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석양(夕陽)을 사랑하며 사는 여자
슬프도록 석양(夕陽)을 사랑하며 사는 여자
  • 김두호
  • 승인 200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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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나자명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최근 전주에 세워진 영화촬영소의 개관식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전세버스 안에서였다. 창가에 앉은 초청 인사 한 사람이 붉은 노을을 남기고 시나브로 가라앉는 일몰 풍경을 바라보며 아주 행복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젊고 예쁜 연극무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알려진 배우 나자명이었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달리는 호남고속도로 차안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시작됐다. 뜻밖에도 특이한 영혼과 체질을 가진 연극인의 삶과 체험담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미혼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나이는 묻지 않았다. 배우는 보이는 그대로가 나이이므로 본인이 원치 않으면 굳이 밝힐 이유가 없다. 그녀는 지난해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연극 <레즈 시스터즈>(인디언 보호구역의 자매들)를 직접 연출도 한 중견 연극인이다. 작고 아담한 체격에 서른 살쯤으로 보이지만 일찍 대학로로 뛰쳐나온 그녀는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이했다.





노을을 바라보며 감동하고 있는 당신의 흥분된 표정이 좋아하는 정도의 보통 감정을 오버한 것으로 보인다. 탄성과 신음이 앞자리까지 들렸다. 무엇이 그토록 좋은가?

볼 때마다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다. 바라만 보면 황홀해진다.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도 잊어 먹는다. 며칠 만에 보는 노을이다. 지금 이사 간 집이 동향인데 나는 남향이나 동향은 싫다. 저녁노을은 언제나 내 몸이 자연의 품속에 날아드는 희열과 행복을 안겨준다. 하루속히 서쪽에 큰 창문이 달린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일출도 좋아하는가?

일출도 좋지만 빠르고 시시하게 솟고 여운이 없다. 지는 해는 빛과 색깔, 모양과 변화가 모두 예술이다. 어둠이 내리는 하늘에서 서서히 하루를 마무리하고 몰락해 가는 저녁의 태양은 그때그때 생각에 따라 뱀눈 호랑이눈 토끼눈 등 동물들의 눈동자 형상으로도 다가온다. 두려움과 오묘함에 떨 때도 있고 너무 멋있어서 슬플 때도 있다.



자연은 황혼이 아름답지만 인간의 삶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가 일에 대한 욕심이 가장 강렬한 절정기로 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연극 인생에서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작년 <레즈 시스터즈>를 만들면서 이제 연극을 제대로 알고 덤비는 출발 지점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경력으로는 중천으로 들어선 해와 같겠지만 ‘연극이 압축된 세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생각 없이 맡은 배역의 연기만 열심히 하며 살았다. 1988년 극단가교의 <판타스틱스>(정종화 연출)의 여주인공 루이자로 데뷔했으므로 올해가 20년째다. 제대로 연극을 알기까지 19년이 걸린 셈이다.





캐릭터가 악역연기는 맞지 않을 것 같다. 악기(惡氣)란 것이 없어 보인다. 어떤 작품에 출연해 왔는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슬픔의 일곱무대> <지피족> <발코니> <만두> <쥐> <키스> <코러스라인> <고래섬> 등 모두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내 연극을 처음 보면 왜 내가 출연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무대 위에서의 내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 너무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을 관객들은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배우로 평한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이지만 연기가 시작되면 배역에 따라 색깔과 개성이 강렬한 이미지로 바뀌어 변신하는 경우일 것이다. ‘연극이 압축된 세상’이라는 일종의 깨달음은 연출 작업을 하면서 비롯된 것인가?

<레즈 시스터즈>가 두 번째 연출 작품이고 직접 연기까지 했다. 그렇다. 이 작품을 끌어안고 고민도 하고 고통도 느끼면서 ‘연극 한 작품은 인간들의 욕망이 엉켜 굴러가는 세상을 하나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생각없이 연기를 하고 함부로 연극을 만들어서 안 된다는 무서운 책임감이 따랐다. 직업 배우였지만 졸리면 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연기하고, 목마르면 마시면 되는 기계적이고 본능적인 삶이 얼마나 무지한 삶이었던가를 대오각성하게 된 것이다.



연극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어렵다기보다 엄청나게 광활한 세계라는 것이다. 짧은 지식이나 경험, 얕은 잔꾀로 접근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포용력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선(善)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악(惡)의 존재도 인정해야 한다. 악을 때려 부수려고 싸우다보면 악은 더욱 뭉치고 힘을 키워 모두를 잃게 만든다. ‘악아, 너도 있어야겠구나. 너의 존재를 인정하마’라고 이해하면 오히려 덤비지 않고 쉽게 떠난다. 그런 세상의 이치가 연극에도 적용될 수 있고 내 인생 안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주장이다. ‘악아, 너도 있어야겠구나’ 라는 그런 포용의 여유는 언제 어디에서 느낀 것인가?

