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미술관장 강건국'의 행복어 사전
시골 '미술관장 강건국'의 행복어 사전
  • 조현진
  • 승인 2008.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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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살며 폭주족을 꿈꾸는 가일미술관 관장 / 조현진



[인터뷰365 조현진] 이정표가 양평군에서 가평군으로 바뀌는 고개를 넘자, 전화로 설명들은 ‘경기도에서 제일 큰 태극기’가 보였다. 경기도 가평군 삼회리. ‘좋은 날’이라는 뜻의 가일(嘉日)미술관은 그곳에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차장을 따라 쭉 나열되어 있는 ‘폭주족’들의 전신 사진들이었다. 어쩐지 이 강변의 그림같은 미술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사진들이 그곳에 걸려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이 미술관의 강건국(姜建國)관장(63세)을 만나는 순간 풀려졌다.



하하. 의문이 풀렸어요.

뭐가?


저 폭주족 사진들이요. 왜 저기 걸려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관장님을 뵈니까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냥 이해가 다 되네요.(웃음)

그래? 그렇다면 오늘 이 인터뷰 무지하게 재밌겠는데? 역시 전문 인터뷰어라고 하더니 시작부터 다르네.


왜요?

내가 가일미술관 오픈한 이후 인터뷰를 많이 하는데, 대체적으로 다 똑같거든. 사진 찍을 때도 밀짚모자에 장화신고 나오라고 하거든. 물어보는 것도 그 수준이고. 사람들이 시골 미술관장하면 생각하는 어떤 이미지가 있나봐. 그냥 넉넉하게 생긴 부자 할아버지가 할 일 없어서 고급취미로 땅 사놓고 미술관 합네 하는 거. 그런데 실상은 그런게 아니거든. 미술은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형식이잖아. 그렇지 않어? 대중가요는 가사만 따라 부르면 대충 다 이해하고, 영화는 상업적인 것과 작품적인 것이 딱 갈리지만 이 미술은 독창적이고 새롭지 않으면 다 ‘황’이라고. 즉 가장 작품적인 것이 가장 상업적인게 되는게 이거야. 그럼 미술관장은 그 가장 진보적 상품을 관객에게 설명해야 하는 사람인데 밀짚모자 쓰고, 장화신고 할 수 있겠어? 아니지. 미술관장 역시 가장 진보적인 모습으로 작품을 대해줘야만 관람객도 작품을 함부로 보지 않는다고.



그래서 폭주족이세요? 진보를 말하려고?

저 친구들은 <팻보이 클럽>라고 하레이 데이비슨 오토바이 몰고 다니는 동호회야. 원래 저 친구들이 청평으로 잘 몰려다니잖아. 우리 미술관을 지나치면서 나랑 알게 되었는데 가죽옷들 입고 있을 땐 모르는데 벗겨놓고 보면 아주 다 멀쩡한 친구들이야. 구성원들도 애들이 아니고 검사도 있고, 의사도 있고 그렇다고. 저 친구들과 하레이를 보면 이게 정말 예술이야. 왜냐하면 하레이는 오토바이긴 하지만 클래식이거든. 그리고 그 라이더들은 함부로 그 위에 그냥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옷이니, 두건이니 부츠를 다 준비하고 나서야 저 위에 올라간다고. 물론 무지하게 비싼 녀석이니까 그 정도 준비는 당연 한 거지. 하레이 타고 쭉 달리는 모습 본적 있지? 게네들이 교통법규 위반하면서 빨리 달려? 아니잖아. 아주 천천히 보란 듯이 달린다고. 속도를 내는게 아니라 되려 가능하면 라이더와 오토바이가 한 몸을 이룬 이 조합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보란 듯이 천천히 간단 말이야. 그래서 하레이와 라이더가 만나면 ‘오토바이’의 기본틀은 다 깨지고 새 형태의 문화가 나오는 거야. 이게 진보지. 이게 껍질을 깨는 거고... 그래서 나도 펫보이클럽 명예회원이야. 난 아직 하레이가 없거든. 사야하는데 미술관 하려니까 버는 건 별로 없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하지만 언젠가 꼭 살꺼야.


