물들의 감정과 고뇌, 심적 변화와 갈등은 마임과 제스처, 신체성을 강조한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re)'로 구현된다./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삶이 지루한 한 남자가 있다. 공허함에 지쳐버린 염세주의적인 남자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소비한다. 모든 감정에 무감각해진 남자의 마비된 삶에 생산적인 일이라곤 없다. 그저 시간을 허비하고, 정력을 소모하고, 술, 여자, 무도회에 탐닉하며 책에 잠시 주의를 빼앗길 뿐이다. 그에게는 오직 무기력과 우울, 허망, 피로, 그리고 냉소만이 남겨져 있다.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의 모습이다.

러시아 낭만주의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 페초린의 입을 통해 ‘권태’를 설명한다.

“저는 거의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제 영혼은 사교계로 인해 망가졌고, 생각은 불안하고, 마음은 만족을 모릅니다. 제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여겨집니다. 쾌락만큼이나 슬픔에도 쉽게 익숙해지죠. 제 삶은 날이 갈수록 공허해지고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에 빠져들지만 역겨움을 느끼고, 사교계의 화려함과 가식, 가벼움이 지겹고, 사랑은 상상 속에나 있는 공허일 뿐이며, 행복은 무지한 사람들에게나 허락되는 착각이고, 영광은 한낱 운에 불과하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조차 죽음보다 모기에 더 신경이 쓰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지루함’이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렌스키'의 등장 장면은 의자들을 높이 점프해서 뛰어넘는 역동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열정과 생동감을 표현한다./사진=LG아트센터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젊은 연출가”로 불리는 티모페이 쿨랴빈은 2012년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자 “문화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자신만의 해석을 담은 연극 작품으로 선보였다.

공허하고 쓸쓸한 미장센이 두드러지는 무대 위에 컨템포러리 아트처럼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은 ‘망각’과 ‘허무’라는 주제를 오래도록 관객들 가슴에 각인되도록 만들었다.

“모든 제스처, 시선, 말에 푸슈킨의 무정함과 부드러움이 담겨있다”는 평가를 받은 쿨랴빈의 ‘오네긴’은 2014년 러시아 최고 권위의 연극상인 골든 마스크상 심사위원 특별상과 조명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또,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주립 레드 토치 극장에서의 2014년 공연이 실황 영상으로 제작되면서 ‘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를 통해 미국과 영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LG아트센터는 올해 CoMPAS20 프로그램으로 내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취소된 작품인 쿨랴빈의 ‘오네긴’을 12월 11~12일 2회에 걸쳐 온라인 후원 라이브 중계로 선보였다.

'오네긴' 공연 장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권태'를 느끼는 '오네긴./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권태'를 느끼는 '오네긴./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쿨랴빈은 ‘씨어터 타임즈’에 실린 인터뷰에서 연극 작품을 영상으로 송출할 경우 카메라가 비추는 것에만 주목하게 될 위험성을 묻는 질문에 소실되거나 놓치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극장에서 관람을 할 경우에도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관심을 특정 부분에 집중시키고 경험을 고양시킨다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쿨랴빈의 ‘오네긴’의 경우, 인물들 간의 대화 보다는 푸슈킨 원작이 품고 있는 ‘운문’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방편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반영한 ‘내레이션’이 사용된다.

또, 인물들의 감정과 고뇌, 심적 변화와 갈등은 마임과 제스처, 신체성을 강조한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re)’로 구현되기 때문에 영상으로 송출될 경우 디테일에 주목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한다.

쿨랴빈은 ‘푸슈킨 하우스’에서 진행된 온라인 상영회에 이은 페이스북 인터뷰에서 작은 디테일들이나 장면의 인상들에 보다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이해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사교계에 데뷔한 '타티아나'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모스크바 사교계에 데뷔한 '타티아나'./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러시아인들에게 “성경과 같이 성스러운 작품”으로 여겨지며 문장들을 암기할 정도로 친숙한 텍스트인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통해 쿨랴빈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쿨랴빈은 “모두가 아는 오네긴의 이야기를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미지들을 제공함으로써 관객들이 스스로 머릿속에서 텍스트를 해체하고 조합하는 노력”을 하도록 만들었음을 강조한다.

