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기로 기록한 연극배우 박정자의 회고록 '노래처럼 말해줘'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기로 기록한 연극배우 박정자의 회고록 '노래처럼 말해줘'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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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익은 연기, 맛깔스런 대사, 고혹적인 노래로 객석을 압도하다
박정자 배우의 회고록 '노래처럼 말해줘'/사진=뮤직웰 제공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연기로 그려낸 여배우의 자화상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2월 8일 관람한 박정자 배우의 회고록 '노래처럼 말해줘'(~2.16,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냉정해야 할 평론가에게 과장과 미사여구의 욕구가 솟구칠 만큼 멋지고 기념비적인 무대였다. 여배우에게 나이는 세월의 흔적일 뿐 80을 코앞에 둔 배우 박정자는 한 떨기 만개한 꽃이었다. 투명한 회빛으로 염색한 머리며, 검정 롱드레스, 그리고 살짝 비치는 검정 하이힐이 그리 예뻤다.

“79세의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죽던가 80세가 되는 것”이라 읊조린 그는 이미 우리 나이로 팔순을 맞았다. 그 연배의 노배우가 1시간 15분 분량의 대사를 암기하고, 노래하며 춤의 스텝을 밟고 손끝 하나에 섬세한 이미지를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우리가 캐서린 햅번 못지않은 박정자라는 연극배우의 회고록 같은 연기 인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박정자 배우의 회고록 '노래처럼 말해줘'/사진=뮤직웰 제공 

박정자. 그는 1963년 데뷔하여 한 해도 무대를 쉬지 않고 58년 연극을 해왔다. 이제는 연극계를 대표하는 카리스마 배우이고 예술원 회원이지만 그로테스크한 목소리에 수줍음을 타는 그는 스타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극 기자인 필자가 그를 오래 지켜보았지만 프로필을 쓰거나 인터뷰를 할 때 그의 대표작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반세기 넘게 '햄릿', '오이디푸스' 등 수많은 고전과 창작극에 출연해왔지만 주연보다는 개성 강한 캐릭터로 각인되었다. 그가 이번 무대에서 떠올린 '위기의 여자', '19 그리고 80' 등은 그의 주연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대표작으로서는 어딘가 좀 부족한 점도 없지는 않다.

극단 자유의 많은 공연과 '피의 결혼', '억척 어멈', '키 큰 세 여자' 등을 리뷰하면서도 박정자의 대표작을 고르는데 주저했던 필자는 이번 '노래처럼 말해줘'를 보면서 “이 작품이 박정자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이것이 무슨 연극이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60년 가까이 무대에 서온 노배우의 내공 없이는 할 수 없는 “박정자만이 할 수 있는 토탈시어터”로서의 기량과 매력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감탄사로 표현하자면 “Great!!!”이고 “기념비적”이다.

기획사 제작이고 장소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이어서 관람료가 다른 작품에 비해 좀 센 편(6만 원, 7만 원)이지만, 이 가격은 음악회나 뮤지컬에 비해 결코 비싼 것은 아니다.

한 여배우가 80을 바라보며 혼신의 힘을 다해 무대 위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로, 노래로, 춤으로 유려하게 써 내려간 현장 아우라의 정서와 감동은 상업적 계산 자체가 무색한 게 아닐까.

 '노래처럼 말해줘' 포스터/사진=뮤직웰 제공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사회를 마비시키고 있지만 200여 객석에 관객은 만원이었다. 첫날은 기립박수까지 터졌다고 할 만큼 박정자라는 배우의 명불허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대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의 유화 작품을 연상케 하는 대형 스크린에 분장실과 소품들, 그리고 생음악으로 연주되는 피아노가 전부였다.

스크린에는 “그때와 지금의 나는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같은 자막과 영화 '페드라'의 영상, 애니메이션이 영사되어 모노드라마의 단조로움을 보완해 주었다.

“오늘 밤 극장의 신들과 날아오를거야.”

이 대사처럼 박정자는 자신이 출연했던 작품들을 연대기적으로 펼치며, 극중 인물의 대사와 이미지를 자신의 주관으로 표출했다. 결코 과장이나 자기 자랑이 아니라 진솔하면서도 위트가 넘친 애교만점의 퍼포먼스였다.

대사와 노래가 맛깔스럽게 교체되어 한 편의 새미 뮤지컬을 보는 느낌도 들었다. 관객들은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숨죽여 몰입하며 공감하고 감탄하고 박수를 쳤다.

박정자 배우의 회고록 '노래처럼 말해줘'/사진=뮤직웰 제공 

타인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박정자는 이번 '노래처럼 말해줘'에 유별나게 음악을 강조했다.

“한 생애는 음악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피아니스트 허대욱의 연주는 살아있는 연극 그 자체였고 유니크해 박정자의 모노드라마와 호흡이 잘 맞았다.

배우 박정자는 '페드라'의 주제곡 뿐 아니라 여러 곡을 가벼운 춤사위와 함께 보여주었는데, 역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부를 때는 박정자의 흑장미 같은 진한 매력을 발산했다.

필자는 박정자의 다양한 연기를 보아왔지만 이처럼 노래를 연기로 소화해 자기 이미지로 표출시키는 현장은 접하지 못했는데, 그의 고혹적인 필살기에 매료당했다. 이번 공연에서 노래가 없었으면 좀 삭막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예전에는 예술가의 전성기를 50~60대로 꼽았으나 이제는 80에서 100세까지도 만개하는 시대가 되었다.

79세의 연극배우 박정자는 포스터에서 디자인처럼 꽃으로 활짝 피어 풍만하고 짙은 향기를 뿜어냈다. 그는 머지않아 80으로 접어들 것이고, 그때는 우리가 생각 못 한 콘텐츠로 관객에게 또다른 매력을 안길 것이다.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지금, 나는 아직 부를 노래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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