이 사람. 달변이다. 게다가 오토바이로 클래식을 설명하다가 진보로 이동시킬 만큼 사고의 필드가 넓다. 잘 만난것 같다.



우선 관장님이 어떤 분인지가 궁금해요.

난 45년생 해방동이야. 그래서 부모님이 이름도 건국(建國)이라고 지으셨지. 평안도에서 태어났다가 5살때 6.25가 터져서 월남한 실향민이고. 그래서 화가가 꿈이었지만, 화가가 될 가정형편이 못되었어. 특히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걸 결사 반대하셨고, 당시에는 은행원을 최고의 직업으로 생각했을 때니까 덕수상고로 진학했지. 그때 덕수상고는 전국에서 은행원을 제일 많이 배출하는 학교였어.


지금도 은행원은 최고 직업이예요.

그 말은 맞어. 이 미술관 하기 전 까진 몰랐는데, 이거 하면서 좀 없어(?) 보니까 은행 문 높은 거 알겠더라고. 하하. 그런데 상업학교를 갔는데도 난 은행원이 될 소질은 전혀 없었어. 도리어 미술반 활동 꾸준히 하면서 다른 학교에 제법 알려진 ‘그림꾼’ 들하고 ‘그림배틀’ 하면서 학교 다녔지. 그래서 나 고등학생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한 그림쟁이였다고.


하하. 그림 배틀. 그런 표현도 쓸 줄 아세요?

그럼. 요즘은 다 배틀이라며? 춤도, 게임도. 그러고 사니까 죽어도 그림을 포기 못하겠더라고. 아버지는 죽어도 그림 안된다고 하고. 그래서 별 수 있어? 타협을 한 거야. 아버지랑. 결국 내가 홍익대학교 건축과를 갔거든. 즉 그림은 그리되 돈 버는 그림 그리겠습니다. 하고 아버지랑 타협한 거지.



그러네요. 묘수네요.

묘수는 아니야. 고등학교 때 만난 그림쟁이 친구들은 다 회화과에 갔는데 나 혼자 건축과 가니까 ... 생각보다 콤플렉스가 많이 생기더라고. 어쩌면 그게 내가 미술관을 만들게 된 가장 원초적인 상황이야. 그렇게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무실을 다닐때 부터니까...음 76년도 부터 내가 그림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어. 그 이유가 바로 그 콤플렉스 때문이지.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가난하게 화가의 길을 갔는데 난 건축가가 되었으니까... 그럼 내 콤플렉스를 씻는 길은 그 친구들 그림을 내가 사주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하고 생각 한거지. 그때부터야. 내가 그림을 모으기 시작 한 것이.


76년 부터면이제 30년이 넘었네요. 그렇게 그림을 얼마나 모으셨는데요?

지금 가지고 있는 컬렉션은 한 300작품 조금 넘지. 정말 기를 쓰고 모았어. 처음에는 친구들 그림부터 시작하다가 적금타서 그림사고, 건축을 했으니까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출장비로 그림사서 시말서 여러 번 쓰고, 와이프랑 여행하다가 좋은 그림 발견하면 여행경비 다 털어서 그림사고... 뭐 그 정도였지.