한 마디로 당대의 러시아가 어땠는지, 문학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드러내는 “클래식한 연출과는 정반대에 서 있다”고 말하는 쿨랴빈은 그럼에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는 러시아적 감성과 염세주의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담겨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쿨랴빈의 ‘오네긴’은 내레이션으로 제공되는 푸슈킨의 텍스트보다 무대 위의 미장센과 배우들의 연기, 신체적 움직임, 음악의 활용을 이해하려고 할 때 훨씬 더 작품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작품에 인용되는 푸슈킨의 텍스트는 무대의 퍼포먼스와 일치하지 않는 내용일 때가 많고 전체 텍스트를 다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러시아어 운문을 느낄 수 없는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서사는 지루한 측면이 존재한다. 세상 모든 것에 따분함을 느낀 오네긴은 삼촌의 유산 상속을 위해 시골로 가게 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낭만적인 시인 렌스키와의 우정에 잠시 흥미를 느끼지만 또 다시 권태에 빠져든다.

모스크바 사교계에 데뷔한 '타티아나'의 일상은 극 초반에서 보여지는 오네긴의 일상과 매우 유사하게 연출된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모스크바 사교계에 데뷔한 '타티아나'의 일상은 극 초반에서 보여지는 오네긴의 일상과 매우 유사하게 연출된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열정으로 가득한 시인 렌스키가 옆집 처녀 올가와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한심하게 여기는 오네긴은 올가의 언니인 타티아나의 독특함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사랑을 고백하는 타티아나의 열정이 가득 담긴 편지에 오네긴은 냉소와 현실적 인식이 가득한 거절로 응대한다. 타티아나의 명명일 파티에 초대를 받은 오네긴은 렌스키를 자극할 목적으로 올가를 유혹하고, 질투심에 사로잡힌 렌스키는 결투를 신청한다. 결국 렌스키는 오네긴의 총에 죽음을 맞이한다.

몇 년이 흐른 뒤 오네긴은 모스크바 사교계에서 백작 부인이 된 타티아나와 마주치게 된다. 달라진 타티아나의 모습에 사랑을 느낀 오네긴은 불타오르는 사랑이 가득한 편지를 보내지만 타티아나는 확고한 태도로 거절한다.

이야기 속에 사랑을 이루는 인물은 아무도 없으며, 오네긴이 렌스키를 자극하게 된 이유나 자신의 잘못인 줄 알면서도 친구와의 결투에 임하는 오네긴의 태도에 대한 명확한 설명도 부족하다. 또, 사랑의 고백을 거절하는 타티아나로 인해 충격에 빠진 오네긴에 대한 마무리 묘사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낭만주의 시인 '렌스키(Sergey Bogomolov)'는 하얀 분필 가루를 휘날리며 역동적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낭만주의 시인 '렌스키'는 하얀 분필 가루를 휘날리며 역동적으로 무대에 등장한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쿨랴빈은 푸슈킨의 원작 텍스트의 일부만을 사용한다. 그는 원작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이야기의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정도의 정보만 제공할 뿐 중심인물들의 내면이 품고 있는 열정과 희망, 절망, 실망, 피로, 분노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은 배우들의 연기와 신체적 움직임,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소품과 조명의 효과, 음악의 변화를 통해 전달한다.

왼쪽 구석에 고정적으로 위치한 오네긴의 책상을 제외하고 무대는 나무로 된 테이블과 여러 개의 의자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가운데 도시에 위치한 오네긴의 집과 시골 집, 타티아나의 집, 결투장, 무도회장으로 변모한다.

오네긴을 비롯한 4명의 중심인물들을 제외한 배우들은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등장해 무대를 설치하고 정리하고 청소할 뿐 아니라 타티아나의 유모, 결투를 조장하는 자레츠키, 타티아나의 남편인 백작을 연기한다. 190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에디슨 포노그라프, 침대 매트리스, 카세트 플레이어, 슬라이드 필름, 릴에 감겨 있는 영화 필름, 노트북, 마이크 스탠드와 같이 필요에 따라 등장하는 소품들은 인물들이 살아가는 명확한 시대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음악 역시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오네긴’의 서곡만이 고전적인 느낌을 전달할 뿐 사교계 무도회 장면에서는 1944년 프렌치 탱고의 음악 선율이 울려 퍼지고, 렌스키의 등장 장면에서는 마돈나의 2005년 팝 음악 ‘점프(Jump)’가 사용된다.