어느 명리학자가 나의 운은 앞으로 20년간 대운으로 접어든다고 말했다. 인생은 스스로 개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반은 헛소리로 들었다. 요즘 느끼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을 통제하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도쿄에 있는 쇼와대 음악예술과에 다니던 유학시절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 심한 불면증으로 고생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잠을 청한 어느 날 전신마비가 일어났다.





나는 지금도 맥주 한잔을 못 마신다. 정신만 살아 있고 눈동자와 온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의 신이 발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며 싸늘하게 하반신부터 식어가게 하는 것을 느끼는 가사상태에서 마음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을 놓아두고 욕심을 모두 버리는 무소유 의식이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제 죽음의 신이 심장에 이르면 죽는구나 생각했다. 침대 책상 통장까지 누굴 준다는 생각이 이어지고 짧은 삶의 발자취가 순식간에 필름처럼 돌아가면서 참회하는 사이 내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살아났다.



요즘 TV프로 ‘세상에 이런 일이’나 옛날 라디오 인기프로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다. 마음을 비우는 일종의 도력(道力)의 힘으로 신체적 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인가?

혼자 있는 기숙사 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물 한잔에 취하고 공기도 잘 못 마시면 부작용이 일어나는 체질인데 술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는지 모르지만 경직된 육체를 깨어나게 하는 힘이 마음을 비우는 영혼의 도움이었다고 믿고 있다. 굳어 있던 몸이 풀린 후 일어나 보니 현관문과 창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또 한 번은 장 파열 사고로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된 일이 있다. 그런데 실려 간 첫 병원이 왠지 죽음의 장소로 느껴졌다. 나는 울면서 다른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해 후송 침대에 실려 다른 대학병원으로 긴급 이동한 적이 있다. 그때도 몸이 움직이지 않고 마음만 움직이는 병상에서 모든 욕심을 내려놓는 무욕(無慾)의 노력으로 생명의 기(氣)를 잡을 수 있었다.



종교가 있는가? 어떤 신앙의 힘이나 기도 같은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어머니와 교회에 다녔지만 나의 신앙생활은 별로 성실하지 못하다. 종교와 무관한 경험담이다. 아마도 누구나 살기 힘들 때나 신체적인 고통이 따를 때 마음을 홀가분하게 비우면 참 편하고 자유스러울 것이다. 마음과 함께 육체도 평온해진다고 믿는다. 심지어 나는 지나가는 개를 보고도 아주 텅 빈 마음으로 ‘멍멍아’하고 부를 때가 많다. 그럼 어김없이 꼬리를 흔들며 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따뜻한 시선을 준다.



경험이나 삶의 정신적인 태도가 독특하다. 결혼은?

좋아해 본 사람은 있으나 애정이나 사랑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지금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중요한 것은 이성간의 애정이 아니라 좋은 목적을 함께 추구하는 의리나 우정, 이를테면 프랜드십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 차 한 잔, 밥 한 그릇 대접했다고 호감으로 착각한 스토커를 두 사람이나 만나 함부로 남자 만나는 게 신경이 쓰일 때도 있다.



곁에 사는 가족들이 궁금하다.

어머니는 캐나다에서 살고 계신다. 아버지는 나의 기억 속에 남아 나를 지켜주시는 어마어마한 인물이다. 미술교육학자로 전주사대에 계실 때 어린 나를 안고 새만금 갯벌을 찾아가 머드 마사지를 즐기셨다. 나는 아버지의 지성을 동경하며 자랐다. 지금 나의 키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성장이 멈춘 상태로 그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언니 가족과 함께 산다.





준비 중인 작품은?

일본의 연극연출가 와다요시오 씨와 한일 무대에 올릴 공동 연출 작품을 준비 중이다. 나는 일본의 사회적 문화적 장점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그들이 가해자라는 생각과 시대적 격동기라는 의식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다. 가해자가 오히려 큰소리치며 두 다리를 뻗고 자는 시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언제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 행복지수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도 다른 수평 평면 구조로 가야하는데 아직도 수직 구조의 사회가 모든 분야에서 강박관념과 불신을 빚고 있는 탓이다. 일본 사회는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 분야든, 우리보다 더 많은 문제점이 속출하지만 질서를 지키도록 이끄는 지성인들이 있어서 길잡이가 된다. 우리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지성인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자신의 학문적 공부보다 재산이나 권력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성인들만 보인다. 정신문화의 지도자가 될 만한 지성인은 몇 명만 있어도 사회가 구심점을 찾게 된다.




저녁노을은 이미 어둠에 묻혀버렸다. 전주를 출발한 버스가 천안삼거리를 지나 서울에 닿을 때까지 나자명은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기억과 생각들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정리해가며 말했다. 연극보다 자신의 진기한 체험담과 자신이 보는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더 흥미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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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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