우리 딸이 학교 다닐 때 다른 애들은 다 오리털 파카입고 다니는데 얘는 솜으로 만든 거 입고 다녔거든. 그런데 어느 날 딸 생일이어서 잠바하나 사주려고 백화점에 갔더니 얘가 무지하게 혼란스러워 하는 거야. 왜냐면 백화점에 지 친구들 다 입고 다니는 오리털 파카들이 걸려있는데 이게 한 20만원씩 하거든. 그걸 보더니 얘가 깜짝 놀란거야. 친구들 집 가보면 우리 집 보다도 작은데 이런거 다 입고 다니거든. 그래서 우리 딸은 이게 그냥 몇 만원 하겠거니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20만원 써 있는 가격보고 깜짝 놀란 거야. 아빠가 그런 옷을 사준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애가 굉장히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나봐. 처음엔 우리딸이 아빠는 돈 없고 가난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지난면서 그림 사 모으는거 보니까 얘가 혼란스러운 거지. 진짜 우리 아빠 맞나 하고.


개인 소장품이 많았으니 자연스레 미술관 욕심이 생겼겠군요.

건축과를 졸업한 이후 남의 회사에서 좀 일하다가 독립했지. ‘주식회사 일건축’ 이라는 회사를 경영했어. 죽어라 일만한다. 하고 지은 이름이지. (웃음) 그 회사 하면서 수원과학대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무려 23년이나 하게 됐지. 나중에는 회사 하나를 더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유일한 취미가 그림 모으는 거니까 어느 날 보니까 방 2개에 그림들이 꽉 차있는데 이게 점점 처치가 곤란하더라고.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걸 꺼야. 아! 이 작품들을 걸만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하고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구상하게 된 거지.



구상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하지. 그때가 아마 내가 마흔 살이 되기 전이었는데 이 미술관의 꿈 덕분에 나는 열심히 일해야 하는 동기하나가 새로 생긴 거야. 당신도 동의하겠지만 남자가 가장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나이는 35살에서 50살 정도잖아. 그때 자기 평생에 할 일중에 90%는 해 내야만 해. 할 수 있는 기회도 그때 제공되는 거고. 그래야 미술관이 생긴다. 그래야 내 60살 이후가 편해진다... 하면서 참 지독하게 일했어. 거의 몇 년간 1년에 하루도 못 쉬고 일했지. 물론 지금 보면 그때 생각이 다 맞았던 건 아니더라고. 꿈대로 미술관은 가졌고, 아직 현역이라는 기쁨은 있지만, 지금의 삶이 예상했던 대로 우아하게 폼 난다거나 편한 건 아니니까. 하하.


그전까지 삶과는 아주 다른 지난 5년이셨지요?

그렇지. 너무나 다른 시간이었지. 그 사이 미술관은 30번 이상의 기획전, 청년작가 지원전, 교류전 같은 걸 하면서 그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알려져서 자기작품 전시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작가들도 늘어났고. 물질적으로 잃은 것 보다 분명히 얻은 게 더 많아. 여기서의 몇 년 동안 새로 사귄 사람들이 평생 사귀었던 친구들보다 몇 십배는 많다고.



강건국 관장은 이런 식으로 미술가만이 아닌, 음악가, 연극인, 영화인, 의사, 변호사, 정치인, 교육자 등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관계를 넓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가일미술관의 후원회원이 되었고, 그 수가 이미 2,000명을 넘는다며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요즘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시장이 호황이라고 이야기들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위작논란도 생기고... 그러니까 일반인들의 관심도 많이 높아지고. 이 상황은 어떻게 보세요?

그 질문 잘했어. 그림이 돈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접근하는 건데 이거 정말 위험한 짓거리야. 그림은 환급성이 있는 게 아니야. 절대로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니라고. 우리나라가 미술시장이나 역사가 아주 일천하니까 이런 혼란이 생기고 그림으로 투기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이는 건데 그냥 작가이름 몇 명 앞세우는 화랑이나 경매자 말만 믿고 덜컥 시작했다가는 아주 낭패를 본다고. 가지고 있다가 반드시 팔겠다는 목표로 그림을 산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아주 위험한 발상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세요?