사교계의 무도회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1944년의 프렌치 탱고(French Tango) 선율이다. 기적과 행복을 꿈꾸지만 허망하게 사라진 사랑의 기억에 슬퍼하는 노래 가사는 '오네긴(Pavel Polyakov)'의 '권태'의 이유를 설명하는 듯 하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사교계의 무도회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1944년의 프렌치 탱고 선율이다. 기적과 행복을 꿈꾸지만 허망하게 사라진 사랑의 기억에 슬퍼하는 노래 가사는 '오네긴'의 '권태'의 이유를 설명하는 듯 하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연극의 첫 장면이 25분 동안 거의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이따금 한 두 문장의 내레이션이 제공되기는 하지만 똑같은 순서로 되풀이되는 오네긴의 일상은 대부분 침묵 속에 구현된다. 반복되는 순서로 시중을 드는 하인들의 무표정한 움직임과 무도회, 여자와의 잠자리는 오네긴으로 하여금 점차 권태를 느끼도록 만들고 무기력과 공허, 피로로 물든 그의 지루한 삶은 관객들에게 느낌으로 전달된다.

국내 후원 라이브 중계의 경우 영상관람 등급으로 인해 일부 장면들이 편집된 것으로 보이지만 권태의 속성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다른 LP판을 축음기에 올려놓아도 똑같은 탱고 선율만 흘러나오던 오네긴의 공간은 갑자기 조명이 밝아지면서 렌스키에 의해 활기로 채워진다.

마돈나의 노래에 맞춰 의자들을 뛰어 넘으며 하얀 가루를 사방에 휘날리는 렌스키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오네긴은 어느덧 렌스키와 함께 벽에 흰 글씨들을 남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올가는 카메라를 향해 마릴린 먼로와 같은 포즈를 취하는 촬영장의 배우로 등장하고, 타티아나는 올가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선풍기를 들고 따라다닌다. 올가와 렌스키가 다정한 연인의 포즈를 취하고 팬들을 향해 미소를 짓는 동안 오네긴은 타티아나와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짧은 담소를 나눈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올가'는 카메라를 향해 마릴린 먼로와 같은 포즈를 취하는 촬영장의 아름다운 배우로 등장하고, '타티아나'는 올가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선풍기를 들고 있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갑자기 타티아나는 심장 소리를 듣기라도 하려는 듯 오네긴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대고 노크하듯 두드린다. 집으로 돌아온 타티아나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테이블 위에 여러 장의 편지지를 늘어놓고 열띤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조용히 시작된 글쓰기는 점차 속도를 더하면서 요란해지고, 결국 차가운 물이 담긴 대야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이 된다. 쿨랴빈은 타티아나의 편지가 담고 있는 감정을 글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미 편지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관객들이 그녀의 폭발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사랑을 고백하는 '타티아나'의 편지는 점차 속도를 더하면서 요란해진다. 쿨랴빈은 타티아나의 편지가 담고 있는 감정을 글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택한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또 푸슈킨의 텍스트 중 설명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에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새로운 ‘오네긴’을 완성한다. 타티아나의 고백을 거절한 뒤 초대된 타티아나의 명명일 파티에서 오네긴이 렌스키를 도발한 이유를 쿨랴빈은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가족들은 차례로 와인 잔을 들고 타티아나에게 아름다운 ‘사랑’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자신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한 남자 앞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행복한 여인으로서의 삶”을 반복적으로 기원하는 가족들의 축언은 타티아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타티아나를 바라보던 오네긴은 분노를 느낀다.

그는 오지 않겠다는 자신을 굳이 함께 가자고 부추긴 렌스키를 향해 모든 비난을 돌리고픈 충동과 파괴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가족들 앞에서 올가를 유혹하고 식사 테이블 위에 그녀를 세워놓고 혼자만 내려와 버리는 무례함으로 렌스키를 도발한다.

싸움꾼 '자레츠키(Georgy Bolonev)'에 의해 조장된 '오네긴(Pavel Polyakov)'과 '렌스키(Sergey Bogomolov)'의 결투장면은 의자 8개를 일렬로 늘어놓은 모습으로 구현된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싸움꾼 '자레츠키'에 의해 조장된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장면은 의자 8개를 일렬로 늘어놓은 모습으로 구현된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질투와 모욕감에 휩싸인 렌스키의 결투 신청은 스탠드 마이크를 들고 나타난 싸움꾼 자레츠키에 의해 전달되는 여러 개의 흰 장갑들로 대체된다. 두 사람의 결투 장면은 의자 8개를 일렬로 늘어놓고 양쪽 맨 끝에 서 있는 오네긴과 렌스키가 서로를 향해 권총을 겨누는 장면으로 구현된다.

