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가며 불량배 선도하던 그를 찾았다
맞아가며 불량배 선도하던 그를 찾았다
  • 김우성
  • 승인 200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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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을 용서하고 새 삶을 찾았다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지난 4월 4일, <인터뷰365닷컴>의 고정 시리즈인 <당신을 찾습니다>를 통해 ‘맞아가며 불량배 선도하던 사설 치안대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26년 전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불량배 소탕과 청소년 선도에 매진하던 서재필 씨의 사연이었다.


그 주인공이 나타났다. 기사를 본 <인터뷰365닷컴> 독자들의 제보 덕분이었다. 당시 그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 서울 거리를 헤매면서 구두닦이, 우산장수 등 닥치는 대로 일한 끝에 기반을 잡아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다. 그 사람이 지금은 영혼을 일깨우는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변함없이 청소년 선도에 힘쓰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제보를 토대로 부인 권명순 씨와 연락이 닿았고 취재를 요청하자 그녀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의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의 지나온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으며 드라마 같은 삶을 영화화하자는 제의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없는 매체에서 취재요청이 있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지금은 목회활동에 전념하며 조용히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 그에게 인터뷰 약속을 받아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간곡한 기자의 요청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할 만큼 그는 순수하고 선량했다. 그가 담임목사로 재직 중인 교회를 찾은 것은 지난 6일이었다.



“나와 관련된 화제기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1982년이 내 인생의 정점이었지요. 그로부터 나의 인생은 가시밭길이었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죠. 재산도 잃고 내 사랑하는 두 딸도 잃고..”





그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던 건가요?

당시 제가 운영하던 체육관은 서울 한복판 대로변에 인접해 있어 요지 중의 요지였습니다. 누구나 군침을 흘렸죠. 당연히 이런저런 시비가 있었지만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Y모씨 일행을 만나면서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컴퓨터 관련 사업이 크게 유행할 것이라며 저에게 사업제안을 해왔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마음먹은 청소년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생각할 것도 없었죠. 그게 화근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부터 체육관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으로 찾아와 협박하는 사람들도 생겨나면서 일도, 가정도 지킬 수 없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체육관을 노린 계획적 방해였다는 말씀이시죠.

주된 이유는 그랬지만 그뿐 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청계천은 음란, 불법, 퇴폐의 온상이었습니다. 절도와 폭력이 끊이지 않는 어둠의 소굴이었죠. 그걸 사사건건 바로잡으려드니 그들에게 저는 ‘악(惡)’이었을 것입니다. 눈엣 가시였던 겁니다. 여하튼 일터에 와서 그러는 건 어떻게든 버텨보겠는데 가족에게까지 위협이 뻗치니 우선 피하는 방법 외엔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피신할 요량으로 서울 오류동에 월세방을 얻어 들어간 지 보름 만에 두 딸아이가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었던 겁니다. 저희 부부 역시 식물인간이 될 지경에서 겨우 목숨만 건졌고요.


피할 수 있었던 사고로 느껴져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으셨겠죠.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한 놈은 일곱 살, 한 놈은 네 살. 예쁘고 총명했던 아이들입니다. 아빠의 도움을 기다리며 죽어갔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고통을 감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는 슬픔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화상 입은 환부를 마취 없이 도려내는 수술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한다. 또 생전의 모친이 손녀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 그는 ‘내가 이렇게 살아있지 않느냐. 세정이(생존한 셋째 딸)가 이렇게 살아있지 않느냐’고 하며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Y모씨 일행은 입원중인 그에게 찾아와 “음란물 판매, 야바위 행위 등을 경찰에 신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서 목사는 다시 일어나 체육관을 재건해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1984년 10월 그는 구속된다.



구속된 것 역시 모함 때문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그 당시 일반체육관은 척추교정이나 지압 등이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언론매체에 광고도 낼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전후사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던 Y모씨 일행이 시경 경제계 형사들을 앞세워 체육관에 들이닥친 것입니다. 구치소에 있을 때 Y모씨가 찾아와서 저에게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헐값에 체육관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더군요. 당시엔 몰랐는데 그때 이미 체육관이 Y모씨 부인 소유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Y모씨 일행의 속셈을 알아차린 거죠.



Y모씨는 몇 해 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권력형 게이트의 주인공이다. 당시 검찰 수사팀은 기존 특수부 수사팀에 형사부 검사, 대검 계좌추적 인력 등까지 합류시키며 60여명에 달하는 ‘Y모씨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법조 브로커였던 그는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과시하며 사기·공갈·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최근 대법원에서 징역 8년에 추징금 12억3900여만 원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이후 목회자의 길로 접어드시게 된 건가요?

아니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치소에서 나오자 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악의 뿌리를 처단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언제든 실행을 하려고 방화도구와 무기를 집안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결전의 날이 되었다고 생각되어 가방과 옷 속에 준비해 두었던 도구들을 잔뜩 챙겼습니다. 그들이 있는 건물에 대한 상세한 파악도 미리 해둔 상태였죠. 그리고 집을 나섰는데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돌발 상황이 발생한 거죠. 아내가 나 몰래 가방 속 도구들을 모두 빼돌려 놓은 것입니다. 비록 아내이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죽자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집으로 향하는데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가 벌어져 꼼짝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별안간 뒷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저 대학생들이 너무 부럽다’


그야말로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입니다. 전주여고를 거쳐 교대를 나와 교편을 잡았던 아내는 이런 저를 놓치지 않으려, 어떻게든 끈을 잡으려 하는데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시위군중 속에서 봤던 아름다운 연세대학교 교정을 밟고 싶다는 꿈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도 그때입니다.


이제는 그들을 용서하십니까?

이미 용서했습니다. 용서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Y모씨와의 만남은 악연이었습니다. 하지만 Y모씨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조만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Y모씨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를 만나 모든 걸 용서한다고 말해주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해줄 것입니다.




시련 이후 그의 청소년선도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서울 증산동에서 무료독서실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꾸준한 청소년 선도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청소년선도 유공자 대통령 표창>, <서울시 정의로운 시민상> 등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복수를 포기한 지 15년 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며 오랜 꿈을 이룬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우직하고도 강인한 삶은 갈수록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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