그림은 물질적 가치가 아니야. 이걸 분명히 알아야해. 그림은 그림으로, 투자는 투자로 구분해야 하는 게 당연히 결론이 되어야 하지. 그림은 좋아할 때 사는 거야. 그래도 명색이 미술관장이라고 나한테도 가끔 투자목적으로 그림을 사려고 하는데 조언 좀 해달라는 연락이 오거든. 그럼 나는 늘 똑같이 대답해. 우선 그림을 사는 연습부터 해라. 10만원 짜리 판화부터 시작하는 거다. 그러면서 공부하는거지. 공부하다 보면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스타일이 생기는데 그러면 그때 그런 작가의 소품부터 사면서 배워나가는 거야. 그렇게 하다보면 사람들 트랜드도 알게 되고 안목도 생기면서 한발씩 나가는 거지.



말씀은 이해가 되는데, 그러면 미술이 산업적으로 성장 하는 데에는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요? 관심이 생겨야 시장이 커지는 법이니까.

같은 말이야. 미술의 시장은 미술을 중심으로 커져야 하는 거야. 작품도 그렇고, 기초 인프라인 미술관 역시 마찬가지지. 사실 이 미술에 대한 사랑, 미술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미술관 못해. 생각해봐. 박물관은 지을 때 컨텐츠를 집어넣으면 그걸로 몇 년 그대로 가지만, 미술관은 아니잖아. 계속 새 기획, 새 전시를 해줘야 하는 거라고. 우리만 해도 큐레이터가 3명이나 돼. 열정이 없으면 이걸 어떻게 하겠어?

지난 5년간 가일미술관은 당연히 적자야. 나만이 대한민국 미술관 중에 99%가 적자라고. 그 사람들 다 미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지. 그러니까 시장은 이 중심에서 확산되어져야 옳은 거야. 그런데 문제는 그림에 투기하는 것처럼 미술관도 그런 식으로 운영되는 곳들이 있다는 거지.


그런 식이라 하시면?

미술관을 치부의 수단이나, 부의 과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분들도 간혹 있거든. 미술관은 면세란 말이야. 그리고 상속세도 안 물어. 그러니까 누구라고 밝힐 순 없지만 사람들은 미술관을 상속의 목적, 즉 자식들에게 재산을 불법증여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미술관 땅 덩어리 만으로는 성이 안차지. 그러니까 대 놓고 자기 소장 작품들에다가 값을 매기려고 해대는 거야. 나는 내가 가진 그림들이 얼만지도 몰라. 새 그림 사도 얼마 지나면 다 잊어버려. 가끔 그 그림 그린 작가가 와서 요즘 자기그림이 얼마씩 한다고 말해주면 ‘아, 이 정도 하겠구나.’생각하는 정도야.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시장을 쥐락펴락해서는 안 돼. 그래서 분명히 말하는데 우선은 미술관이 재정적으로 독립해야 해. 그래야 시장이 문란해지지 않고,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되지. 가일미술관도 마찬가지야. 우선 2010년까지 재정자립이 가능한 미술관을 만드는 게 내 목표라고.



그는 이 지난 5년간 이 가일미술관을 거의 떠나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밥을 먹고, 이곳에서 잠을 자고, 이곳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의 생활, 그의 전부가 된 이 ‘가일 미술관에서의 삶’에 대해 묻기로 했다. 강건국 관장은 오전에 책 읽고, 그림을 그리고. 미술관에서 사람을 만나며 하루를 산다고 말했다. 63살. 얼마 전에 잠깐 건강에 문제가 있었지만 어쩌면 젊은 날 자기가 원했던 꿈을 이룬 채로 누구보다 건강하게 오늘을 사는 남자. 그가 생각하는 ‘내일’이 궁금해졌다.


옆에서 보면 젊은 날 가졌던 꿈을 다 이루신 분이지만, 아직도 ‘꿈’은 있으시죠?