쿨랴빈은 오네긴을 쫒아 다니며 계속 비아냥거리고 조롱할 뿐 아니라 렌스키가 쓰러질 때까지 의자들을 뛰어 넘도록 강요하는 자레츠키의 행동을 통해 두 사람의 결투가 그들의 진심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오네긴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시도를 두 번이나 먼저 하면서도 차마 쏘지 못하고 의자에서 내려오고 마는 렌스키가 세 번째로 의자에 오르려는 순간 오네긴의 총이 발사된다. 허망한 렌스키의 죽음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친구 오네긴과의 결투를 앞두고 괴로워하는 낭만주의 시인 '렌스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친구 오네긴과의 결투를 앞두고 괴로워하는 낭만주의 시인 '렌스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작품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죽음으로 인한 망각’은 렌스키가 무대 위에 흩어놓은 하얀 가루의 흔적들이 모두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대걸레를 들고 나타난 배우들은 무대를 청소하기 시작한다.

렌스키의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은 작은 돌멩이 하나 뿐 그의 자취를 기억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무대 위에 남겨지지 않는다. 렌스키가 벽에 쓴 모든 글들은 지워지고 오네긴의 검은 옷에 묻은 흰 가루마저 자레츠키가 끼얹은 물에 의해 깨끗이 사라진다.

그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오네긴의 공간에 타티아나가 등장한다. 오네긴을 그리워하는 타티아나가 그가 남겨둔 책들을 통해 그의 내면을 알아가게 되는 원작의 장면은 타티아나가 그의 속마음이 담긴 영화 필름을 발견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쿨랴빈은 새로운 텍스트를 추가한다. 영상 속 오네긴은 타티아나가 보낸 편지에서 진정한 사랑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불타오르는 갈망과 통제할 수 없는 열정만이 토로되고 있음을 냉소적으로 지적한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오네긴을 잊지 못하는 타티아나가 그가 읽었던 책들을 통해 그의 내면을 알아가는 원작의 장면은 '타티아나'가 오네긴의 속마음이 담긴 '영화 필름'을 발견하는 것으로 대체된다./사진=LG아트센터

그는 타티아나가 말하는 그런 사랑의 감정은 4년 정도의 유효기간을 지닌 호르몬의 장난에 불과하며,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상태는 “강박증 환자”와 유사하고, 자기희생과 같은 사랑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쿨랴빈은 타티아나가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이상화된 오네긴의 모습이 아닌 실제 오네긴의 모습과 직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이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신이 보내준 사람”이거나 영원히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구원자가 아님을 깨달아야 사랑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사랑의 미혹적인 속성을 이해하게 된 타티아나는 현실적인 사랑을 찾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흥미롭게도 타티아나의 사교계 데뷔 장면은 극 초반의 오네긴의 일상과 매우 유사하게 진행된다.

속옷 차림으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타티아나에게 셔츠와 바지, 재킷을 순서대로 입혀주는 하인들과 1944년 프렌치 탱고 음악에 맞춰 똑같은 사교댄스를 추는 무도회까지 타티아나는 오네긴이 속해있던 지루한 삶으로 들어간다.

불안과 슬픔, 우울과 아픔, 고통이 드리워졌던 타티아나의 얼굴은 점점 무감각과 냉정, 통제된 감정의 표정들로 채워진다. 확연히 달라진 그녀 앞에 오네긴이 나타나지만 쿨랴빈은 오네긴의 열정적 고백이 담긴 편지를 오직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는 ‘침묵’ 속에 담아낸다.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 공연 장면. 컨템포러리 아트 작품처럼 구현되는 마지막 장면의 여운은 관객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사진='스테이지 러시아(Stage Russia HD)' 트레일러 영상 캡쳐.

의자에 앉은 채로 한참 동안 오네긴을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벗어놓은 구두를 들고 퇴장한다. 의자에 앉은 인간 형상의 골조만이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조각들을 먼지처럼 잃어버린다.

관 속에 놓인 시체처럼 앙상한 뼈대만 남겨진 채 기억도, 사랑도, 삶도, 감정도 모두 흩어져 버린 쓸쓸하고 아름다운 ‘망각’의 이미지는 관객들의 가슴 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권태와 사랑, 망각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두려움일까? 삶의 허망함일까? 그것도 아니면 망각이 주는 슬픔일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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