물론이지. 아직 꿈을 이뤘다기 보단, 그 ‘꿈 길’의 진입로에 들어온 정도야. 할 일이 아직 많지. 우선 가일미술관은 아까도 말했지만 2010년까지 채산성이 맞추어지는 공간이 되어야 하고, 그걸 위해서 좋은 전시가 독립적으로 꾸준히 채워지고, 지금 공연장에선 한달에 1,2회 연주회가 열리는데 매주일 연주회가 프로그래밍 되고. 회원중심, 인터뷰 365처럼 사람중심의 미술관으로 만들어야지. ‘가일 미술관’이라는 말 그대로 ‘미술과 음악이 있어서 좋은 날’이 되는 그런 행복한 미술관을 만들거야.



미술관의 꿈 말고, 관장님의 개인적인 꿈은요?

나는 미술관이 자리를 잡으면 또 ‘새 일’을 하고 싶지만, 그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고, 지금 원하는 건 ‘하레이 데이비슨’을 하나 사서 유럽의 국도를 달리고 싶지. 더 늙기 전에 말이야. 그리고 이 ‘주역’그림으로 유럽에서 내 개인전을 열 준비를 하고 있고. 이게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드림스 컴 트루 (Dreams Come Ture)'야. 이제 드디어 신인 화가로 데뷔하는 기회니까. 그렇게 그냥 ’잘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내가 산 방식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면서. 그래서 요즘 처음으로 오래 살아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어. 이 재밌는 삶을 좀 연장하면 좋겠다 하고.


참 보기 좋아요. 미술관도, 관장님도.

결국 찾아야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닐까 싶어. 미술관에 특성도 있어야 하지만 우선 여긴 편하고 행복해야 해. 음악도 즐기고, 그림도 보고. 기왕이면 경치도 좋고. 미술관에 오는 동안도 즐거워야 하고, 와서 쉬기도 해야 하지. 그게 행복이거든. 행복 위에 미술관 고유의 기술적인 것들이 드러나야 하는 거다. 진짜가 되면 사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다 알어.


행복을 정의해 주세요. 미술관장 강건국이 정의하는 행복.

행복은 모노드라마야. 우선 자신에게 묻는 거야. ‘야! 너 행복하고 싶냐?’ 그래서 스스로가 ‘응.’이라고 대답하면 이렇게 말해줘야 해. ‘그럼 네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줘라. 고구마 하나 구워주고, 오뎅 하나 사줘라.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을 봐라. 그 얼굴이 가장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좋은 그림이다.’라고. 난 그걸 배우는데 60년쯤 걸린 것 같아. 이 미술관엔 온갖 사람들이 다 오거든. 벤츠타고 오는 사람부터, 아침부터 서두느라 남편은 나들이 복 잘 입혔지만 자신은 정작 반찬국물 묻은 옷 입고 오는 주부들까지 있어. 그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 하면서 나를 통해 바뀌는 모습을 발견하지. 돌아가면서 교만했던 사람은 좀 겸손해지고, 피곤했던 사람은 좀 상쾌해지고. 이게 미술관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야. 사람들이 모두들 ‘돈’만을 말해. 얼마 전 어떤 젊은 친구에게 ‘야, 너 돈으로 안 되는 거 10가지만 대봐라’ 했더니 대답 못하더라고. 미국에서 MBA 공부까지 한 친군데. 그런데 아니야. 돈으로 안되는 것이 아직 더 많어.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어? 안되잖아. 세상은 그래야 되는 거야. 세상이 그렇게 못하면 나라도 그렇게 하려고 해야 하는 거야.



예정보다 긴 인터뷰였다. 그건 그가 예상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날을 꿈꾸는 미술관의 행복을 나누려는 준비가 되어있는 미술관장 강건국. 오늘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그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도 나에겐 행운이다. 주역책을 열어보지 않아도 ‘행운’이 바로 행복의 지름길을 찾게 되는 네비게이터임을 나는 안다. “야! 너 행복하고 싶냐?” 가일미술관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국도변에서, 부끄러운 듯 붉은 채로 서성이는 노을에게 나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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